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문화 역사 박희봉 교수의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
[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26.알려진 역사, 알아야 할 역사 ⑥
박희봉 | 승인 2021.07.31 22:28
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7. 임진왜란 관련 교과서 기록의 문제점과 개정 방향
 
[박희봉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처음 접하는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인식은 중학교 국사책으로부터 생긴다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 때도 국사 시간에 임진왜란에 대해 공부하지만 임진왜란에 대한 기술은 중학교 교과서가 보다 상세하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교육과학기술부가 지원하고 국사편찬위원회가 저술하여 2002년에 출판한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 서술된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고, 이 기록의 문제점과 대안을 논의하겠다.

위의 책 147쪽부터 149쪽에 서술되어 있는 임진왜란에 대한 서술은 다음과 같다.
 
왜군의 침입

조선이 양반 사회의 분열과 군역 제도의 문란으로 국방력이 약화되어 가던 16 세기 말,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크게 변하고 있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여진족이 다시 일어나 힘을 키워 갔으며,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00여 년에 걸친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여 통일 국가를 이룩하였다. 도요토미는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게 하고 자신의 대륙 진출 야욕을 펴기 위해 조선을 침략하고자 하였다.

일본은 서양에서 들여온 조총으로 군대를 무장시키고, 침략을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그리고는 명을 정복하러 가는 데 길을 빌리자는 구실을 내세워 20여만 명의 군사를 출병시켰다. 이를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1592년 4월, 왜군이 부산진과 동래성으로 침략해 오자, 정발과 송상현 등이 힘껏 싸웠으나 막지 못하고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그 후, 왜군은 세 길로 나누어 북쪽으로 쳐들어왔다. 조선 정부는 충주에서 방어선을 치고 그들의 북상을 막으려 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왜군이 한양 근처에 육박하자 선조는 의주로 피란하였다. 왜군은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한반도 전역을 그들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였다.
 
수군과 의병의 활약

조선은 육전에서와는 달리 해전에서는 곳곳에서 왜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 이어서 거북선을 앞세워 사천, 당포, 한산도 앞 바다 등 여러 곳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은 수군의 활약으로 제해권을 장악하여,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전라도 곡창 지대와 황해안을 지킬 수 있었다.

수군이 해전에서 승리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향토를 방어하고 조국을 구하여고 하였다. 향토 지리에 익숙한 의병은 그에 알맞은 전술과 전략을 개발하여 적은 병력으로도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의병은 경상도에서 곽재우가 처음 일으킨 후 조선, 고경명, 정문부, 유정(사명대사) 등이 여러 지방에서 왜군과 싸웠다.
 
왜란의 극복

수군이 승리를 거두고 의병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무렵, 명의 원군까지 도착하여 조선은 왜군에 반격을 가하게 되었다. 이 때 김시민은 진주에서,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경상도 해안 지방으로 밀려났던 왜군은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휴전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3년간을 끌어 오던 화의 교섭이 실패하자, 왜군은 다시 공격해왔다(정유재란, 1597).

임진년과 달리 이번에는 조선도 군비를 갖추고 명군과 협조하여 왜군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또 물러났던 이순신이 다시 기용되어 명량에서 왜군을 대파하였다.

마침 도요토미가 사망하고 전세도 불리해지자 왜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 때 이순신은 퇴각하는 왜군을 노량에서 격멸하였으나, 적의 유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로써 7년에 걸친 전쟁은 끝이 났다
 
왜란의 결과

7년간의 전쟁은 조선의 승리로 끝났고, 일본의 침략 의도는 좌절되었다. 일본은 조선의 항복을 받지도 못했고, 영토를 얻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이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조선이었다.

전 국토가 황폐하여 경작지가 전쟁 전에 비해 3분의 1 이하로 줄고, 인구도 크게 줄었다. 전쟁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으며, 일부는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유럽 등지에 노예로 팔려 가기도 하였다. 또, 전쟁 중에 노비 문서가 불태워지고 양반의 위신이 떨어져 신분제가 흔들리게 되었다.

문화재의 소실도 매우 커서 불국사, 사고 등이 불에 타 버렸고, 활자, 서적, 도자기, 그림 등 많은 문화재를 일본에 약탈당하였다.

임진왜란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일본에서는 정권이 바뀌었고, 명도 정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져 결국 만주의 여진족에게 중국의 지배권을 내주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으로부터 여러 가지 문화재와 선진 문물이 일본에 전해져, 일본은 문화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1) 왜군의 침입
 
우선 왜군의 침입 원인에 대한 조선의 문제점을 기술한 부분의 문제점이다. 교과서에서 왜군의 침입 원인에 대해 “양반 사회의 분열과 군역 제도의 문란으로 국방력이 약화”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양반 사회가 분열되었다는 것은 당파싸움이 발생하여 국론이 분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생한 1592년 전에 조선은 당파가 발생하기 전으로 양반 사회가 분열되어 있다고 하기 어려운 시절이다. 이 시절 동인과 서인이 있었지만 이들은 국정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자연스러운 의견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조선 조정이 분열된 증거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난 서인의 황윤길과 동인의 김성일이 서로 정반대의 의견을 내어 갈등했다는 것을 사례로 든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왜군이 침입할 것이라는 것을 논의 끝에 명나라에 통보했고, 지방수령에게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새로 쌓고 보수하라고 지시하였으며, 군대훈련 상황을 점검하였다.

어느 나라에 있어서도 중신들 간의 의견 차이는 건전한 국가발전에 도움이 된다. 조선 조정에 동인과 서인이 있었고 이들 간에 분열이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다고 기술하는 것은 사소한 것을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다. 이 시대 조선 조정은 조선 후기의 사색당파로 갈라지고 사화가 있었던 시절과는 달리 일치된 국론에 따라 임진왜란에 대비하고 있었다.

군역 제도의 문란에 대한 기술도 문제가 있다. 이 시대 조선은 200년 동안의 장기적 평화로 인해 군역 제도를 초기와 같이 엄격하게 시행하기 어려웠다. 조선은 국왕이 절대적인 독재권을 행사하는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국왕과 신하, 백성이 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있던 국가였다. 조선 초기와 같이 큰 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을 조정과 신하, 백성들이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군역 제도를 초기와 같이 엄격하게 시행하지 않고 있었다.

또한 이 당시 조정에서 왜군이 침입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각 지역에 축성과 군대의 훈련을 지시했을 때 각 지역에서는 조정의 리더십에 따라 준비를 하는 곳도 있었지만 조정의 지시를 형식적으로 받아들인 곳이 더 많았다.

즉 조선 양반 사회의 분열과 군역 제도의 문란 등 조선 조정의 내부 문제에 의해 국방력이 약화되고, 이에 따라 임진왜란이 발생한 것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조선의 국방력이 약화된 이유를 굳이 찾으려 한다면 200년 동안의 장기적인 평화에 따라 사회 전반적으로 국방에 대한 관심이 줄었기 때문이다.

교과서 역사기술의 중대한 문제점은 임진왜란의 발발 이유를 조선의 국방력 약화로 돌리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국방력이 약하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고 그는 조선이 임진왜란에 철저히 대비했더라도 침입하였을 것이다.

왜군이 침입한 이유는 우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격성과 왜군의 침략성에 의한 것이다. 조선 조정의 분열과 국방력 약화에 의해 왜군을 불러들인 것으로 기술하는 것은 조선 조정의 통치력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일본의 침략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된 역사기술로 볼 수 있다.

둘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적을 부풀리고, 그의 조선 침략 이유를 부정확하게 기술한 것의 문제이다. 교과서에서는 그를 “100여 년에 걸친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여 통일 국가”를 이룩한 것으로, 그리고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게 하고 자신의 대륙 진출 야욕을 펴기 위해 조선을 침략”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의 100년의 혼란을 수습한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그에 대한 과대한 표현이다. 100년 간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통일 국가를 구축한 인물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의 배신으로 자결한 후,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을 손쉽게 장악하여 오다 노부나가가 이룩한 통일 과업을 물려받은 인물이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100년 간에 걸친 전국시의 혼란을 수습한 인물로 묘사한 것도 그에 대한 과대한 평가이다. 그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키려는 야심을 가진 전국시대 수많은 인물 중의 하나이지 일본인의 평화를 위해 전국시대를 마감시키고자 노력한 인물은 절대 아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대한 기술에 문제가 있다. 그는 중국과 인도까지 점령하겠다고 공언한 과대망상증 환자였으며, 그 일환으로 조선에게는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길을 빌려주고 자신에게 협조하라고 하였다. 그는 일본의 통일 이전까지 전쟁을 직업으로 살고 있던 무사계급의 힘을 돌리기 위한 전쟁터가 필요했던 것이다.

셋째, 왜군의 임진왜란 준비에 대한 기술의 문제점이다. 교과서에는 “일본은 서양에서 들여온 조총으로 군대를 무장시키고, 침략을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고 하고 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조총으로 군대를 무장시킨 것은 아니다.

일본이 포르투갈에서 조총을 받아들인 것은 전국시대 중이었고, 조총을 받아들여 전투에 활용한 사람은 오다 노부가나였다. 그는 기마병 중심의 부대를 운용하고 있던 일본 최대의 영주인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賴)의 부대를 나가시노(長篠) 전투에서 조총으로 무장된 보병 중심의 신개념 작전으로 물리치고 일본의 통일 기반을 완성하였다.

즉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전쟁준비를 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어떤 전쟁준비도 되어 있었다. 일본이 전쟁준비를 하였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조선은 전쟁준비를 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전쟁준비를 철저히 하였다는 서술 역시 상대적으로 조선에 문제가 있음을 강조하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넷째, 임진왜란 초기 전투에서 조선군의 전투 패배, 그리고 왜군의 활약상에 초점을 맞춘 기술의 문제이다. 교과서에서는 조선 측에 대해서는 부산성전투와 동래성전투, 충주 탄금대전투에서의 실패, 선조의 의주 피난 등 부정적인 측면만을 언급한 반면, 일본 측에 대해서는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의 진출이라는 긍정적 측면을 기술하고 있다. 이것만으로 본다면 조선의 패배와 일본의 승리가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임진왜란 초기 전투에서 조선군이 왜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세계 어느 나라에 벌어진 전투에 있어서 예상치 않은 다수 병력에 의해 외침을 당하여 초기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은 국가는 없다.

부산성에서 정발은 800명의 관군을 이끌고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된 1만 8,700명, 20배가 넘는 왜군을 맞아 4시간 동안 전원 전사할 때까지 혈전을 벌였다. 또한 동래성에서 송상현은 부산성 함락을 알고 있었지만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키기는 어렵다”고 하면서 적은 병력으로 모두 전사할 때까지 싸웠다.

충주 탄금대전투에서도 2,000명 규모의 기마병을 운영하여 여진족을 연파했던 신립이 8,000명의 조선중앙군 기마부대와 1만 2,000명의 급조된 농민군을 이끌고 배수진을 쳤으나 기마전에 대한 전략을 알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에 패배하였지만 조선군 전 병력은 끝까지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평생 전투로 단련된 압도적인 병력과 우수한 무기로 준비된 왜군이 전투경험이 없는 조선군을 이긴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당연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할 이유는 없다. 반면, 모두 죽을 줄 알면서도, 지는 것이 당연한 전투에서 끝까지 전투에 임한 역사적 사실은 더 가치가 있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실이 기록되지 않고, 역사적 가치가 없는 사실만이 기록되어서는 안 된다.

선조의 의주 피난에 대한 기술은 더 큰 문제가 있다. 교과서에는 “왜군이 한양 근처에 육박하자 선조는 의주로 피란하였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선조는 자신만이 살겠다고 백성을 버리고 피난가지 않았다.

선조는 신립을 삼도순변사로 임명하여 충주로 보내면서 국왕을 호위할 최소한의 내시도 남기지 않고 기마전을 수행할 수 있는 모든 중앙군을 보냈다. 충주 탄금대전투 이후 한양성을 지킬 수 있는 군대는 남아있지 않았다. 따라서 선조는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선조가 국가보다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 국왕이라면 자신을 지킬 호위무사까지 전쟁터로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선조가 군대도 없는 한양성에 남아 있다가 왜군의 포로라도 되는 날에는 조선백성은 왜군에 항거하지 못하고, 조선은 완전히 없어지게 된다.

피난을 떠난 선조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 왕세자인 광해군과 분조를 하였다. 선조가 사망하는 경우 왕세자가 국가를 지휘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선조는 후방에서 모든 전쟁 상황을 지휘하고 있었다. 각지에 초유사를 파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왜군에 항거하게 하였고, 공을 세운 장수에게 벼슬을 올려주었으며, 의병 대장에게는 관직을 수여하여 관군에 편입시켰고,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 지원군을 파견하게 하였다.

선조가 후방에서 전쟁을 지휘하지 않았더라면 조선백성의 애국심은 반감되었을 것이고,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것이 더울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선조가 백성을 버리고 자신만 살겠다고 의주로 피난을 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기술은 옳지 않다. 선조가 단순히 피난을 떠났다는 것은 조선이 백성을 위한 국가가 아닌 통치력 부재의 국가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 기술 역시 조선의 통치력 부재를 강조하는 고도의 전략적 음해이다.

왜군이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진출했다는 기술도 문제가 있다. 이러한 역사 기술은 마치 조선 전역이 왜군 수중에 있었던 것으로 오해할 여지를 남긴다. 왜군이 평양을 함락시켰고, 함경도 지방의 주요 도시를 점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왜군이 경상도에서 충청도를 거쳐 한양성을 점령한 후, 일부는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로 향하고, 일부는 황해도를 거쳐 평양까지 진출하는 과정에서 거점 도시는 점령하였지만 거쳐간 곳 모두를 점령한 것은 아니었다. 왜군은 거점 도시를 점령하고 거점 도시를 잇는 축선 상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방책을 쌓았다. 조선군과 의병의 기습에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즉 왜군은 평양과 함경도까지 진출하였지만 실질적으로 거쳐간 전지역을 실질적으로 점령하여 통치한 것은 아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8도를 점령하기 위한 왜군 부대를 배치하였고, 이들 부대에게 명나라 침공을 위해 조달할 병량을 지정한 바 있다. 그리고 이들 부대에게 명나라 침공을 함께 치를 조선백성 모집도 명령하였다.

그러나 조선백성은 이들 부대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조선백성은 점령자인 왜군에게 철저히 저항하였다. 따라서 왜군은 소수의 병력만으로는 거점 지역 밖으로 진출하지 못했고, 병참과 병력을 차출하지도 못했다. 이것은 임진왜란 첫해 겨울을 맞아 왜군이 진주대첩 이외에는 패전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후퇴를 논의하기 위해 지휘관 회의를 한양성에서 개최하였고, 전 부대가 식량보급 부족을 호소한 것에서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왜군이 평양성과 함경도까지 진출하기 이전부터 왜군은 조선군과 의병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왜군이 평양에 진출하기 전에 이미 조선 수군은 경상도 앞바다에서 1차 출동으로 옥포해전을 비롯한 3차례 해전, 그리고 2차 출동으로 사천해전을 비롯한 5차례 해전에서 승리하였고, 경상도 지역에서는 곽재우와 김면, 정인홍의 의병부대가 왜군과 격전을 치르고 있었다. 또한 전라도와 경상우도는 왜군이 침략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웅치와 이치를 넘어 전주를 점령한 후 전라도를 점령하고자 한 왜군 6번대는 웅치와 이치에서 권율이 이끄는 관군과 격전을 치렀고, 고경명 의병부대로부터 왜군의 거점인 금산성 공격을 받고는 전주성 앞에서 금산성으로 퇴각하였다. 또한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경상도로 돌아 진격하던 왜군은 경상우도의 관군과 의병부대의 공격을 받고는 퇴각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왜군이 일방적으로 승리를 거둔 것으로 기술된 교과서는 수정이 요구된다. 임진왜란 초기부터 국란을 극복하기 위해 힘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는 객관적인 역사 기술로 인정할 수는 없다.
 
2) 수군과 의병의 활약
 
수군과 의병의 활약으로 제목을 단 이 문단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특히 첫 문장에서 “조선은 육전에서와는 달리 해전에서는 곳곳에서 왜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는 것은 조선군 및 조선 정부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을 담고 있다. 임진왜란 시 수군과 의병이 많은 활약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각종 전투에서 조선 육군의 활약 없이는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 육군은 수군이나 의병보다 큰 활약을 펼쳤다. 육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조선관군은 임진왜란 초기 2개월간은 왜군의 기습으로 각종 전투에서 패배하기는 하였지만, 그 후에는 전열을 가다듬어 왜군을 공격하였다.

전라도를 침범하려는 왜군을 맞아 웅치와 이치에서 전투를 벌인 부대는 권율이 지휘한 전라도 관군이었고, 1차 평양성전투에서 패배한 후, 평양성을 수복하기 위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나 왜군을 공격한 부대는 평양 인근 고을의 관군이었다. 창원전투, 진주대첩, 독성산성전투, 행주대첩으로 왜군을 격파한 부대 역시 조선관군이다. 조선관군의 활약을 부정하고 수군과 의병의 역할만을 기술하는 것은 조선이 국가다운 국가가 아니었음을 강조하는 불순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전라도 곡창지대를 지킨 것이 수군의 활약이었다고 기술한 것도 문제가 있다. 수군의 활약만으로 전라도가 지켜졌다는 것을 우리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외국인에게 납득시킬 수는 없다. 그리고 전라도가 지켜진 것은 수군의 역할뿐만 아니라 전라도에 주둔하고 있었던 조선관군과 경상우도에서 왜군의 침입을 막은 조선군과 의병의 역할에 기인한다.

“수군이 해전에서 승리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향토를 방어하고 조국을 구하려고 하였다”는 기술도 문제가 있다. 또 다시 수군과 의병이 왜군을 맞아 싸운 반면 조선 육군은 어떤 역할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이 표현은 조선은 국방체제도 갖추지 못한 국가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조선 조정은 무능하였고, 조선군은 초기 왜군에 의해 모두 격멸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조선관군은 임진왜란 초기 패배할 때도 왜군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하여 임진왜란 초기 2개월이 지나면서부터는 왜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진주대첩을 계기로 전열을 가다듬고 왜군을 압박했다. 물론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초기부터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왜군의 예비대가 일본에서 남해와 서해를 돌아 평양으로 보낼 수 없도록 차단했을 뿐만 아니라 왜군 해상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왜군의 전투력을 약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육군의 승전 없이 해전만의 승리로 전쟁을 끝냈다는 것은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더욱이 조선 수군 역시 관군이다.

의병의 활약을 강조하는 것도 국가로서의 조선을 부정하는 격이 된다. 그리고 의병의 인적 구성 역시 관군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은 병농일치의 국가로서 조선백성은 모두 관군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의병장은 대부분 전직 관료이다. 경상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김면, 정인홍 모두 벼슬에서 물러난 전직 관료이다.

전라도의 의병대장 고경명, 김천일, 최경회, 임계영 등도 모두 전직 관료이다. 충청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 역시 보은현감을 지낸 바 있고, 함경도에서 북관대첩을 주도한 정문부도 함경도 북평사를 지낸 문관이다. 또한 조선 조정은 이들에게 공식 벼슬을 주어 관군으로 편입하였고, 관군으로 편입된 의병장들은 주변의 관군과 연합군을 만들어 전투를 벌였다.

곽재우 등 경상도 의병이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함안군수 유승인은 기마병 1,000기를 지휘하여 창원 등 경상도 남해안에 있는 주요도시를 수복하였고, 진주목사 김시민은 창원, 김해, 사천, 금산 등에서 왜군을 물리쳤고, 우척현전투에서는 김면과 함께 전투를 벌인 끝에 승전을 이루었다.

즉 수군과 의병이 임진왜란 극복에 큰 힘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국란을 극복한 것은 선조를 중심으로 한 조선 조정과 조선군의 노력의 결과이다. 조선은 엄연히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던 독립 국가였다. 따라서 임진왜란 중 왜군에 타격을 입힌 주체는 조선군과 조선백성으로 기술되어야 할 것이다.
 
3) 왜란의 극복
 
왜란의 극복을 기술한 교과서 내용은 더 큰 문제가 있다. 여기에서 또 다시 “수군이 승리를 거두고 의병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무렵, 명의 원군까지 도착하여 조선은 왜군에 반격을 가하였다”고 기술함으로써 조선군이 아무 역할을 하지 않은 것으로 강조하는 동시에, 명군을 임진왜란 극복의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조선의 국가체제를 완전 부정하는 대목이다.

또한 조선군이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6월 평양성 함락 이후부터는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왜군을 공격하였고, 1592년 10월 진주대첩 승전 이후부터는 조선군이 완전히 승기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명군은 1593년 1월 조선군이 왜군에 대한 승기를 잡은 이후 참전하였다. 명군이 도착한 이후 조선이 왜군에 반격을 가했다는 것은 심각한 역사왜곡이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진주대첩으로 인해 일본군이 타격을 입고 보급로가 끊어져 왜군 지휘부가 한양성에서 후퇴를 논의한 이후에 명군이 평양에 도착한 사실을 교묘하게 뒤집어 놓고 있다. 명군이 도착했을 때 진주대첩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명군이 도착하기 이전에 조선군은 진주대첩의 승전 등으로 전투의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왜군은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수복을 계기로 모두 한양성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벽제관전투에서 왜군이 명군을 패퇴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왜군은 이후 한양성을 버리고 부산지역으로까지 후퇴한 것이다.


한편, 왜군이 휴전을 제의한 이유에 대한 기술도 문제가 있다. 교과서에는 “왜군은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휴전을 제의하였다”고 되어 있다. 왜군이 누구에게 휴전을 제의하였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휴전을 제의한 것도 아니다. 휴전 제의는 명군과 왜군이 동시에 하였다. 조선은 휴전을 제의하지도 응낙하지도 않았다.

명군은 벽제관전투에서 왜군에 참패를 당한 후 전의를 상실하고 왜군에 휴전을 제의한 것이고, 왜군은 지속적인 조선군의 공격에 의해 전투력을 상실하여 명군에게 휴전을 제의한 것이다. 특히 왜군은 1593년 6월 총병력을 동원하여 진주성에서 8일 동안 25회의 격전을 치른 끝에 전투력을 상실하여 퇴각의 명분을 명군과의 휴전에서 찾은 것이다. 즉 왜군은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휴전을 제의한 것이 아니라 “전투력을 상실하여” 휴전을 제의한 것이고, 휴전 제의의 대상은 조선군이 아니라 명군이었다.

또한 “3년 동안 끌어 오던 화의교섭이 실패”하였다는 기술도 잘못된 것이다. 명군과 왜군은 화의교섭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할 것이 분명한 화의교섭을 진행한 것이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전투가 끝난 후 명군과 왜군 간에 전라도 지역에서 작은 전투가 있었지만 명군과 왜군은 쌍방 군대를 본국으로 빼돌렸다.

이 때 명군은 타국에서의 싸움에서 군대를 희생할 생각이 없기에 왜군과 졸속으로 화의교섭을 하여 군대를 본국으로 철수하였고, 왜군은 조선군과의 지속적인 전투에서 전투력을 잃었기에 화의 교섭을 명분으로 군대를 철수한 것이다. 화의교섭을 진행한 명군의 송응창과 이여송, 왜군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황제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각각 서로 다른 화의조건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이 거짓 화의조건에 의한 화의교섭이 체결되기도 전에 양군은 철수를 시작했다. 양군은 모두 지속하고 싶지 않은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쌍방 화의를 제의했고, 군대를 철수한 것이다.
 
4) 왜란의 결과
 
왜란의 결과에 대한 기술 역시 철저하게 잘못되었다. 왜란의 결과에 대한 평가의 주체가 일본으로 되어 있다. 한국 역사 교과서에 한국이 주어가 아니라 일본이 주어인 문장이 있을 수 없다.
우선 “7년간의 전쟁은 조선의 승리로 끝났고, 일본의 침략 의도는 좌절되었다”에서 문장의 주어는 첫 문장에서는 전쟁이고, 둘 째 문장에서는 일본의 침략 의도이다. 왜란의 결과를 우리가 평가함에 있어서는 조선이 주어가 되어야 한다. 즉 같은 뜻이라고 해도 이 문장은 “7년간의 전쟁 결과 조선은 왜군의 침략 목적을 좌절시키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했다”로 주어가 바뀌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일본은 조선의 항복을 받지도 못했고, 영토를 얻지도 못했다”는 기술 역시 주어가 일본이다.

다음으로 “전쟁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으며”라는 포로라는 표현의 문제이다. 포로란 전투에서 항복한 군인을 말한다. 임진왜란 중에 왜군이 일본으로 끌고 간 조선인 중에는 항복한 군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는 민간인이다. 왜군이 포로를 잡아간 것은 정당성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군은 임진왜란 중에 민간인을 학살하고 민간인을 끌고 갔다.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한국 역사 교과서에 왜군의 범죄행위를 정당화시킨 이유를 모르겠다.

또한 “문화재의 소실도 매우 커서 불국사, 사고 등이 불에 타 버렸고, 활자, 서적, 도자기, 그림 등 많은 문화재를 일본에 약탈당하였다”는 기술 역시 주어가 잘못되었다. 불국사와 사고 등이 불에 탄 것으로 주어를 불분명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문화재를 약탈당했다고 표현함으로써 조선이 무능하여 당했고, 왜군의 범죄 사실을 교묘히 감추고 있다. 불국사와 사고 등은 불에 탄 것이 아니라, 왜군이 불국사와 사고를 불에 태운 것이다. 그리고 (조선이) 문화재를 약탈당한 것이 아니라, 왜군이 문화재를 약탈한 것이다.

“조선으로부터 여러 가지 문화재와 선진 문물이 일본에 전해져, 일본은 문화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기술 역시 주어가 일본이다. 한국 역사 교과서에 일본이 주어일 이유는 없다. 이렇게 교과서에 일본이 주어로 되어 있다는 것은 초기에 일본인이 한국 역사를 썼다는 엄연한 증거이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가 아직도 개선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는 우리의 시각으로 개정되어야 한다. 개정되어야 하는 임진왜란에 대한 서술을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왜군의 침입

조선은 1392년 태조 이성계에 의해 건국된 이후 임진왜란까지 200년 이상의 평화를 구가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1467년 오닌의 난 이후 중앙정부가 무력해지자 지방영주 간에 서로 세력을 넓히려는 전국시대에 돌입하여 100년이 넘는 전쟁을 겪었다. 1575년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의 통일을 이루기 전 부하의 배신으로 사망하자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과업을 완수하였다. 도요토미는 통일 이후 무사계급이 직업을 잃어 정국을 불안정하게 만들 것을 피하고, 무사의 전투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대륙 진출 야욕을 펴기 위해 조선을 침략하고자 하였다.

일본은 전국시대에 이미 서양에서 조총을 들여왔고, 무사들을 양성해 온 터라 침략 준비를 특별히 할 필요가 없었다. 도요토미는 명나라와 인도까지 점령할 계획을 세웠고, 우선 명을 정복하러 가는 데 길을 빌리자는 구실을 내세워 28여만 명의 군사를 출병시켰다. 이를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1592년 4월, 왜군이 부산진과 동래성으로 침략해 왔고, 정발과 송상현 등이 적은 수의 병력으로 적의 대군을 맞아 힘껏 싸웠으나 결국 모두 전사하였다. 조선 정부는 모든 왕을 호위할 무사를 포함한 모든 중앙군을 신립에게 보내 충주에서 방어선을 치고 왜군의 북상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선조는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의주로 피란하여 전쟁을 지휘하였다. 왜군은 한반도 전역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였고, 평양까지 진출하였다.
 
조선군 및 의병의 반격

왜란이 발생한지 2개월이 경과하자 조선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각지에서 왜군에 반격을 가하였다. 왜군의 침략을 먼저 받은 경상도에서 유승인, 김시민, 곽재우 부대가 낙동강 서쪽으로 진출하는 왜군을 차단했고,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왜군을 권율 부대가 웅치와 이치에서 막아 싸우고 고경명 부대가 왜군의 거점을 공격함으로써 막았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 이어서 거북선을 앞세워 사천, 당포, 한산도 앞 바다 등 여러 곳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은 수군의 활약으로 제해권을 장악하고, 육군과 의병은 부산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왜군의 전투력을 약화시켰다. 또한 전국적으로 군대가 재정비되고 전직 관료를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나 왜군을 공격했다. 의병은 경상도에서 곽재우가 처음 일으킨 후 고경명, 조헌, 김천일, 최경회, 임계영, 김면, 정인홍, 정문부, 유정(사명대사) 등이 여러 지방에서 왜군과 싸웠다.
 
왜란의 극복

김시민이 이끄는 관군이 8배가 넘는 왜군을 진주성에서 격파한 것(진주대첩)을 계기로 전투를 조선군이 주도했고, 보급로가 차단된 왜군은 후퇴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명의 원군이 도착하여 평양성을 수복하면서 왜군은 빠르게 한양으로까지 후퇴하였다. 명군이 벽제관에서 왜군에게 패하면서 전의를 상실하였지만,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큰 승리를 거두는 등 각종 전투에서 조선군이 왜군을 격퇴하니 왜군은 경상도 해안지역으로 후퇴하였다.

왜군을 무력으로 진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안 명군은 화의를 통해 왜군을 물러나게 할 방안을 찾았다. 또한 조선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전투력을 잃은 왜군 역시 휴전을 원하는 명군과 회의를 진행시켰다. 명군과 왜군 간에 화의 협상과정에서 양 군대는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면서 임진왜란을 끝냈다.

그러나 명군과 왜군의 화의 교섭이 거짓으로 들어나자, 왜군은 다시 공격해왔다(정유재란, 1597).

임진년과 달리 이번에는 조선도 군비를 갖추고 명군과 협조하여 왜군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또 물러났던 이순신이 다시 기용되어 명량에서 왜군을 대파하였다.
마침 도요토미가 사망하고 전세도 불리해지자 왜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 때 이순신은 퇴각하는 왜군을 노량에서 격멸하였으나, 적의 유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로써 7년에 걸친 전쟁은 끝이 났다
 
왜란의 결과

7년간의 전쟁 결과 조선은 왜군의 침략 목적을 분쇄하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렇지만 이 전쟁으로 조선은 큰 피해를 보았다.

전 국토가 황폐하여 경작지가 전쟁 전에 비해 3분의 1 이하로 줄고, 인구도 크게 줄었다. 전쟁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왜군에 의해 학살당하고 일본으로 끌려갔으며, 일부는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유럽 등지에 노예로 팔려가기도 하였다. 또, 전쟁 중에 노비 문서가 불태워지고 양반의 위신이 떨어져 신분제가 흔들리게 되었다. 문화재의 소실도 매우 커서 불국사, 사고 등이 왜군에 의해 불에 타 버렸고, 활자, 서적, 도자기, 그림 등 많은 문화재를 왜군이 약탈해갔다.

임진왜란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일본 역시 전쟁에 참전한 수많은 왜군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어 도요토미 일가의 세력이 약화되어 결국 정권이 바뀌었고, 명도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져 결국 만주의 여진족에게 중국의 지배권을 내주게 되었다.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주요이력: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중앙대 행정대학원장.[편집자 주]
 


푸른한국닷컴, BLUKOREADOT

박희봉  hbpark@cau.ac.kr

<저작권자 © 푸른한국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희봉의 다른기사 보기
icon최근 이슈기사
김선호,“술과 클럽 좋아하고 여성 편력도 매우 심했다”는 또 다른 폭로글 논란 일어김선호,“술과 클럽 좋아하고 여성 편력도 매우 심했다”는 또 다른 폭로글 논란 일어
전두환 전 대통령 동생 전경환 별세전두환 전 대통령 동생 전경환 별세
코로나19 발생현황,신규 1,440명·비수도권 하향세 지속코로나19 발생현황,신규 1,440명·비수도권 하향세 지속
이재명 의혹, 문재인 정부가 저지른 실책이재명 의혹, 문재인 정부가 저지른 실책
icon가장 많이 본 기사
기사 댓글 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성북구 동소문동 2가 247 3층  |  TEL : 02-734-4530(代)  |  FAX : 02-734-8530  |  긴급연락처: 010-2755-6850
제호 : 푸른한국닷컴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아 01298  |  창간일 : 2010. 07. 20  |  발행·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전영준  |  마케팅이사 : 김혁(010-3928-6913)
Copyright © 2010-2021 푸른한국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ugsum@nate.com.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