상단여백
HOME 문화 역사 박희봉 교수의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
[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 3. 임진왜란의 배경②
박희봉 | 승인 2019.08.16 17:24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심과 대조선 전쟁선포

 
박희봉 교수
[박희봉 중앙대 인재공공학부 교수] 조선통신사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미리 보고 크게 반발하였다. 서신의 내용 중에서 “한 번에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에 들어가”, “귀국이 선구가 되어” 등에 대해 반발하였다. 조선통신사의 반발로 이 문구는 수정되었다. 그러나 조선측 사료에 조선 국왕에 대한 호칭을 “각하”로 자신보다 낮게 표현하고, 조공을 바치는 국가에 대해 주는 선물이라는 뜻의 “방물”, 조선 국왕을 자신의 신하로 생각하는 “입조” 등의 문자가 쓰여 있다고 한다. (기타만지. 15) 즉, 조선의 길을 빌어 명을 정벌한다는 뜻의 “가도정명(假道征明)”이든, 조선의 길을 빌어 명으로 들어간다는 뜻의 “가도입명(假道入明)”을 쓰던 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력을 조선에 보내겠다는 뜻을 분명히 전한 것이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심은 단순히 명나라 정벌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명나라를 정복한 후 북경에 거처를 만들고, 북경에는 천황과 양아들인 간파쿠(關白)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머물게 하고, 자신은 명·일 무역의 창구였던 영파(현재의 중국 상하이 근처)로 거처를 옮겨 천국(인도)까지 손에 넣으려고 했다. 이 같은 내용은 그가 자신의 가신들에게 말한 것으로 일본의 다양한 문서에 적혀있다.
 
한편, 조선통신사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 원본을 본 이상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하다는 점을 충분히 알았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는 조선 조정에 전달됐다. 추후에 유성룡의 징비록에 나오듯이 조선통신사 정사인 황윤길과 부사인 김성일이 침략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옥신각신 했다는 것은 언어유희에 불과하다. 즉 조선 역시 일본이 반드시 쳐들어 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단, 일본이 조선과 명나라를 침공할 만큼 큰 나라가 아니었다고 알고 있었기에 그 위험성을 모를 수는 있었다. 따라서 그렇게 많은 일본군이 그렇게 강력한 줄은 몰랐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이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이유,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명나라 침략을 위해 조선에 진입한 이유는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롯한 그 시대 일본인은 조선과 명나라에 대해 너무도 몰랐기 때문에 그의 과대망상이 가능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조선을 대마도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생각했으며, 명나라 역시 일본이 침략하기만 하면 쉽게 정복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왜구가 명나라에 들어갈 때마다 모든 중국인들이 왜구를 보기만 하면 도망쳤다는 사실에 의해 굳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이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외부세계에 대한 무지는 일본 내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즉, 외부세계가 정복하기 쉬운 상대라면 이를 정벌한 최초의 일본인이 됨으로써 일본 내에서의 자신의 권위를 보강하기 위한 기회로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그는 하급무사의 아들에서 천하인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미천한 신분으로 전체 일본을 통치하기 위한 권위의 부족했다. 따라서 일본통일 이후의 그의 행적은 어떤 행사를 치르던 간에 가장 화려하고 장엄하게 치른 것에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오와리국(尾長國)에서 수렵대회를 열었을 때에도 가장 성대하게 행사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을 기록한 포르투갈인의 저서(프로이스, 2008)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최초로 외국까지 영토를 넓혔다는 업적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킬 필요성 인식한 것이다.
 
셋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로 인해 100년 동안 지속된 전국시대가 마감되었으나, 독립된 군사력을 보유한 유력 영주(다이묘)의 군사력을 약화시켜야 하는 현실적인 필요성이 있었다. 일본통일 이후 국내에서는 군사력이 더 이상 필요 없지만 무사집단은 필요 이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 군사력을 방치하게 되면 국내에서 전쟁이나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들 군사력의 약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군사력을 보유한 독립된 영주의 군사력을 외국의 침략에 이용함으로써 자연적으로 유력 영주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이들이 외국에 가서 싸워 이긴다면 자신은 새로운 영지를 확보하고, 외국에 가서 싸움에 지더라도 영주들의 군사력을 약화시킨다면 자신에게 나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통일 이후 막대한 새로운 토지가 필요했다. 자신의 통일과업에 협력한 부하 장수 및 무사계급의 논공행상을 위해 이들에게 나누어 줄 토지가 필요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항복한 영주의 토지를 빼앗게 되면 다른 영주들의 반발을 사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럽게 외국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그가 부하 장수들에게 시시때때로 명나라와 인도를 점령한 후 엄청난 토지를 나누어 주겠다고 공언한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조선의 전쟁준비 및 군 편제
 
사진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조선 조정은 일본군이 침략해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단, 전쟁규모가 어느 정도이고, 일본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지 못함에 따라 전쟁준비를 체계적으로 하기는 어려웠다. 조선의 군 편제는 수도 방위 임무를 맡고 있는 오위군과 지방의 진관군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오위군과 진관군은 명목적으로만 구성되어 있었고, 실질적으로는 병적관리도 허술하고, 실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전투력을 발휘할 만큼 훈련이 되어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화포, 화약 등 주요 무기를 중앙에서 통제했기 때문에 외위군과 진관군 모두 무장의 상태도 열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일본과의 전쟁분비를 한 것은 분명하다. 조선 조정은 명나라 황제에게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올 것이라는 점을 알렸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1년 전부터 영남과 호남의 성곽을 수축하였다. 비변사가 왜적은 수전에 강하지만 육지로 올라오면 불리하므로 오로지 육지의 방어에 힘써야 한다고 청하였고, 국왕은 호남과 영남의 큰 읍성을 증축하고 수리하게 하였다.

1592년 2월에는 대장 신립과 이일을 파견하여 각 도의 병기 시설을 순시하도록 하였다. 이일은 호서와 호남으로 가서 병기와 시설을 점검하였고, 신립은 경기와 해서를 점검하고 한 달 뒤에 돌아왔다. 또한 변방의 사정을 아는 제신을 골라 하삼도를 순찰케 했다. 김수를 경상감사, 이광을 전라감사로 삼고, 윤선각 일명 국형을 충청감사로 삼아 병기를 준비하고 성지를 수축케 하였다.
 
왜구가 빈번하게 침범하였고, 일본군의 침략경로로 판단되는 경상도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조정에서 전쟁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따라 영천, 청도, 삼가, 대구, 성주, 부산, 동래, 진주, 안동, 상주 등의 지역은 성곽 및 참호를 증축 또는 축조하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이순신 역시 전쟁이 필연적으로 발발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군사를 훈련하고, 거북선을 비롯한 전함을 축조하였으며, 성곽을 보수했다. 진주성에서는 김시민의 지휘 하에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대포와 화약을 준비하였으며, 성곽을 보수했다.

하지만 조선 8도 전지역이 전쟁준비를 착실히 한 것은 아니다. 지역백성들이 전쟁준비로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고, 불필요하게 인력을 동원한다며 국왕에게 상소를 올림에 따라 전쟁준비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랫동안 태평성세가 계속되었으므로 백성들은 편한 것만 알고 부역을 꺼렸고 원성이 가득하였다. 성곽수축과 병기 마련, 군사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기가 어려웠다.

1593년 1월 조선 조정이 명나라에 보고한 조선군수를 중심으로 각 도별로 조선군수를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여기에 신립이 충주에 내려간 중앙군 약 8,000명을 합한 14만 8,800명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보유한 총 병력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조정은 나름대로 일본군이 침공했을 때 방어전략을 마련하기는 하였다. 일차적으로 경상도 지역에 일본군이 침공하면, 일차적으로 부산성과 동래성, 밀양성, 김해성 등에 주둔하고 있는 상비군으로 방어하고, 다음으로는 제승방략에 의거하여 경상도지역 및 충청도지역의 고을 수령들이 병력을 모아 대구와 충주에 집결한 후, 중앙에서 지정한 순변사의 지휘를 받아 일본군을 물리친다는 계획이다.

또한 조선은 병농일치의 군사체제를 갖춘 국가이다. 성인남자인 조선백성은 항상 상비군화 할 수 있기 때문에 전쟁이 길어지면 병력수가 증가될 수 있었다. 신립장군이 충주 탄금대전투를 치르기 위해 중앙군 8,000명에 더하여 충청도 장정을 약 12,000명을 징발했고, 경상, 전라, 충청의 3도에서 남도근왕군 50,000명이 모였으며, 일본군의 침략 이후 바로 곽재우가 거병한 것을 비롯해 전국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인 것은 바로 조선백성이었다.
 
본 매체는 박희봉 교수의 저서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를 발췌 1주일에 두 번 연재하고 있습니다.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는 국가통합을 위한 사회자본의 역사적 상징 모델을 진주성전투에서 찾던 중 발견한 임진왜란 전사의 왜곡과 역사의 진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 박희봉 교수: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푸른한국닷컴, BLUKOREADOT

박희봉  hbpark@cau.ac.kr

<저작권자 © 푸른한국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희봉의 다른기사 보기
icon최근 이슈기사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2019 대한민국 열린 토론대회'개최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2019 대한민국 열린 토론대회'개최
전대협, 대자보 20000장, 현수막 50장, 삐라 20만장 살포전대협, 대자보 20000장, 현수막 50장, 삐라 20만장 살포
류제국 전격 은퇴, 불륜설·도박설에 부상까지 더 이상 선수생활 지속 힘들어류제국 전격 은퇴, 불륜설·도박설에 부상까지 더 이상 선수생활 지속 힘들어
송자 별세,고등교육시스템 발전에 큰 공로 세워송자 별세,고등교육시스템 발전에 큰 공로 세워
icon가장 많이 본 기사
기사 댓글 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성북구 동소문동 2가 247 3층  |  TEL : 02-734-4530(代)  |  FAX : 02-734-8530  |  긴급연락처: 010-2755-6850
제호 : 푸른한국닷컴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아 01298  |  창간일 : 2010. 07. 20  |  발행·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전영준  |  마케팅이사 : 김혁(010-3928-6913)
Copyright © 2010-2019 푸른한국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ugsum@nate.com.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