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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 2. 임진왜란의 배경①
박희봉 | 승인 2019.08.13 20:55
조선의 평화시대와 일본의 전국시대

 
[박희봉 중앙대 인재공공학부 교수] 조선은 1392년 태조 이성계에 의해 건국된 이후 임진왜란까지 200년 이상의 평화를 구가했다. 조선이 건국한 이래 유교의 성리학을 받아들여 의(義)와 예(禮)를 숭상하는 문(文) 중심의 정치를 편 까닭에, 무(武)를 상대적으로 등한시하여 자연스럽게 국방력이 약화되었다. 명나라와의 선린 외교관계가 정착된 이후 대규모 군대를 양성할 필요가 없었다. 특히 세종대왕이 김종서, 이천, 이징옥 등의 장수를 보내 북방 여진족을 토벌하여 6진과 4군을 설치하고, 이종무로 하여금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보내 대마도를 평정한 이후 북방 여진족과 남쪽의 왜구의 피해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따라서 강력한 군대를 유지할 필요성을 잊어갔다.

또한 조선은 백성의 여론을 중시했던 국가로, 강력한 군대의 유지는 백성이 반대하였다.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농사를 짓던 장병을 징집해야 할뿐만 아니라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기 때문에 세금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여진족이 창궐하는 함경도 방어를 위한 6진을 유지하고,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의 침탈 방어를 위해 남해안지역에 최소한의 병력만을 보유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국방을 위해서 기병 중심의 엘리트 무관을 양성하고, 일반사병은 최소화하였다. 비상시에는 모든 백성이 군대에 징집되는 병농일치의 군대체제를 유지하였다. 국가 비상사태 시에는 과거에 의해 양성된 무관이 농민병을 지휘하여 극복하겠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조선은 의와 예의 나라로 다른 나라를 침범할 의지도 없고, 의와 예를 숭상하면 중원의 명나라와도 잘 지낼 것이라는 생각에서 군대의 양성보다는 외교관계를 위주고 평화를 구가하는 국가였다.

이에 반해, 일본은 1467년 중앙정부의 천황과 쇼군에게 대항하는 오닌의 난이 발생한 이후 중앙정부의 무력함이 들어남에 따라 지역 영주 간에 치열한 무력투쟁을 벌이던 시대, 즉 전국시대에 돌입하였다. 강력한 무력을 배경으로 영지의 토지와 농민을 지배하는 지역 영주가 출현하여, 이들 간에 전국 통일을 위한 100년이 넘는 끊임없는 전쟁을 겪었다. 이들의 승리의 전제는 부국강병이다. 토지와 농민을 기초로 한 경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농업기술과 토목기술을 발전시켰고, 전쟁 승리를 위해서는 전쟁무기의 발전과 군사훈련, 대규모 군단급 작전이 개발되었다.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통해 알게 된 조총(철포)을 받아들였고, 사카이(堺)에서 조총을 대량생산함에 따라 일본의 전투력은 급속도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총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전투기법을 완성한 오다 노무나가(織田信長)가 1575년 조총부대를 이끌고 당시 일본 최대의 영주인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賴)의 기마부대를 나가시노(長篠) 전투에서 물리친 후 일본의 통일 기반을 완성하였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통일 직전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배신으로 자결하게 되었고,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곧 바로 아케치 미쓰히데를 진압하고, 1583년 시즈카다게전투에서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를 진압하면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일본은 전국시대 100년 동안 전투력을 쌓았던 전쟁의 국가였다.
 
조선과 일본의 전투력 및 전투체제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전투력은 양식을 탈취하기 위해 함경도 접경에 나타나는 100여명 단위의 여진족과 남부해안을 침범하는 왜구를 방어하는 수준이었다. 수백명 단위의 여진족과 왜구에 대해서도 한 고을의 수령만으로 방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을묘왜변(명종 10년, 1555년. 전라도 해남을 비롯한 10개 진의 함락) 이후 진(요새) 별 소규모 군사를 분산 배치하는 지역방위 체제인 진관체제를 제승방략체제로 전환하였다. 제승방략체제는 진의 수령들이 유사시 군사를 이끌고 전략적 요충지로 모인 후 중앙에서 파견된 지휘관의 명령을 받아 전투를 치루는 중앙 집중 방위체제로서 적은 수의 진단위 군사로 효율성을 극대화시키겠다는 것이다.

당시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전투를 지휘할만한 조선의 장수는 이일과 신립 장군만이 손에 꼽혔으며, 그 나마 최대 1,000명에서 2,000명 정도의 기마병을 이끄는 정도였다. 또한 이 장수들도 일본의 대규모 침략을 예상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투준비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조선에서 장차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여 화포와 무기를 준비하고, 군사를 조련시킨 조선의 장수는 변방을 지키던 진주의 김시민판관(임진왜란 발발 후 목사로 승진)과 수군의 이순신장군 정도였다. 당시 조선의 분위기로는 이들이 극히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군의 전투력은 규모만으로도 인류 역사에 기록될만하였고, 실질적으로 당대 세계 최강이었다. 세계 최대 지역을 지배한 몽골군도 20만명의 기병이었고,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제패한 청나라 군대도 20만명의 기병이었다. 일본군은 이러한 기병을 물리칠 능력을 보유한 군단급 조총부대였다. 일본군은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무사집단이었다. 이들은 100여 년간의 내전을 통해 실전경험을 쌓아왔으며, 다른 영주의 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토목기술까지 장착하고 있었다.

일선 전투부대원뿐만 아니라 10,000명이 넘는 군단급 전투를 경험한 지휘관도 넘쳐났다. 실제로 일본 통일전쟁에 있었던 주요 전투는 한쪽 병력이 30,000명이 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들 지휘관은 냉철한 이성으로 자신의 부대의 장점과 적의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대원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상대 부대를 압도하는 방식으로 전투에 임했다. 이들은 전투에 투입되는 즉시 싸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 조선과 일본 관계
 
조선과 일본의 상대방에 대한 인식은 극단적으로 달랐고, 상대방을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조선의 대일본 인식은 한 마디로 작은 섬나라이고, 일본인은 해적 정도로 이해하였다. 대마도 너머 일본이라는 국가가 있기는 하지만 대마도 정도 규모의 또 다른 섬이 있을 것이라는 정도였다. 1590년 조선통신사를 파견하기 전까지 조선인은 120년 동안 일본을 다녀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에 일본이 어느 정도 규모의 국가이며,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이러한 일본에 대한 무지는 일본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일본 또한 조선에 대한 인식은 무지에 가까웠다. 대마도의 일본인은 조선과 명나라의 사정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일본 본토에 있는 장수들은 자신의 가신인 대마도 일본인의 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했다. 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는 대마도 왜구들이 조선을 언제든지 약탈하고 있고, 조선이 대마도에 쌀을 비롯한 대마도에 필요한 물자를 주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조선이 대마도에 조공하는 속국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착각은 그가 대마도 도주인 소오 요시토시(宗義智)에게 조선의 국왕인 선조로 하여금 일본을 통일한 자신에게 인사를 하러 오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잘 알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고 소오 요시토시는 꾀를 내어 조선 조정에게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해달라고 간청한다. 조선 조정은 통신사 길이 험하다는 이유로 거절하자, 소오 요시토시는 자신이 직접 길을 안내하겠다며 간청을 거듭한 결과 조선이 통신사를 일본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국왕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을 보면 그의 조선에 대한 인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우선 선조가 조선통신사를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서신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의 국왕은 하잘 것은 일본이라고 해도 예를 다 갖추었고, 통신사의 목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을 축하하는 것이다.
 
“조선 국왕 이연은 친서를 일본 국왕전하에게 드립니다. 봄기운은 온화하고 마낭의 움직임은 생동감 넘치고 아름답습니다. 대왕께서 60여 주를 통일하신 것을 전해 듣고 속히 믿음과 화목을 쌓아 우의를 돈독히 하고자 했으나, 길이 험함으로 막혀서 사신 보내기를 걱정하고 이 때문에 몇 해 동안 계획을 취소했습니다. 오늘 귀국의 어사들과 함께 황윤길, 김성일, 허상 삼인의 사절을 보내어 축하의 뜻을 전합니다. 지금 이후, 양국간 우호가 더욱 깊어지다면 심히 다행일 것입니다. 또한 변변찮은 토산물을 다른 두루마리에 기록하여 함께 보내오니 간절ㄹ히 바라건대 기쁘게 받아주시고 몸을 보중하시길 바랍니다. 불선.
1590년 3월.” (기타지마, 2008: 7)
 
이에 반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국왕에게 보낸 서신 내용은 예를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매우 오만하였다. 그의 서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 간파쿠(關白) 히데요시는 조선 국와 각하에게 바칩니다. 보내신 글은 감동스럽게 읽고, 재삼 펼쳐서 보고 접곤 했습니다.
우리나라 60여 주는 근래 여러 지역으로 분리되어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대대로 내려오는 예의를 져버리며 조정의 정사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3, 4년 사이에 반신과 적도를 토벌하여 먼 직과 섬들까지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삼가 나의 지나온 자취를 살펴보건대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일개 신하였지만, 일찍이 어머님께서 나를 잉태할 때에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복술사가 ‘햇빛이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표인풍(八表仁風, 팔표란 팔방의 아주 먼 끝. 인풍은 어질고 덕스러운 교화)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러운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이토록 기이한 징조로 말미암아 나에게 적대심을 가진 자는 자연 기세가 꺾여 멸망해 갔는데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빼앗았습니다. 이제 천하를 평정한 뒤로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고 외로운 자들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니, 백성들이 부유하고 재물이 풍족하므로 지방마다 바치는 공물이 전보다 만 배나 늘었으니, 본조의 개벽이래로 조정의 성대함과 수도의 장관이 오늘날보다 더한 적이 없었습니다.
비록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오래 산다 해도 예로부터 백년을 넘지 못하는 데 어찌 답답하게 이곳에만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나는 나라가 산과 바다로 막혀 멀리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한 번에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에 들어가 우리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심어 놓고, 교토의 다스림과 교화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입니다. 귀국이 앞장서서 입조한 것은, 앞일을 깊이 헤아린 처사이므로 이제는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 곳의 작은 섬에 있는 무리라도 늦게 복속해 온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에 나온다면 더욱 이웃으로서의 맹약이 굳게 될 것입니다.
나의 소원은 삼국에 아름다운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방물은 목록대로 받았습니다. 몸을 보중하고 아끼십시오. 불선.
1590년 음력 11월 일본국 간파쿠 히데요시.” (기타지마, 2008: 8-9)
 
이 내용에는 요약하면, “첫째, 나(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태양의 아들이어서 모든 전투는 다 이긴다. 둘째, 나는 명나라를 쳐들어 갈 것이다. 셋째, 조선은 자발적으로 일본의 통치하에 복속했으므로 쳐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단, 명나라를 정벌하는데 앞장을 서라” 등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얼마나 얕잡아보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본 매체는 박희봉 교수의 저서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를 발췌 1주일에 두 번 연재하고 있습니다.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는 국가통합을 위한 사회자본의 역사적 상징 모델을 진주성전투에서 찾던 중 발견한 임진왜란 전사의 왜곡과 역사의 진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 박희봉 교수: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푸른한국닷컴, BLUKOREADOT

박희봉  hbpark@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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