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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 1. 한국 역사의 현주소
박희봉 | 승인 2019.08.08 18:45
 
본 매체는 박희봉 교수의 저서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를 발췌 1주일에 두 번 연재할 예정이다.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는 국가통합을 위한 사회자본의 역사적 상징 모델을 진주성전투에서 찾던 중 발견한 임진왜란 전사의 왜곡과 역사의 진실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 박희봉은 교수는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Temple University 정치학과에서 행정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희봉 교수는 공공인재학부에서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현재 중앙대학교 사회과학대학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편집자 주]
 
박희봉 교수
[박희봉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나는 한국에서 행정학으로 학사와 석사를 받고, 1989년 미국에 유학하여 1994년 행정학 전공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충격을 받은 것은 미국 유학 중에 일본인과 중국인 유학생들과의 대화에서 비롯된다. 대부분의 일본인과 중국인 유학생은 한국 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가끔 동아시아 역사에 대해 대화가 진행될 때 그들 입에서 나온 한국 역사는 “Korea가 고려에서 비롯되었듯이 한국 역사는 고려에서 시작,” 그리고 “조선은 중국의 속국” 정도가 고작이고, 특히 일본인 학생으로부터는 “왜 한국인은 일본인을 미워하는가?”라는 질문을 거의 항상 받았다. 일천한 한국 역사 지식으로 일본인과 중국인 학생들의 뿌리 깊은 역사인식을 바꾸려고 노력하였지만 이들을 합리적으로 설득하기는 어려웠다.
 
자연스럽게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외국인들이라면 살펴볼만한 영어로 된 세계사에 한국이 어떻게 소개되어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다니던 대학 도서관에 한국이 소개된 영문 세계사 책들을 찾아보았다. 큰 충격을 받았다. 고려 이전의 한국에 관한 역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부분 고려 역시 짧게 서술되어 있었고, 조선은 중국의 속국에서 일본에 병합된 국가로 소개되어 있었다. 일본인과 중국인 유학생들의 역사인식이 한국인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일 인식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왜 외국 책에는 왜 이렇게 한국이 소개되고 있을까? 나는 비로소 우리나라의 역사를 지금과 같이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일본학자였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그러니 일본 중심으로 한국역사가 서술된 것이다. 일본학자들이 정리한 한국역사는 일본이 한국을 통치할 수밖에 없다고 기술되었다. 나는 이에 대해 전율을 느꼈다. 이 과제가 나에게는 운명적으로 다가 왔다.
 
구가통합의 상징적 사건, 진주성전투
 
한국에 돌아와 내 전공을 우선적으로 튼튼히 하기 위해 전공분야에 몰두했다. 1998년부터는 사회자본으로 내 분야를 특화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사회자본 연구를 시작했다. 2012년까지 사회자본 연구를 계속하면서 사회자본이 갈등과 불신에서 벗어나 통합과 협력, 신뢰로 사회를 이끌 수 있는 이론적 기초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국가통합을 하나의 화두로 삼게 되었고, 국가통합을 위한 상징이 될 역사적 사건이 무엇인가를 찾았다. 일천한 역사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어렵지 않게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를 생각하였다. 동시에 이 작업이 워낙 방대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1994년 내 수업을 수강했던 학생이지만 이제는 어엿한 학자로 성장한 국회 내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장경석박사에게 함께 이 과업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내가 알고 있던 진주성전투는 승전과 패전이 함께 있었던 곳이기에 역사적 사건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에 따라 한국인의 국가통합 의지를 살릴만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진주성전투에 관한 책과 논문을 모을 수 있는 만큼 모두 모아 읽었다. 진주성전투에 대한 역사의 매력에 푹 빠졌다. 진주대첩으로 불리는 제1차 진주성전투는 5일 동안 10회의 전투가 있었고, 김시민이 이끄는 3,800명의 조선군이 8배가 넘는 3만명의 일본군을 10회 모두 격퇴했고, 제2차 진주성전투는 9일 동안 25회의 전투에서 진주성주둔군뿐만 아니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몰려온 5,800명의 조선군과 의병이 24회의 전투에서는 9만 3,000명의 일본군을 물리쳤지만 마지막 날 비로 인해 성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25번째 전투에서 모두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장경석박사로부터 일본사 조선역(임진왜란 편)에서 일본군 장수 누가 얼마나 많은 명력을 이끌고 임진왜란에 참전하였고, 1년 2개월 후에 일본군 장수별 병력수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한 기록을 알게 되었다.
 
두 차례 진주성전투 국가통합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학회에 논문을 발표하였지만 우리 조상들이 국가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였는지를 정확하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진주성전투에 대한 기본적인 역사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임진왜란으로 범위를 넓혔다. 객관적 입장에서 임진왜란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 알리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의 기록보다는 일본에서 발행된 기록을 우선하고, 조선군과 의병의 활동보다는 일본군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전투상황을 살펴보았다.
 
『일본전사 조선역』에 드러난 역사의 진실
 
한국인들이 기억하고 있듯이, 임진왜란이 발발한 초기에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조선의 핵심 지역을 점령하였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일본군 1군이 부산 영도에 상륙한 이후, 4월 14일 부산성, 4월 15일 동래성이 함락된 것을 시작으로 5월 3일 한양성, 6월 15일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이 기간 동안 대부분의 조선의 성은 전투다운 전투를 벌이지 못하였다. 조선관군이 동원된 상주전투, 충주 탄금대전투, 임진강전투, 용인전투에서 조선군은 일본군에 일방적으로 패하였다. 유성룡의 󰡔징비록󰡕을 비롯한 많은 문헌에서는 임진왜란의 이미지를 조선조정의 갈등 및 내분, 전쟁준비 부족, 선조와 관군의 무능, 전투의 패배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임진왜란은 한국인들에게 선조를 위시한 조정과 군의 무능과 전투패배, 전투로 인한 백성들의 고생 등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과정에서 일본군의 참전 인원 사망자수는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1924년 일본군 합동참모본부가 임진왜란이 정당한 전쟁이었음을 전제로 기술하여 편찬한 󰡔일본전사 조선역󰡕의 기록에 따르면, 우리 역사에 기술된 것보다 훨씬 많은 일본군이 임진왜란에 참전하였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의 피해만을 기억하느라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임진왜란동안 엄청나게 많은 일본군이 전투 중에 사망하였다. 그것도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기 이전인 1593년 1월 이전에 일본군은 조선에서 엄청나게 희생되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 개전 초부터 참전한 일본군은 1번대에서 9번대까지 15만 8,700명이고, 규슈의 나고야성(名護屋城)에 예비군으로 준비된 병력은 10번대에서 16번대까지 11만 8,300명으로 총 28만명이 넘는다. ①

일본측 기록에는 1592년 4월 1차로 1~9번대가 조선에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외 부대가 조선에 상륙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일본측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나고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장수가 조선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동시에, 1593년 6월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점호기록에 나고야의 예비대에 속한 대부분의 장수의 이름과 그들이 이끌던 부대의 군사수가 기록되어 있다.②

임진왜란 초기 전투에서부터 일본군의 병력손실이 심하게 발생함으로써 나고야에 대기하던 예비 병력이 초기부터 추가 배치됐다는 증거이다. 이것은 임진왜란 개전 초부터 조선군의 항일투쟁이 격렬하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일본전사에 참전한 기록이 확실한 일본군 수만을 계산할 경우, 임진왜란 초기부터 참전한 일본군은 22만 4,774명이고, 2차 진주성전투개시 전(1593년 6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진주성공격명령서 상에 기록된 공격군의 수 9만 3천명과 예비병력을 포함한 병력의 총수는 12만 여명이다. 이것을 계산하면 1592년 4월부터 1593년 6월 2차 진주성전투 이전까지 동안 일본군은 10만 명 이상이 전사한 것이다.

2차 진주성전투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3만 8,000명의 일본군을 합산하면 13만 8,086명이 사망하였고, 살아서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군 수는 8만 6,688명이 된다. 더욱이 나고야에 주둔한 것으로 되어 있는 예비병력 모두가 참전한 것으로 계산할 경우 참전 일본군 수는 28만 6,840명이고 사망자수는 20만 152명으로 일본군은 1년 3개월 동안 참전자의 69.73%가 조선에서 죽은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일본군이 계속 승리한 것으로 기록된 임진왜란 초기 1년 동안, 일본군의 한양성 점령 이후 조선 8도를 분할 점령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각 군의 지역별 사망자 수를 살펴보면, 조선군과 백성이 일본군에 대해 얼마나 철저히 저항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개전 초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작전명령서를 하달하여 1번대에서 9번대까지의 부대로 하여금 조선 8도를 분할 점령하도록 하였다.

일본군의 선봉에서 가장 많은 전투기록을 남겼고, 평양까지 점령한 바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번대는 1592년 3월 조선출병 당시 18,700명 규모였으나, 1년 후인 1593년 3월에는 7,415명만이 생존하여 사망률이 60.34%에 달하였다. 또한 전투기록이 많지 않은 황해도에 주둔했던 일본군 3번대(대표장수: 구로다 나가마사 黑田長政)는 같은 기간 동안 사망률이 53.80%, 강원도에 있었던 일본군 4번대(대표장수: 모리 요시나리 毛利吉成)의 사망률은 56.35%, 충청도에 주둔했던 5번대(대표장수: 후쿠시마 마사노리 福島正則)의 사망률은 45.27%에 이른다. 또한 이들의 부대에 지속적으로 병력이 보충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사망률은 이보다 훨씬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임진왜란 개전초기부터 조선 전역에서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에 대항하여 끊임없는 전투가 벌어졌고,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임진왜란 중 이순신장군이 이룩한 23전 23승의 해전 승리, 김시민목사의 진주대첩,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곽재우와 정문부의 의병활동을 알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산발적인 전투에서의 승리만으로 일본군의 엄청난 사망자와 철수를 해석하기 어렵다. 우리는 조상들의 치열했던 삶과 저항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임진왜란 개전초기부터 조선 전역에서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에 대항하여 끊임없는 전투가 벌어졌고,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임진왜란의 진실
 
이 책은 이렇게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임진왜란 시대 치른 각종 전투를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임진왜란에 대한 잘못된 역사 인식의 오류를 수정하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임진왜란에 관한 그 동안의 기록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 풀고자 하는 의문점은 다음의 것이다.
 
첫째, 일본군은 1592년 4월 14일 부산성을 공격한 이래 2개월만인 6월 15일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일본군의 전황을 분석하고 있던 일본군 1번대 지휘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선조가 주둔하고 있던 의주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니시와 함께 평양성을 함락시켰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황해도로 내려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둘째, 임진왜란 발발 후 1만명 이상이 참여한 군단급 전투에서 완승을 거듭하던 일본군이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5일 동안 10회의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 3만명의 병력으로 김시민 목사가 이끄는 3,800명의 조선군에게 처음으로 패배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셋째, 1593년 1월 9일 제4차 평양성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조·명연합군에게 패배하였다. 이 패배 이후 고니시가 이끄는 1번대가 한양성으로까지 후퇴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기 이전인 1592년 8월부터 한양성 퇴각을 논의하였고, 1593년 1월 고니시의 패배 이후 특별한 전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한양성으로 퇴각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넷째, 1593년 1월 27일 벽제관에서 일본군은 명군을 패퇴시켰다. 그러나 명군에 대한 승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북쪽으로 진격하지 않고 한양성에서 남쪽으로 물러났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다섯째, 1592년 4월 13일 이후 조선을 침략한 기록이 확실한 일본군은 총 22만 4,774명이고, 참전 가능했던 일본군 수는 총 28만 6,840명이다. 1593년 6월 20일 제2차 진주성전투 이전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점호한 기록에는 12만 1천 578명이다. 1년 2개월 동안 일본군은 최소한 총 출전자의 57.6%인 16만 5천 262명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제2차 진주성전투를 치르고, 임진왜란이 종료된 후 살아서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군수는 10만명이 되지 않는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여섯째, 1593년 6월 21일부터 6월 29일까지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일본군은 약 9만 3천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5천 8백명의 조선관군 및 의병이 지키던 진주성을 9일 만에 함락시켰다. 진주성 함락 후 일본군은 전라도로 점령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부산지역으로 후퇴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① 일본군은 1592년 1월 5일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각 지방의 제후들이 조선을 침공하기 위한 병력을 규슈지방의 나고야(名護屋) 성에 집결시켰다. 이때 제대(諸隊) 편성은 1~16번대(番隊, 각 번대병력은 4,000~24,000명 수준), 수송 및 수군(船手衆), 예비부대인 번외(番外) 2개 부대, 직속무사 부대인 하타모토(旗本) 등 281,840명으로 구성되었다(參謀本部編, 1924, 󰡔日本戰史 朝鮮役󰡕, 村田書店, pp.65~73.).

② 參謀本部編, 1924, 󰡔日本戰史 朝鮮役󰡕, 村田書店, pp.257~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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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 교수: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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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  hbpark@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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