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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마지막회.한국인의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인식, 무엇이 문제인가.
박희봉 | 승인 2021.08.03 00:10
[박희봉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이 책을 쓰면서 내가 알고 있는 지인들에게 임진왜란에 대해 연상되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임진왜란에 대한 인식을 떠올리기조차 꺼려했다.

임진왜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의해 생각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기도 했다. 또한 임진왜란에 대해 아는 바도 별로 없었다. 신립이라는 이름도 잘 몰랐고, 진주성에서 두 번의 큰 전투가 있었다는 것도 잘 몰랐다.

전반적으로 임진왜란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부정적이었으며, 잘 알지도 못했고,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그저 기억하기 싫은 아픈 조상의 역사일 뿐이다. 그리고 한국인의 이러한 역사인식은 그대로 교과서에 담겨있으며, 우리 청소년들은 가슴 아픈 역사인식을 대물림 받고 있다.

현재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인식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조선 조정이 당쟁만 일삼다가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못했고, 그에 따라 일본군에 연전연패를 당하였다.
 
둘째, 신립은 다른 장수의 건의에도 불구하고 세재에 진을 치지 않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는 전술의 실수로 인해 일본군에 패배했다.
 
셋째, 선조는 한양성을 지키려고 하지 않고 자기만 살겠다고 백성을 버리고 피난 갔다.
 
넷째, 조선군은 육지 전투에서 승리한 바가 별로 없었고, 그나마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에 의해 조선의 명맥이 이어졌다. 이순신이 없었다면 전라도도 보존될 수 없었다.
 
다섯째, 일본군을 조선 땅에서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은 명군과 의병의 역할이었다.
 
여섯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다음에야 7년간의 전쟁이 끝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이 알고 있는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인식은 무엇일까?

그들도 우리와 같이 임진왜란에 대해 잘 모르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일본인은 한국인의 임진왜란에 대한 뼈아픈 역사인식과 다른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일본인이 알고 있는 임진왜란에 대한 기억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나일본부 경영 이후 외국을 경영하려고 한 첫 지도자였다.
 
둘째, 일본군은 강했다. 일본군은 임진왜란 개전 한 달 이전에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성을 함락했고, 두 달도 되기 전에 평양성을 함락시키는 등 조선 전역을 점령했다.
 
셋째, 임진왜란 전 과정에서 조선관군은 일본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다만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보다 강했고, 유격전을 펼치는 조선 의병이 일본군을 괴롭혔다.
 
넷째, 명군의 원조가 없었다면 일본이 조선을 지배했을 것이다.
 
다섯째, 일본군이 몇몇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지만 결국 일본군이 승리했다. 진주대첩에서 패배했지만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설욕했고, 행주산성전투에서는 첫 날 공격에서는 산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둘 째 날 공격으로 산성을 함락시켰으며, 조선 수군이 강하기는 했지만 결국 일본 수군이 칠천량전투에서 조선 수군을 괴멸시켰다.
 
여섯째, 일본군은 패배하여 철수한 것이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함으로써 철수하였다.
 
한국인의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인식은 일본인의 역사인식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한국인과 일본인이 공유하는 역사인식이 진실일까?

이 책을 준비하면서 한국인과 일본인의 역사인식이 오류가 있고, 그에 대해 밝혀져야 할 진실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나의 확신은 다음과 같은 임진왜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첫째, 일본군이 강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군이 임진왜란 각종 전투를 지배했던 시기는 초기 2개월뿐이었다. 일본군이 초기 전투에서 승리했던 요인은 100년이라는 긴 전국시대 동안 일본군은 국내에서 계속 전투를 치렀고, 일본이 통일되면서 전투로 단련된 28만여명의 병력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초기 패전을 경험하면서 조선군도 전투에 단련되었고, 군대가 조직화되면서 일본군을 공격하고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전투가 지속되면서 일본군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명군의 참전을 계기로 일본군은 명군과 강화를 맺으면서 후퇴의 명분을 찾았고, 결국 후퇴했다.
 
둘째, 임진왜란 각종 전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가장 많이 치른 당사자는 조선관군이다. 진주대첩, 행주대첩, 한산대첩 등 임진왜란 3대첩을 이끈 주역은 조선관군이었으며, 이외에도 대규모 전투를 치르면서 승리도 하고 패배도 한 주역은 대부분 관군이었다.
 
셋째, 임진왜란을 극복함에 있어서 조선 의병의 역할이 큰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의병 대장은 전직 관료였으며, 이들 또한 국왕으로부터 관직을 다시 제수 받았고, 관으로부터 군대와 무기, 병량을 지원받아 대규모화 한 군대로 조직화되어 전투에 임했다. 실질적으로 당시 관군과 의병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넷째, 임진왜란 참전 일본군은 최소 22만 4천명을 넘었고, 이들 중 약 14만명이 조선 땅에서 죽었다. 60%가 넘는 참전 일본군이 사망했다. 이것은 조선군과 백성이 치열하게 일본군에 대항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다섯째, 명군이 조선을 위해 임진왜란에 참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명군은 일본군과 단 두 차례의 대규모 전투를 치렀을 뿐이다. 제4차 평양성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명군은 일본군의 퇴로를 보장함으로써 자국 병사의 희생을 최소화하는데 주력했고, 벽제관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한 명군은 그 이후 일본군과 전투를 피하며 화의를 맺으려 했다. 명군과 일본군은 화의를 반대하는 선조를 배제한 채 그들만의 화의를 진행시켰고, 이 과정에서 명군과 일본군은 빠르게 병력을 자국으로 후퇴시켰다.
 
여섯째, 선조는 비겁한 군주가 아니었다. 반대하는 신하가 있었지만 선조가 주장하여 일본이 조선과 명나라를 침략할 것임을 명에 알렸고, 성의 축성과 무기의 준비, 군대의 양성과 훈련을 점검하였다.

일본군이 북상하자 선조는 자신을 경호할 최소한의 군대도 남기지 않고 모든 중앙군을 신립에게 맡기어 침략군을 퇴치하려 했다. 백성을 버리고 한양성을 떠난 것이 아니라 군대가 없는 한양성에 머물러서는 전체 전투를 지휘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북으로 몽진한 것이다.

국가를 보전하기 위해 광해군과 분조하였고, 초유사를 조선 8도에 보내어 일본군에 대해 항전할 것을 전하였으며, 전투에서 승리한 지휘관에게 관직을 올려주는 등 전반적인 전투를 지휘하였다.
 
일곱째, 조선 수군에 의해서만 일본군의 공격으로부터 전라도가 지켜진 것이 아니라 전라도는 수군을 포함한 조선군과 의병의 협력적 노력에 의해 지켜졌다. 금산성에서 웅치와 이치를 넘어 전주를 공격했던 일본군을 조선관군이 웅치와 이치에서 전투를 벌여 막았고, 고경명의 의병부대가 일본군의 본부인 금산성을 공격함으로써 일본군 부대를 후퇴시켰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진격한 일본군은 곽재우의 의병부대가 퇴치하였고, 경상우도와 전라도를 장악하기 위해 진주성을 공격한 3만 명의 일본군을 김시민의 관군 3,800명이 5일에 걸친 사투 끝에 결국 막아냈고, 이 승전을 바탕으로 조선관군과 의병은 경상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여 실지를 수복하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음으로써 일본군의 전투력을 약화시켰다.
 
여덟째, 제2차 진주성전투는 결코 패전이 아니다. 5,800명의 조선관군과 의병으로 9만 3천명의 일본군을 맞아 8일 동안 24차례의 공격을 막아낸 것은 임진왜란 전체 전투 중에서 가장 빛나는 승전으로 보아야 한다.

다만 25번 째 공격에서 성곽의 일부가 비로 인해 허물어짐으로써 압도적으로 많은 일본군에 의해 성이 점령당한 것이다. 특히 결국에는 함락될 수밖에 없음을 알고도 목숨을 자발적으로 바친 진주성 수성군은 전투 결과 약 4만 명의 일본군을 사망시켰고, 이로 인해 실질적인 임진왜란을 종결시켰다. 이 항전의 의미는 반드시 되살려져야 한다.

이렇게 한국인의 역사인식과 역사적 사실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인과 일본인의 역사인식이 유사하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한국 역사가 조선 강점 이후 일본 사학자들에 의해 쓰여 졌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역사인식에 의해 한국역사가 쓰였고 이러한 역사기록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학자들이 그 동안 많은 노력을 한 것도 사실이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내가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를 새로 쓸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한국 사학자들의 숨은 노력 덕택이다. 이들이 새로운 역사 사실을 발견하고 새로운 해석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일단 기록에 남겨진 역사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역사의 오류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오류에 의한 잘못된 역사인식에 의해 패배의식을 지속할 수는 없다. 더 이상 자라나는 우리 후손에게 잘못된 역사를 배우게 할 수는 없다.

우리 조상의 피로 지켜낸 우리 역사는 역사적 사실에 의해 진실이 회복되어야 한다. 임진왜란 중 각종 전투에서 승리했던 패배했던 간에 우리 조상이 국가를 지키려고 흘린 피의 역사의 진실을 찾아 역사에 기록해야 하고, 전적지를 원상태로 복구하여 국란을 극복한 영광의 역사를 후손에게 알려야 한다.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주요이력: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중앙대 행정대학원장.[편집자 주]

박희봉 교수의 '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를 마무리 합니다. 오랜시간 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자료를 제공해 주신 박희봉 교수님에게도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푸른한국닷컴, BLUKOREADOT

박희봉  hbpark@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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