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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10. 제2기(1592. 6. - 1592. 10.) 조선군의 반격②일본군의 조선 8도 점령 계획
박희봉 | 승인 2019.09.20 23:24

평안도 전투

[박희봉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박희봉 교수
6월 15일 평양성 함락 이후 일본군은 평양성 이북으로 북상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종목표는 명나라 점령이었다. 조선과 전쟁을 한 것은 명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군대와 병참의 보급로를 확보하는 위한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에 이르러 조선 조정에 글을 보내어 “일본군 10만명이 또 서해로 올 것이니 대왕의 행차가 여기서 어디로 가시렵니까?”라고 한 것에 잘 나타나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는 평양성에서 나고야의 예비대가 남해와 서해를 통해 평양에 도착하고, 조선전역에 파견된 일본군 각 부대가 담당지역에서 징발한 군대와 병량이 모이기를 기다린 것이다. 평양을 점령한 이후 1차 평양성전투에 함께 참여한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이 담당지역인 황해도로 철수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둘째, 조선군 및 백성의 끊임없는 항전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만으로는 더 이상 진격할 힘이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니시 유키나가도 평안도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소규모 부대를 평양 인근 지역에 보냈을 때 평안도에 있는 조선관군과 의병에게 역습을 당해 살아 돌아온 자가 별로 없었다. 실제로 평안도에는 조선관군과 의병이 상당한 기세를 떨쳤다. 대표적인 의병으로는 강동에서 귀양살이 하다가 소모관에 제수 받은 조호익, 중화의 김진수와 임중량, 평양의 양덕록, 양의직, 이덕암 등이 의병을 일으켜 평양성 밖으로 진출을 노리던 일본군을 토벌하였다. 또한 휴정이 묘향산에서 승병을 일으켜 평양성 수복을 도모하였다.

셋째, 이 무렵부터 이미 일본군은 병참보급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을 위시한 조선 수군이 일본의 뱃길을 차단하여 남해와 서해를 이용한 병력과 무기, 식량을 차단하였고, 육로를 통한 먼 보급로도 원활하지 못했다. 또한 임진왜란 발발 1개월 후부터 조직화된 경상도 조선군과 의병이 부산에서 한양을 잇는 보급로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평양성에 주둔한 일본군이 굶주림을 당하고, 탄약이 떨어져 전투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의주에 피난해 있던 국왕 선조는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원군을 요청하였다. 명나라 황제는 요동 부총병 조승훈에게 3,000명의 군사로 원군을 파견하였다. 당시 평양성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번대 병력 18,700명과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번대 일부 병력 5,000명이 있는데, 이 시기에 구로다 나가마사의 병력이 황해도로 철수하였다. 이를 본 척후장 순안군수 황원이 적의 주력이 빠져 나가는 것으로 보고했고, 7월 17일 승군 600명 포함한 조선군 3,000명과 명군 3,000명, 도합 6,000명으로 평양성을 공격했다. 제2차 평양성전투이다.

평양성의 문이 열려 있고 일본군들이 보이지 않자 명군의 선봉장 사유는 병력을 모두 평양성 안으로 진격시켰고, 길 양편이 매복하여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의 조총 사격으로 사유와 부장 천총, 장국총 등이 전사하였다. 조선군과 명군은 전열을 잃고 우왕좌왕 하다가 크게 패했다. 총병 조승훈은 부상을 입고 수십 기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요동으로 돌아갔다.

제2차 평양성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의 패전 이후 평안도 의병이 나서서 일본군과 싸웠다. 중화군의 임중량, 윤봉, 차은진과 차은로 형제가 의병을 결성하여 일본군과 맞섰다. 일본군이 중화의병군을 먼저 공격하여 의병 대부분이 전사하였다.

8월 1일, 제3차 평양성전투가 이어진다. 조방장 김응서, 별장 박명현 등이 용강, 증사, 강서 등 바닷가 여러 고을에서 군사 만여 명을 모아 왔고, 별장 김억추는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 입구를 점거하는 등 평안도를 위주로 조선 각지에서 군사들이 모였다. 평양성의 일본군 병력의 세력이 약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 조선 조정은 2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려고 하였다. 순변사 이일이 5천명의 병력으로 동쪽에서, 조방장 김응서가 1만명의 군사로 서쪽에서, 순찰사 이원익이 5천명의 병사로 북쪽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평양성 보통문 밖에 조선군이 이르자 일본군 50명이 공격을 해왔고, 이에 조선군도 활을 쏘아 20명을 사살했다. 사기가 오른 조선군은 성문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고, 이때 성안에 있던 일본군 수천 명이 나타나 공격하면서 조선군이 둘로 갈라져 전열을 잃었다. 훈련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조선 군사들이 흩어졌다.

평양성에서 주둔하면서 계속 전투에서 승리한 고니시 유키나가도 8월 초 한양성에서 열린 일본군 주요 지휘관회의에 참석한 이후에 임진왜란 이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계획한 조선 점령이 성공하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에서 파견한 심유경과 회담에 응했다. 9월 1일 고니시 유키나가와 심유경 간의 회담이 평양성의 북편에 있는 강복산에서 열렸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에 대한 봉공과 대동강 이남의 조선 영역을 일본에 할양하라고 요구했다. 심유경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요구한 명나라에 대한 봉공이 명나라 황제에게 허가를 얻기 위해 50일이 필요하다고 하여,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정전협정은 50일 동안 평양성 서북쪽 10리 외곽에 금표를 세워 조선군과 일본군 모두 금표를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정전협정은 양측 모두의 이해관계에 맞아 떨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명나라 측에서는 명나라 군대를 파병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번 것이고, 일본군 측에서는 지속적인 전투로 인한 병사의 휴식과 후방 보급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정전협정을 반대한 조선 조정에게는 심유경이 명나라가 70만 대군을 파병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거짓 보고함으로써 동의를 구했다.
 
함경도 전투
 
함경도 점령을 맡은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던 일본군 제2번대 22,800명은 황해도 금천, 평산을 거쳐 안성에 이르러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번대와 헤어져 함경도로 향했다. 함경도감사 유영립은 남병사 이혼에게 군사 1천명을 주어 철령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군세에 놀란 조선군이 흩어지는 바람에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이혼도 현장을 이탈했고, 이 소식을 들은 함경도 수령들도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남도 안변을 자신의 본영으로 삼았고, 함흥을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본영으로 삼아 함경남도의 덕원, 문천, 영흥, 홍원 6개 지역을 통솔하게 하였다. 7월 중순 함경북도 성진 해정창에서 함경북도 병마사 한극성의 6진 군대를 패퇴시키고, 한극함마저 경성에서 생포했다. 회령으로 향하여 반역한 회령부 아전 국경인의 도움으로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는 등 가토 기요마사의 제3군은 함경도 전역을 점령하였다.

함경도에서 일본군에 대항하는 세력이 결집되기 시작한 것은 1592년 9월 중순이다. 9월 16일 합경북도 평사로 있던 정문부는 이봉수, 최배천, 지달원, 강문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정문부가 주장이 되고 종성부사 정현룡, 경원부사 오응태를 차장으로 삼아 백여 명의 군사를 모집했다. 정문부가 함경도 각 고을과 진보에 격서를 전하여 군사 3천여 명을 모았다. 길주의 허진, 김국신, 허대성도 군사를 모아서 정문부 부대에 합류하였다.

정문부 부대는 먼저 군사 300명을 이끌고 국세필 반란군이 있는 경성으로 갔다. 정문부는 강문우에게 기병을 주어 경성과 길주 간의 소통을 끊었다. 정문부는 국세필의 권한을 인정하고 회유하여 경성에 입성한 후 의병을 훈련시켰다. 길주에서 온 일본군 순찰병 40명은 강문우의 기병이 전멸시켰다. 또한 경성과의 연락이 끊긴 것을 눈치 챈 길주의 일본군 92명이 경성으로 왔으나 국세필과 정문부 부대가 이들을 공격해 물리쳤고, 도망가던 일본군은 강문우의 기병대에 의해 모두 사살됐다. 이로써 경성이 조선군 수중에 들어왔다.

1592년 10월 정문부는 반란자 정말수 일당을 토벌하기 위해 명천으로 갔다. 회령에서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은 신세준에 의해 이미 살해당했고, 정말수는 국경인의 잔당세력을 이끌고 자신을 몰아내려는 농민봉기를 화포를 동원해 제압하고 회령을 점거하고 있었다. 정문부는 60명의 기병대로 명천을 습격하였고, 정말수는 기습공격을 받고는 산에 숨어 있다가 붙잡혀 처형당했다. 이후 정문부는 경성을 지배하던 국세필 일당을 처형하여 함경북도의 반란군을 모두 진압하는 동시에 일본군 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산으로 피신했던 조선백성들이 돌아왔고, 정문부는 이들로부터 3,000여 명의 군사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정문부는 조직화된 군대를 이끌고 석성령전투와 길주전투 등을 비롯한 북관대첩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이외에도 함경도에서는 김응부, 유응수, 이유일, 박중립, 정해택 등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대치했다.
 
황해도 전투
 
임진강전투에서 패전한 이후 황해도로 진군하는 일본군을 방어하는 조선군이 없었다. 황해도 내 여러 고을은 불태워지고 노략당할 때 이조참의를 지낸 황해도 초토사 이정암이 흩어진 장수와 병사를 거두어 연안성을 지킬 계획을 세우고 군대를 편성했으며, 인근에 있는 곡식을 실어 들여 병량을 준비하였다. 9월에 일본군 3천 명이 연안성을 공격하였으나, 이정암의 지휘로 4일 간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로써 황해도를 담당한 구로다 나가마사의 일본군 제3번대는 해주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정암 외에도 황해도에는 황주의 황하수와 윤담, 해주의 조광정, 봉산의 김만수가 그의 아우 천수, 구수, 백수와 진사 최섭, 이응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대치하였다.
 
강원도 전투
 
강원도를 담당한 모리 요시나라의 일본군 제4번대는 금화, 금성을 지나 6월 5일 선봉 4천명이 회양성을 포위하여 회양 부사 김연광이 지휘하던 조선관군을 물리쳤다. 이후 일본군 제4번대는 함경도 안변부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제2번대와 잠시 합류한 후, 군사를 돌려 동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강원도 삼척과 묵호를 거쳐 태백산맥을 넘어 정선, 영월, 영주, 단양, 홍천, 평창 등지를 지나 원주를 향했다.

이때 68세의 원주목사 김제갑은 원주에서 동쪽으로 30리 떨어진 치악산 남쪽 기슭 영원산성으로 군민 4,000명과 식량 한 달분을 가지고 들어갔다. 8월 23일 일본군이 3,000명의 병력으로 영원산성을 공격하였다. 김제갑은 백성을 산 위로 피신시키고, 수백명의 군사들과 영원산성을 지켰다. 김제갑은 선두에서 활을 쏘며 군대를 지휘하다가 일본군의 조총에 맞았고, 총을 맞은 상태에서도 계속 활을 쏘며 싸우다가 가까이 접근한 일본군의 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 전투 결과, 영원산성을 공격한 일본군도 전력이 반으로 줄었다. 이밖에도 금강산에 있던 승려 유정은 승병을 모집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한편, 강원도에서 유종개가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경상좌도의 산골 10여 고을은 전란과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유종개는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켜서 고을의 수백 명을 모아서 산중에 진을 쳤다. 강원도에서 일본군이 횡행하여 못된 짓을 하다가 광비촌을 지나가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장령 윤흠신, 윤흠도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전진하였다. 일본군의 선봉이 변장을 하고 몰래 다니는데도 척후병이 이를 알지 못하였다. 따라서 유종개 부대는 갑작스럽게 일본군의 습격을 당했다. 그렇지만 유종개 부대는 일본군에 대항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결국 모두 전사했다.
 
경기도 전투
 
경기도에서는 홍언수가 그의 아들 홍계남과 함께 수원에서 군사를 일으켜 일본군을 토벌한 공적으로 수원판관에 임명되었고, 홍계남은 안성에서 승리하여 경기도 조방장에 임명되었다. 홍언수가 나가 싸우다 죽자, 홍계남은 통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였고, 양천과 안산의 두 고을을 수복하였다. 교동 향리였던 고언백은 양주에서 일본군을 습격하는 등의 공로로 양주목사에 임명되었다. 우성전은 강화와 인천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창의사 김천일과 합세한 바 있으며, 군세가 2,000명에 이르는 등 매우 성하였으나 병에 걸리어 특별한 공적이 없었다. 강원도 방어사 원호는 강원도에서 여주로 와서 군사를 모으고, 여주의 구미포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50여 명을 섬멸하는 등의 공로를 세웠고, 김화전투를 이끌었다.

원균의 아우인 진사 원정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고, 전부사 김적은 삭녕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며, 진사 이로가 고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산휘는 계략을 써서 적군을 사로잡는 것이 많았다. 이외에도 장숙하, 수원의 최휼, 전목사 남언경, 김탁, 전정랑 유대진, 충의 이질, 왕옥 등이 모두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였다.
 
충청도 전투
 
충청도에서 조선군과 일본군 간에 벌어진 첫 전투는 동래부사를 지내다 고향인 광주에 내려가 있던 고경명이 선조의 의주 피난 소식을 듣고 광주와 장흥 등지에서 거병하여 의주로 가던 중 금산에 집결해 있는 일본군과 6월 9일부터 10일 간 격돌한 제1차 금산전투이다. 이 전투는 전라도를 담당했던 일본군 제6번대가 전라도를 공격한 것과 깊이 관련되어 있으므로 다음의 전라도 전투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충청도 각지에서도 일본군에 대항하여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의병을 조직하였다. 1592년 7월 초 조헌은 옥천에서 거병하여 보은에 진출하였고, 홍성에서 전참봉 이광륜, 장덕익, 신난수, 고경우 등이 조직한 의병과 합류하여 1,600명의 군사로 청주로 향했다. 공주에서 기병한 의승군장 기허와 영규의 승군 1,000명이 합세했다. 임진왜란 초 청주를 잃고 연기에 진을 치고 있던 충청도방어사 이옥의 병력이 합류하여 청주성 탈환 계획을 하였다.

8월 1일 조선군은 일본군 제5번대 산하 1,000명이 주둔하고 있던 청주를 공격하였다. 조헌이 청주 서문으로 쳐들어갔고, 청주성에 있던 일본군이 성문을 열고 나와서 싸웠다. 조헌군이 전투에서 승기를 잡았고, 일본군은 청주성으로 퇴각했다. 조헌은 바로 군대를 지휘하여 청주성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사방이 어두워졌고, 이 틈에 일본군은 진영을 비우고 달아났다. 청주성 탈환의 공로로 조헌은 종4품 봉상시첨정, 영규는 당상관의 벼슬과 단의가 내려졌다.

일본군은 청주성을 잃으면서 김해에서 창녕, 금산, 추풍령을 넘어 영동과 청주, 용인을 잇는 우로 보급선이 끊겼다. 개전 3개월만에 좌우 보급로가 끊기면서 일본군은 군수물자 보급로를 부산에서 대구, 상주, 문경, 조령을 넘어 충주와 용인을 잇는 중로 외길에 의존하는 실정에 놓이게 되었다.

청주성을 함락시킨 후 조헌과 영규는 8월 18일 곧 바로 금산성을 공격한다 (제2차 금산성전투). 금산성전투에 앞서 조헌의 부장과 영규는 병력이 적으니 군대를 정비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불의를 참지 못하는 조헌의 충의에 감동하여 전투를 벌이게 된다.

당시 조헌과 영규, 온양현감 양응춘이 이끄는 조선군은 700명이었고, 금산에 주둔하고 있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군 제6번대의 병력은 1만명 정도였다.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은 공격을 감행하여 세 번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일본군에 포위되어 전멸된다. 하지만 조선군의 끈질긴 공격에 따라 위협을 느낀 일본군 제6번대는 9월 17일 금산을 포기하고 경상도 성주로 철수했다.

이외에도 충청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토정 이지함의 서자 이산겸, 한산의 전참의 신담, 신수경, 조대곤, 조웅, 박춘무, 조덕공, 이봉, 김홍민 등이 있다.
 
본 매체는 박희봉 교수의 저서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를 발췌 1주일에 두 번 연재하고 있습니다.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는 국가통합을 위한 사회자본의 역사적 상징 모델을 진주성전투에서 찾던 중 발견한 임진왜란 전사의 왜곡과 역사의 진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 박희봉 교수: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중앙대 행정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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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  hbpark@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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