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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18. 제4기(1593. 6. - 1596.) : 제2차 진주성전투와 임진왜란의 종료①
박희봉 | 승인 2021.07.06 23:43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략 수정
 
[박희봉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임진왜란 초반 각종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며 한양성과 평양성을 점령할 때가지만 해도 일본군이 조선 8도를 점령하고, 전쟁참여자들에게 영지를 나누어주겠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언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일본군은 낯선 땅에 들어와 언제 공격받을지 모르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전쟁이 시작된 지 6개월이 지나면서 식량부족과 추위로 많은 병사가 죽어갔다.

부산에서 한양성, 그리고 각 지역으로 이어지는 보급로가 끊어져 일본에서 오는 병량의 전달이 원활하지 못했고, 조선군의 지속적인 일본군 성채에 대한 공격으로 현지에서의 식량 확보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특히 따뜻한 남쪽에 살고 있던 일본군이 전쟁의 조기종결을 예상하고 전혀 추위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던 것은 당시 일본군이 참혹상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한양성에서 일본군의 사정을 취합한 이시다 미쓰나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첫째, 한양성 이북의 일본군 철수 경위이다.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평양에서 철수하게 되면서 황해도 배천의 구로다 나가마사, 경기도 개성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 임진강 이북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한양성으로 철수했다. 이것은 무기와 군량이 부족하고 임진강 빙판이 풀리면서 한양성으로부터 무기와 군량을 운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조선 측의 반격이다. 한양성과 부산 사이에 있는 일본군 주둔성들은 2만-3만 정도의 조선군에게 포위되어 서로 연락조차 할 수 없었다.

셋째, 일본군의 군량부족이다. 전년도에 일본군은 조선의 농민들을 인질로 삼아 군량미를 징수했지만 최근은 군량미를 얻지 못하게 되었다. 한양성에 비축한 군량미는 1만 4천 석 밖에 안 되고, 그것은 현 병력이 3월 중순까지 버틸 2개월분이다. 또 중소 주둔성들의 군량미도 2개월 분 밖에 안 되므로, 충청도와 전라도 평정을 서둘러야 한다는 내용이다. (문록 2년 1월 23일 長束正家·山中橘內·木下半介·增田長盛·대곡길계·石田三成·加藤光泰·前野長康 연서 주진장 金井文書)
 
이상의 기록으로 1593년 초 조선 내 전쟁현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조선군이 조선 전지역에서 일본군을 공격함으로써 일본군의 사상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이로써 일본군이 전투력 유지가 어려웠다. 임진왜란 개전 이후 일본군의 참전병력을 약 22만명으로 한정한다면 그 45%인 9만 8,000명이 사망했고, 28만 6000명을 넘는다고 했을 때 57%가 넘는 16만 5,000명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둘째, 일본군의 보급로가 끊겼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과 해전을 벌이기만 하면 모든 전함이 수장되었기 때문에 조선 수군을 눈을 피해서만이 일본을 오갈 수 있었고, 만일 부산까지 보급품을 실어 나른다고 해도 육로를 통해 부산에서 한양까지 보급품을 전달하기 어려웠다.

셋째, 일본군의 무기와 식량, 의복이 바닥났다. 1년이 넘는 전투를 통해 일본에서 가지고 온 물품은 바닥이 났고, 조선에서의 보급품 현지조달이 불가능했다.

넷째, 한양성 이북의 일본군은 이미 한양성으로 퇴각한 상태였으며, 한양성에서도 더 이상 버틸 처지가 아니었다.

이에 따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의 조선 전지역에 대한 점령을 이미 불가능한 것으로 결론지었고, 조선 남부지역만이라도 점령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략을 세웠다.

이를 위해 그는 한편으로는 명군과 강화를 협의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병력을 경상도 남부지역으로 모아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그리고 그는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에게 총대장이 되어 병력을 재편성하고 삼남지역의 거점인 진주성을 공격하며 전라도와 경상도를 제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기타지마 139)
 
명군과 일본군의 강화협의의 내면
 
1593년 4월 8일 조선 조정의 의사는 배제된 채, 명나라 대표 심유경과 일본 대표인 고니시 유키나가 간에 강화회담이 타결됐다. 그러나 강화에 대한 양측의 속내는 서로 다른 것이 더 많았다. 특히 강화협상을 실질적으로 추인하는 명나라 황제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속뜻은 전혀 달랐다. 심지어 명나라 황제와 조선땅에서 일본군을 마주 대하고 있는 명군 수장의 뜻이 달랐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뜻이 서로 달랐다.

우선 국왕 선조는 강화를 끝까지 반대했다. 선조는 일본군을 무력으로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명군의 지휘권 밖에 있는 조선군과 백성들은 국왕의 뜻에 따라 지속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했다. 반면, 명군은 조선으로 진군하면서부터 조선군에 대한 지휘권 행사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전투에 참여한 명군은 국왕 선조의 의견도 무시하였고, 조선군을 명군에 복속시켰다.

명군과 일본군이 강화에 나선 것은 양측 모두 소모적인 전투를 빨리 끝내고 싶기 때문이었다. 명군의 입장에서는 평양성전투 결과로 일본군을 압도할 줄 알았지만, 벽제관전투 결과 일본군을 쉽게 물리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력에 의해 일본군을 제압할 수 없다면 강화를 하여 명군의 희생을 최소화함과 동시에 명군이 조선에서 전쟁을 종식하였다는 명분이 필요했다.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조선군의 지속적인 공격에 의해 사망자가 속출하는 한편, 일본으로부터의 보급이 끊겨 전투를 계속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명군과 실질적인 강화를 맺는 과정에서 명군과는 전투를 중단하고, 조선남부를 점령하여 실리를 챙기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한편, 명나라 경략 송응창은 ① 일본군의 조선 국토에서의 완전 철수, ② 가토 기요마사에게 붙잡힌 조선 왕자의 송환, ③ 조선침략에 대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 황제에게 사죄를 구하고, 명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하는 계획을 명 황제에게 건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계획은 일본군과 미리 강화조건을 협의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 황제가 재가할 수 있는 것을 자신의 임의대로 설정한 것이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서의 전투상황을 엄밀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하였다. 당시 정황으로 볼 때, 일본군 지휘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진주대첩에서 패배하여 경상우도와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하고 육로를 통한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조선 수군이 강하기 때문에 해전에서 패배하였으며, 명군의 개입에 의해 한양성으로까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는 정도의 정보만을 보고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조선 전역에서 조선군과 조선백성의 항전에 의해 전쟁을 치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조선에 있는 일본군 지휘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당연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지도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있는 일본군 지휘부에 보낸 명령서에서 강화조건으로 ① 명 황제의 공주를 일본 천황의 왕비로 삼게 할 것, ② 무역에 관한 사항을 서로 합의할 것, ③ 명과 일본은 군사에 관한 서약을 주고받을 것, ④ 조선의 반발과 상관없이 이미 군사를 보내 평정한 한양성과 한양성 이남의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⑤ 조선의 왕자 2명과 시종들은 인도, ⑥ 조선 조정 중신들은 약속을 지킨다는 각서를 작성할 것 (黑田家譜 朝鮮陣記) (기타지마 154) 등을 하달하였다.

한 마디로 조선에서의 전투상황을 전혀 모르는 채 자신이 바라는 바를 조선에 있는 일본 지휘부에 전달했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남부의 4도를 점령하였음을 공식화하기 위해 그가 조선 남부의 군사요충지로 생각하는 진주성1)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2)

이렇게 조선 조정과 조선군, 명나라 조정과 명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일본군의 입장이 달랐다. 그 가운데 명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는 종식되었고, 명군의 지휘를 받는 조선관군도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멈추었다. 단, 명군의 지휘권밖에 있던 지역 조선군과 의병, 백성들은 선조의 명에 따라 지속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은 일본군은 명군과의 강화와 별도로 한양성 이남을 실질적으로 점령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감행했다.
 
제2차 진주성전투의 배경
 
2차 진주성전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임진왜란 이전에 목표로 한 조선 점령 이후 명나라까지 점령이 현실적으로 실패하자 전쟁의 명분을 찾기 위해 조선 남부를 차지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그는 경기도지역으로부터 부산지역으로 철수 중인 일본군에게 1593년 2월 27일부터 5월 20일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진주성 공격과 전라도 공격을 명령했다. 그는 5월 1일 후퇴하는 일본군에게 보낸 명령서 15개조 중 7조에서 진주성을 공격하고, 진주성 함락 시 성안의 조선인을 남김없이 베어 죽일 것, 8조에서 진주성을 함락한 후에는 전라도를 공략할 것, 9조에서 전라도를 공략한 후 성을 쌓아 주둔할 것 등 구체적인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3)

명군과의 강화조건과 진주성 공격명령이 담겨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서는 그의 전략적 사고를 명확하게 알려준다.
 
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첫째, 명군과의 강화는 하되 조선 남부는 실질적으로 점령하겠다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군 지휘관들이 실질적인 전투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자국 군대의 희생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의중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벽제관전투 이후 명군은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꺼렸고, 2차 진주성전투 이전까지 명군은 일본군과 거의 전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강화로 인해 명군뿐만 아니라 명군의 지휘를 받는 조선관군의 발을 묶어둘 필요가 있다. 사망자가 속출하여 전투력을 상실한 일본군의 전투력을 집중하기 위해 필요했던 조치이다. 이를 위해 일본군은 함경도에서 포로가 된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를 송환하였다.

둘째, 명군과 조선관군 주력이 전투에 나서지 않는다면 지역 관군과 의병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고, 그렇다면 당시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만으로도 진주성을 쉽게 함락하고 그 기세로 전라도와 충청도까지 진출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진주성을 공략해야 하는 이유는 진주대첩에서 일본군에게 많은 희생과 패배를 안겨준 김시민이 지키고 있는 진주성을 점령하지 않고는 조선 남부를 경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진주대첩의 패배를 남겨둔다면 일본군의 사기를 끌어올릴 수 없기도 하다.

지속적인 전투로 일본군의 전투력이 많이 상실되었지만, 진주대첩 시 공격한 일본군의 3배가 넘는 일본군 전병력을 투입한다면 난공불락의 진주성도 쉽게 함락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공략하기 위한 최선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 일본군이 진주성으로 진격할 때 진주성을 비워줄 것을 미리 명군에 통지했다.

이것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심유경에게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전년에 진주에서 패하였으므로 여러 장수가 모든 힘을 다하여 그 성을 쳐서 무찌르라고 하는 것을 내가 말리었으나 가토 기요마사가 듣지 않으니 일본의 군사가 반드시 진주로 행할 것인 즉, 성을 비우고 나와 싸우지 말고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좋을 것이요”하였다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심유경은 조선 장수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고, 이로 인해 진주성 수성을 위해 출진한 선거이가 관군을 이끌고 진주성 밖으로 나오기도 했다. 명군의 입장에서는 진주성의 전략적 가치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하루 빨리 종전되기만을 원했기 때문이다.

셋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을 독려하기 위해 일본군에게 진주성 함락 이후 차지한 전라도 땅을 영지로 주겠다는 공언을 했다. 그는 진주성을 함락한 이후 진주성을 완전히 파괴하고 진주성에 있던 조선인을 모두 살해할 것, 진주성 함락 이후 전라도로 진출할 것, 전라도에 진출한 후 성을 만들고 군사의 다소에 따라 성을 각자 소유할 것 등을 지시했다.

이것은 진주성 함락 이후 진주성이 복원되지 못하도록 해 근심의 뿌리를 잘라내고, 일본군의 잔인성을 조선백성에게 심어줌으로써 조선백성으로 하여금 항전의지를 상실하게 하며, 일본군에게는 영지를 붐으로써 경상도와 전라도를 실질적으로 경영하려는 도요토미의 전략적 사고를 보여준다.

1)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롯한 일본군은 진주대첩에서 패배한 이후 진주성목사인 김시민을 조선 최고의 장수로 생각하고, 진주성을 조선 남부의 최대 군사요충지로 생각하였다. 그들을 진주성을 목사성 또는 목사나라라고 불렀다. 또한 그들은 진주대첩에서 전사한 김시민목사가 살아서 진주성을 지키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2) 參謀本部編, 1924, 󰡔日本戰史 朝鮮役󰡕, 附記, 村田書店, pp.94~95.
3)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지시 3(1593년 5월 1일자)- 목사성(진주성) 공략은 흙주머니(土囊)와 죽창을 만들도록 명하고, 부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전투에 임할 것이며, 한명도 빠짐없이 토벌할 것. 그렇게 한 뒤에 전라도(赤國)에 출진하여 승리하도록 할 것. 전라도로 출진해서 완전히 토벌한 후, 앞에서 말한 성들을 견고하게 만들고, 군사의 다소에 따라 성의 크기를 결정하고, 장소도 검토하여 각자 소유할 것(參謀本部 編纂, 󰡔日本戰史 朝鮮役󰡕, 1924, pp.133~135).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주요이력: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중앙대 행정대학원장.[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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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  hbpark@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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