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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12. 제2기(1592. 6. - 1592. 10.) 조선군의 반격④일본군의 조선 8도 점령 계획
박희봉 | 승인 2019.10.11 21:21
박희봉 교수
해전

[박희봉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육지에서와 달리 일본 수군의 연패 소식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다를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생각해 수군까지도 지역전투에 참여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규모 해전을 준비시켰다. 6월 28일 조선 수군과의 일전을 위해 일본 수군의 각 부대도 합류하였다. 일본수군의 해상활동이 활발해졌고, 그에 대한 첩보가 조선수군에 수집되었다.

조선수군이 3차 출동을 하였다. 7월 4일 전라우수영 이억기 함대와 여수 전라좌수영에서 만나 작전협의를 마치고 6일에 여수를 출항하여 노량진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7일 조선수군은 고성의 당포로 이동했는데, 일본 선박 70여 척이 견내량에 머물러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본수군도 이날은 조선수군과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선수군은 전라좌수영 24척, 우수영 25척, 경상우수영 7척으로 판옥선 56척, 거북선 3척 출동이 출동했다. 이에 맛선 와키사카 야스하루가 지휘하는 일본군 함대는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모두 73척이었다.

7월 8일 역사적인 한산대첩은 견내량에서 시작됐다. 견내량은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폭 300m∼400m, 길이 약 4km 정도로 함포사격에 의해 해전을 치르기는 좁았다. 이순신은 판옥선 5척으로 일본 적후선을 쫓아 견내량으로 들어가 적 함대를 유인하였다. 일본 함대가 출동하자 이순신은 배를 후퇴시켰고, 일본 선박은 빠른 속도로 추격했다. 결국 조선수군과 일본수군은 견내량을 입구 넓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마주쳤다.

일본 함대는 육지에서의 전투대형과 같이 열을 맞추어 종대로 밀집하여 공격해 들어왔고, 조선 함대는 학이 날개를 펴듯 횡대로 전투대형을 전개시켰다. 학익진이다. 한산도 앞 넓은 바다에서 열과 오를 맞추어 밀집대형으로 공격해오는 일본 함대에 대해 넓게 포위한 조선 함대는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을 발포하였다.

밀집대형으로 공격해오던 일본 함대는 조선 함대의 함포사격을 받고 오와 열이 흩어졌고, 포위망을 좁혀오면서 거북선을 필두로 돌격해 들어가는 조선 함대에 의해 궤멸되었다. 한산대첩에서 일본군 전선은 59척이 격파되거나 조선 수군에 나포되었고, 도주한 일본 선박은 14척이었다. 일본군 선박 1척에 평균 100명이 승선했다고 계산하면 6,000명 정도가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반해, 조선 수군의 함대는 단 1척의 손상도 없었고, 다음에 있을 안골포해전까지 포함하여 조선 수군은 전사 19명, 부상 119명에 그쳤다.

일본군은 전시상황을 빠르게 인식하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주변에서 발 빠르게 응원군을 보내던 일본군이 한산대첩이 있은 후에는 응원군을 보내 전투를 치르지 않고, 오히려 조선 수군을 피해 다녔다. 7월 8일 견내량에서 밤을 보낸 조선 함대는 9일 부산 앞바다에 있는 가덕도까지 진출하였고, 일본군 선박 40척이 안골포에 있음을 알았다.
 
학익진.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학익진.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7월 10일, 조선 함대는 둘로 나뉘었다. 전라우수영 이억기 함대는 가덕도 주변에 배치하고, 전라좌수영 이순신 함대를 필두로 경상우수영 원균함대가 안골포로 향했다. 안골포에는 일본군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 등 42척이 선창 깊숙이 정박해 있었다. 안골포는 수심이 얕고 물길이 좁아 조선의 판옥선이 진입하기 어려웠다. 일본 수군은 조선 함대를 피해 대피한 것이다. 이억기 함대까지 합류한 조선 수군은 교대로 포격을 가한 끝에 일본군 선박 20척을 부셨다. 날이 어두워져 함대를 물려 넓은 바다에서 밤을 보낸 후 11일 새벽 다시 공격해 들어갔으나 일본 함대는 어둠을 틈타 모두 도주하였다.

안골포해전이 있은 후 전체 조선 바다는 조선수군이 장악한다. 부산에서 진해까지 육지는 일본군이 장악했지만 조선 수군이 부산 앞바다까지 진출하여 육지를 향해 차례로 함포사격을 가하는 등의 무력시위를 했다. 조선 연합함대는 7월 12일 한산도로 이동하여 하루를 쉬고, 13일 각자의 수영으로 개선했다. 7월 6일부터 13일까지 7일 동안 한산대첩과 안골포해전에서 조선 함대는 일본군 전선 79척을 격파하고, 7,000명의 일본군을 수장시켰다. 이순신은 이에 대한 공로로 8월 1일 3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 시기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전투력이 강하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 장수들에게 해전을 중지하고 거제도에 성을 쌓아 조선 수군의 공격에 대해 방어할 것, 지시가 있기까지 조선 수군과 전투하지 말며 상대가 접근해 오더라도 뒤쫓아 가지 말 것 등을 지시하였다1). 자신의 군대의 강점을 극대화시키고, 약점을 최소화시키며, 상대방의 강점을 피하고 약점을 공격하는 일본군의 치밀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 함대의 3차 출동 이후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보기만 하면 달아났고, 내륙 깊은 곳으로 피신하여 선박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노력했다.

3차 출동 이후 조선 수군은 꾸준히 전투력을 보강했다. 전함과 화포를 보강하고 군사들을 꾸준히 보강했다. 조선 수군 4차 출동에 전라좌·우수영 판옥선 74척, 경상우수영 판옥선 7척으로 판옥선이 모두 81척이었다. 판옥선 25척이 새로 증강된 것이다. 협선은 전라수영 92척, 경상수영 7척으로 99척이었다. 조선 수군의 규모는 14,000명에 이른다. 부산 앞바다로 4차 출동을 하기 전 이순신은 전라우수영 이억기 함대를 여수로 불러 8월 1일부터 23일까지 합동훈련을 반복했다.

이순신 함대는 8월 24일 여수를 출발하여, 25일 통영에서 원균의 경상도 함대와 합류하였다. 조선 함대는 26일 견내량을 통과하였고, 27일 창원에서 보냈다. 28일 가덕도 장항포에서 척후선을 보내 일본군의 동태를 살폈고, 29일 낙동강 하구쪽에 있는 장림포(부산 사하구)에서 일본군 대선 4척, 소선 2척을 격파했다. 9월 1일 아침 8시경 몰운대 앞에서 일본군 대선 5척, 다대포 앞에서 대선 8척, 서평포 앞에서 대선 9척, 송포 앞에서 대선 2척 모두 24척의 일본 수군 전선을 차례로 격파하였다.

9월 1일 조선 척후선으로부터 일본 함대 470여 척이 부산진성 동쪽 3곳에 집결해 있음을 알려왔다. 부산 앞바다에서 달려드는 일본군 대선 4척을 격파하고, 부산진성 앞바다에 포진해 있는 일본군 선단을 공격하였다. 조선 함대는 오후 4시부터 3시간 동안 일본 수군과 전투한 결과 대선 34척을 격파하였고, 정박해 있던 일본 선박을 함포사격에 의해 파괴했다. 8월 24일부터 9월 2일까지 8일간 파괴된 일본 선박은 약 100척에 달했으며, 일본 수군 약 3,000명이 수장됐다. 조선 함대의 4차 출동에서 조선 수군은 선박의 손실은 없었고, 사상자는 정운장군을 포함 31명이었다.
 
조선군의 공격
 
1592년 6월 일본군이 조선의 중앙군을 격파하면서 평양성을 함락한 후 일본군이 조선 8도로 나뉘어 조선 전체를 점령하려고 하던 시기, 각 지역별로 분산된 중·소규모의 일본군은 조선의 각 지역의 고을에 있는 조선군과 의병군과 새로운 전투를 맞게 된다. 2만명 단위의 군단급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이 1천명∼2천명 단위로 분산되자 조선군은 지역사정과 지형지물의 이점을 이용하여 일본군에 대해 역습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번대와 함께 조선에 와서 각종 전투를 참관한 포르투갈인 프로이스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 수군 3차 출정(한산대첩,안골포해전)출전로.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일본군은 부산성에서 한양성까지의 진로에 12km에서 16km까지의 거리마다 성을 축조하고 병력을 주둔시켰다. 이 진로에 축조한 성은 18개에 이른다. 이런 식으로 하루거리 마다 성을 축조했다. 그런데 이외 지역은 모두 조선인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이들은 여러 지역을 몰려다니며 일본군을 공격하며 노략질을 했다. 그래서 부산포에서 한성까지의 여정에는 최하 300명 이상의 병력으로 이동해야만 했고, 한양에서 평양까지는 최하 500명 이상의 병력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프로이스의 기록은 유성룡의 <징비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왜군이 부산에서 한양까지 10리(4km)에서 30리(12km)마다 군영(요새)을 만들어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각 군영의 왜군은 많아야 1천명이고 적으면 수백 명이다. 각 군영은 개미처럼 서로 왕래하고 있었다.
 
프로이스의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전황이 급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조선군이 처음에는 일본군을 아주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으나 복종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매우 격렬하게 저항했다고 한다. 이것은 전쟁 초기 전투경험이 없었던 조선백성들이 산속으로 피난을 갔지만, 전쟁이 지속되고 일본군이 물러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적극적으로 일본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전쟁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일본군에게는 해결해야 할 큰 문제와 어려움이 발생했다.

첫째, 일본군은 서로 먼 지역을 분산 배치해 있었기 때문에 수로를 통해 일본에서 수송되는 식량을 보급 받으려면 많은 병사를 동원해 군수품과 식량을 가지러 가야만 했다. 그런데 조선군과 각지에서 전투를 치러야 했기 때문에 보급품을 수송하는데 군대를 많이 동원하기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긴 보급로에서 자국의 지리를 매우 잘 알고 있는 조선 병사들이 여러 지역에 매복해 있다가 습격해 이들 일본군을 죽이고 군수품을 탈취하였다. 일본군은 조선 전역에서 식량을 자체 보급받기 위해서는 소규모의 군대를 분산 배치해야 했고, 이들도 조선군과의 전투를 치러야 했고, 식량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둘째, 조선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패함에 따라 수로를 통한 보급에 차질이 발생했다. 일본 수군은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에 있는 조선 수군의 자멸에 의해 남해안을 따라 약탈이 용이했지만, 전라좌·우수영의 조선 수군의 등장으로 인해 재해권을 뺏김으로써 해안 고을의 약탈이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일본으로부터의 보급품마저도 차단당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낯선 조선 땅에서 한편으로는 지역사정에 밝은 조선군의 매복과 습격 등 공세에 시달려야 했고, 보급품과 식량 부족으로 많은 병사가 병들어 죽어갔다. 따라서 7월 말 조선 봉행으로 한양에 도착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이 8월에 한양에서 일본군 주요 지휘관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조승훈의 명군을 평양성전투에서 물리쳐 사기가 올라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반대로 일본군의 발 빠른 철수가 단행되지는 않았지만,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진영에서 전쟁수행이 그들의 의도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위기감이 돌고 있었다.

1) 히데요시는 와키사카나 가토 등에게 해전을 중지하고 거제도에 성을 쌓고, 해안선을 따라 조선 수군과 싸울 것, 부산포에서 경상남도 해안에 결쳐 보급로를 유지할 것, 히데요시의 지시가 있기까지 조선 수군과 전투하지 말며 상대가 접근해 오더라도 뒤쫓아 가지 말 것, 수군은 휴식을 취할 것 등을 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92년 7월 14일 협판안치 등 일본수군 장수 기록. 전 풍신수길 주인장 협판문서) (기타지마 115)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도도 다카도라(蕂堂高虎)에게 1592년 7월 16일 보낸 서신에 따르면 도요토미 히데카츠를 대장으로 하여 거제도 성을 튼튼히 방어하고, 구키 요시타카, 와키사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티, 스가다이라 우에몬, 기이국(紀伊國)사람들 등의 선박을 차례로 배치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할 것, 적선(판옥선)보다 큰 선박을 만들 것, 또한 배 둘레도 튼튼히 방비할 것, (일본에서 보낸) 대포 3백 정을 대선에 골고루 배치할 것과 화약도 동일하게 준비할 것 등을 지시했다.
 
본 매체는 박희봉 교수의 저서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를 발췌 1주일에 두 번 연재하고 있습니다.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는 국가통합을 위한 사회자본의 역사적 상징 모델을 진주성전투에서 찾던 중 발견한 임진왜란 전사의 왜곡과 역사의 진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 박희봉 교수: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중앙대 행정대학원장.
 
 
 

푸른한국닷컴, BLUKOREADOT

박희봉  hbpark@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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