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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11. 제2기(1592. 6. - 1592. 10.) 조선군의 반격③일본군의 조선 8도 점령 계획
박희봉 | 승인 2019.10.06 23:01
전라도 전투

 
박희봉 교수
[박희봉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전라도 지역을 담당한 일본군 제6번대의 전투기록은 또 다른 의미를 시사한다. 일본군 6번대는 한양성 함락 이후 영동과 무주를 거쳐 금산성(錦山城, 현 충남 금산)에 본부를 주둔시켰다. 이 부대는 1592년 7월부터 웅치와 이치를 넘어 전라도 전역을 장악하기 위해 전주성으로 향하였다. 충청도 금산에서 전주로 가려면 웅치 또는 이치 고갯길을 넘어야 했다. 전주로 향하던 일본군은 두 부대로 나누어 한 부대는 용담과 진안을 거쳐 웅치를 향했고, 다른 한 부대는 진산을 거쳐 이치를 넘으려 했다. 웅치를 향하던 일본군은 1만명으로 제6번대 총 1만 5,700명 중 주력이었고, 이치를 향하던 일본군은 2천에서 3천명으로 추정된다.

이때 광주목사 권율이 용인전투에서 보전하고 있던 군사 1,500명을 이끌고 전주 감영으로 들어와 일본군 응전을 지휘하였다. 화순의 동복현감 황진이 편장 위대기, 공시억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뒤따라 전주에 왔다. 해남현감 변응정, 나주판관 이복남, 김제군수 정담 등도 군사를 이끌고 합류했고, 전주의병장 황박도 참여했다. 임시 도절제사를 맡은 권율은 정담을 웅치로 파견하고, 황진을 이치로 보내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적이 올 수 있는 길목에 함정을 파고, 방어책을 설치하였으며, 참호도 파 전투준비를 하고 적을 기다렸다.

웅치와 이치전투에 파견된 조선군 규모는 알려져 있지 않다. 권율의 군대와 다른 군현의 군대, 의병군, 전주감영의 주둔군을 감안하면 총 병력 7천에서 8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 따라서 각 고갯길을 지키던 조선군은 2천에서 3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

웅치를 방어하기 위해 조선군은 전면 제1저지선에 의병장 황박 군사, 제2저지선에 나주판관 이복남 군대, 제3저지선이 고개 마루에 김제군수 정담이 지켰다. 7월 7일 오후 늦게 일본군이 공격을 시작하다가 밤이 되어 물러났다. 8일 아침부터 일본군이 공격했다. 오전 중에 조선군 제1저지선과 제2저지선이 무너지고, 정오에 제3저지선도 위험에 처했다. 결국, 정담과 그의 종사관 이봉, 비장 강운과 박형길이 전사했고, 변응정은 중상을 입었다. 나주판관 이복남이 남은 군대를 이끌고 후퇴하여 전주 근교 안덕원으로 물러났다. 이날 저녁 일본군은 웅치를 돌파하고 전전적 이복남이 지키고 있던 전주성 앞까지 도착했다.

또한 7월 8일 이치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권율과 황진의 정예 조선군이 용감하게 싸웠다. 황진이 적탄에 맞고 후송되는 등 격전을 치렀지만 결국 조선군은 이치를 지켰다.

7월 8일 저녁 전주성에 도착해 있던 일본군과 이치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일본군이 금산성으로 퇴각했다. 금산성에 있는 일본군 제6번대 본대를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이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 금산성이 조선군에 점령당한다면 일본군 6번대는 조선군에 의해 포위되기 때문에 일본군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웅치.이치전투와 제1차 금산성 전투.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전술한 바와 같이 고경명은 광주에서 거병하여 남원, 김제, 임피 등 고을의 군량과 군사를 모아 여산에 모여서 평양으로 진군하던 중 금산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이 전라도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금산성을 공격하기 위해 연산에 진을 쳤다. 이때, 전주에 있던 전라감영 방어사령부에서 보낸 곽영이 고경명에게 금산에 있던 일본군이 웅치와 이치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고경명은 7월 8일 연산을 떠나 9일 이치와 금산 사이의 진산에 도착했다. 진산에서 방어사 광영과 영암군수 김성헌이 거느린 관군과 합류했고, 금산성을 포위했다. 금산성을 포위한 조선군은 7,000명 정도이고, 전주와 이치에 있다가 돌아온 일본군과 본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총 1만 3,000명으로 추정된다.

7월 10일 제1차 금산성전투가 벌어졌다. 고경명이 먼저 기병 1백여 명을 보내어 서문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이 서문으로 나와 조선군과 백병전이 벌어졌다. 고경명을 포함하여 둘째 아들 고인후, 종사관 유팽로 등이 전사하면서 조선군이 무너졌다. 고바야카와 타카가게가 지휘한 일본군 제6번대는 고경명군의 제1차 금산성전투와 전술한 조헌과 영규의 제2차 금산성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지속적인 조선군의 공격에 의해 9월 17일 전라도 점령을 포기하고 성주성으로 철수했다.

이로써 전라도는 일본군의 침략으로부터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더욱이 전라도 조선군과 의병은 지속적으로 조직을 확장하여 전투가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다른 지역까지 출정을 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김천일은 전라도에서 거병하여 경기도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1593년 6월 진주성에서 전투를 지휘하다 전사했다. 전사한 고경명의 맏아들 고종후는 제1차 금산성전투 이후 복수의병군을 편성해 전장을 누비다 다음 해 김천일이 지휘한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했다.

전진보현감 임계영은 7월 20일 보성에서 거병하여 낙안, 순천, 구례 경유하며 군사를 모집하다 남원에 이르러 1,000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전라좌의병이라 칭하고 장수, 거창, 합천, 성주, 개령, 진주, 고성, 거제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등의 공적을 세웠다. 전담양부사를 지내고 고향인 화순에 거주하던 최경회는 7월 26일 광주에서 거병하여 담양, 순창을 거쳐 남원에서 2,000명의 의병을 모아 출정하였다. 최경회는 이들을 전라우의병이라 칭하고 금산에서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우지치에서 크게 격파하고, 1592년 10월 제1차 진주성전투 때 진주성 외곽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경상우병사로서 김천일과 함께 군대를 지휘하다가 전사했다.

이외에도 남원의 전참봉 변사정은 흩어진 군사 2,000명을 모아 적개의병을 조직하였고, 정염은 남원의 백성들이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은 향병을 지휘하였으며, 순천 무사인 강희열은 처음에는 고경명을 따라 군사를 일으켰는데 금산에서 패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군사를 다시 조직하였다. 해남의 진사 임희진과 영광의 첨정 심우신, 태인의 민여운이 각각 군사를 모집하여 영남으로 출정하였고, 모두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했다. 해남의 임시 장군 성천기, 임피의 진사 채겸진과 이이남도 의병을 일으켰고, 처영은 호남에서 승군을 조직하는 등 지속적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한편, 권율은 8월에 나주목사로 승진하였다가, 승첩의 보고가 들어가자 전라감사로 승진되었다. 황진은 익산군수로 승진되었다가 또 충청도조방장으로 승진되었다. 이복남은 당상관으로 승진되었다. 권율은 9월 전라도 각지의 수령과 승장 처영과 함께 군사 2만을 거느리고 국왕을 도우러 북진하였다. 10월에는 권율이 수원에 진을 치고 경기도에 있는 일본군과 대치하였다.
 
경상도 전투

상대적으로 일찍 자발적으로 군대가 조직된 경상도에서는 5월 곽재우의 정암진전투를 계기로 의병의 조직화에 탄력이 붙었다. 1592년 6월 말이 되면서 곽재우군 2,000명, 김면군 5,000명, 정인홍군 3,000명이 되었다. 단성에서 권세춘이 500명, 진주에서 허국주가 700명의 의병을 모았다. 이외에도 김치원, 이대기 등도 의병을 모집했다. 의병의 활동이 빈번해지면서 초기 전투에서 패배한 관군들이 다시 모였다. 의병들은 일반백성들과 관군의 지원을 받으며, 지역의 지형지물을 잘 알고 있는 장점을 이용하여 매복과 습격 등의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을 섬멸해갔다. 또한 경상도 조선관군의 활동 역시 활발하였다. 함안군수 유승인은 일찍이 기마병을 운용하여 창원과 진해 등 해안가에서 전투를 벌여 승전하여 경상우병사가 되었다. 진주목사를 대리하던 판관 김시민은 곤양군수 이광악과 함께 경상우도 전지역을 다니며 전투를 벌였다.

경상도는 부산에서 대구를 거쳐 한양으로 이어지는 보급로가 있었던 까닭에 주둔하고 있었던 일본군의 수도 많았고, 일본군 병력과 병량이 지속적으로 이동하고 있던 터에 조선군과의 전투가 빈번했다. 특히 일본군 병참 수송선박이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여 부산에서 대구를 지나 상주로 빈번하게 오르내리는 터에 현풍, 창녕, 영산 등 낙동강 인근 지역은 일본군이 방어해야 하는 요충지로써 경상도 조선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곽재우 의병군이 정암진전투를 시작으로 소규모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자 오운과 박사제의 의병군까지 합세하여 규모가 4,000명이 넘었다. 초유사 김성일은 곽재우에게 민간양곡 통제권까지 주어 군수조달 염려 없이 전투에만 몰입하게 하였다. 7월 들어 곽재우는 이 병력으로 현풍성을 공격하여 수복하였고, 곧바로 창녕성까지 함락했다. 현풍성과 창녕성에 있던 일본군은 영산성으로 퇴각했다. 곽재우는 김성일에 요청해 의령, 초계, 고령 등 군현의 군사들까지 모두 출동시켜 영산성을 에워싸고 밤낮없이 공격했다. 3일간의 공방전 끝에 일본군은 성을 버리고 나가 성주성으로 물러났다. 이로써 곽재우 의병군은 낙동강 서쪽 경상우도 지역 대부분을 일본군 점령으로부터 수복하였다.

곽재우가 영산성을 공격하고 있을 무렵 정인홍군의 선봉장 김준민은 무계를 공격을 시작했다. 무계는 현풍 서쪽 낙동강변으로 일본군이 낙동강 수로 경비를 위해 보루를 쌓고 방어하던 곳이다. 정인홍군은 일본군과 9월까지 지속적인 전투를 벌였고, 9월 11일 일본군은 마침내 보루를 불태운 후 성주성으로 철수했다.

일본군 제6번대가 금산성에서 고경명 의병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7월 10일, 경상도 금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별동대 1,500여 명이 소백산맥 남쪽 기슭을 따라 거창과 안의를 지나 육십령을 넘어 전라도 장수로 진격하게 위해 금산과 거창 중간 지점인 지례 우척현 고개에 이르렀다. 고갯마루 양쪽에 김면 의병군과 조선관군이 매복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고갯마루에 들어오자 기습하여 대승을 이끌었다.

김면 의병군은 우척현전투 이후 거창에 주둔했고, 김성일은 김면에게도 거창과 안음의 식량 통제권을 부여하고 거창, 함양, 산청, 합천의 군사를 주어 병력이 3,000명에 이르렀다. 일본군 병력이 재침의 기미를 보이자 김해부사 서예원과 금산 의병장 성균관 박사 이여노가 합세했고, 진주판관 김시민이 군사 1,000여 명을 이끌고 합류했다. 8월 3일 일본군 6번대 병력이 지난번 패배를 만회하고자 우척현을 넘어 거창까지 쳐들어와 김면 연합군과 사랑암에서 전투를 벌였다. 김면의 지휘와 김시민의 용전으로 일본군을 격퇴하였고, 일본군은 우척현을 넘어 지례로 도주했다.

낙동강 서쪽의 경상우도 거의 전역을 조선군이 일본군으로부터 수복하고 있던 7월 들어서는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고 있던 경상좌도에서도 조선군의 반격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전훈련봉사 권응수가 신녕(영천)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초유사 김성일이 그를 의병대장으로 삼았다. 하양, 청송, 의흥 등 여러 고을에서 장정들이 모여들었고, 군수 김윤국이 가세하여 군사수가 3,560명에 이르렀다. 권응수는 김윤국을 별장으로 하고 정대임과 정세아, 신해 등을 의병장으로 하여 영천성을 공격했다. 영천성을 관할하고 있던 일본군은 신녕, 의흥, 의성, 안동 일대를 관할하고 있었다.

권응수 의병군은 7월 14일 박연, 22일 소계와 사천에서 적의 소부대를 기습하면서 영천성으로 접근하여 24일 추평에 진을 치고 영천성을 공격하였다. 권응수는 영천성을 굽어볼 수 있는 마현산 기슭 주변에서 마른풀과 나뭇잎, 나무 더미를 쌓아 화공을 준비하면서, 인근 남천 숲 속에 복병을 배치하였다. 25일 새벽부터 26일 밤까지 성 밖으로 진출한 일본군과 백병전을 벌였고, 27일 그간의 교전으로 사기가 오른 조선군은 총공격을 감행했다.

준비해 놓은 나뭇더미와 풀에 불을 질러 일본군의 시야를 가리며 조선군이 성벽을 넘어 공격했고, 일본군은 상주로 후퇴하였다. 영천성 탈환으로 인근 신녕, 의흥, 의성, 안동 지역이 차례로 수복되었으며, 일본군의 경상좌도의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경상좌병사 박진이 즉시 장계를 올렸고, 조정은 권응수를 통정대부 방어사로, 정대암을 예천군수로 임명했다.

8월 김면과 정인홍 의병군을 중심으로 한 조선 연합군이 성주성을 공격했다. 성주성 공격에는 경상도 의병뿐만 아니라 구례현감 이원춘이 이끄는 관군 5,000며 명, 최경회가 지휘하는 전라좌의병, 임계영의 전라우의병까지 합류했다. 조선군의 총 규모는 2만여 명에 달했다. 성주성을 방어하던 일본군의 규모도 2만여 명에 달했다. 경상우도 일대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이 패퇴하여 대부분 성주성에 모여 있었다.

8월 21일 조선 연합군의 성주성공격이 감행됐다. 조선군이 합천 해인사에서 작전회의를 한 후 고령을 거쳐 성주성을 포위하는 진영을 갖추고 있자 일본군이 조선군의 후방을 공격한 것이다. 조선군은 혼란에 빠졌지만 포위를 풀고 퇴각함으로써 제1차 성주성전투는 조선군의 실패로 끝났다.

9월 11일 성주성공격이 다시 재개됐다. 김면과 정인홍 부대가 합동작전을 하였고, 합천군수 배설과 합천가장 김준민이 참전했다. 성주성 5리 밖에 지휘부를 두고 하루 종일 공격했으나 일본군은 성안에서 조총만을 난사할 뿐 대항하지 않았다. 김면과 정인홍이 다음 날 11일 성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를 챙겨 공격준비를 하고 있던 차에 금산에 있던 일본군 응원군이 후방을 급습하였고, 때를 맞춰 성주성 안에 있던 일본군도 성문을 열고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앞뒤에서 협공 당했고, 결국 많은 희생자를 낸 채 실패하였다.

7월 경상좌병사 박진이 안강에서 경상좌도 장군회의를 열고, 16읍의 군사를 이끌고 경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병력을 편성하였다. 권응수, 경주판관 박의장 등을 선봉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경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제1차 경주전투는 선안의 일본군이 우회하여 기습함으로써 500명의 군사만 잃고 후퇴했다.

한 달 후 박진은 군사를 재정비하여 다시 제2차 경주 전투를 치렀다. 이때 신예무기 비격진천뢰 등을 사용해 경주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일본군은 상주나 서생포로 퇴각하였고, 이로서 동부 영남지역 중심부 수십 개의 읍의 수복하였다. 박진은 이 공으로 9월 선조로부터 양가죽 옷을 특별히 하사받았고,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1592년 6-10월 겅상도지역 전투.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1592년 6월부터 10월까지 경상도에서는 곽재우의 기강 및 정암진전투2), 현풍성전투, 김면의 거창 우척현 전투3), 정인홍의 무계전투, 조선관군과 경상·전라도 의병 연합군의 성주성전투, 권응수의 영천성 전투, 김면과 김시민의 거창전투, 경상좌병사 박진의 경주성 탈환 등으로 경상도 지역 대부분을 수복하였다. 특히 낙동강 서쪽 경상좌도는 조선군이 자유롭게 활보하고 정상적인 농사가 이루어질 만큼 안정되었다.
 
1592년 6-10월 경상도지역 일본군 점령도시 및 조선군 수복도시.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이러한 경상우도의 조선군과 의병의 활약으로써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전투 당시 경상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장악한 지역은 함창(상주군 함창읍), 상주, 지례(금릉군 지례면), 선산, 김해, 창원, 진해, 고성으로 한정되게 되었고4), 진주 부근의 조선군과 의병이 동원되어 고성, 진해, 창원 지역의 일본군들을 부산지역으로 몰아내어 경상우도 지역은 조선군 및 의병 관할지역이 된 것이다.

이렇게 경상우도에서 조선관군 및 의병이 실질적으로 일본군을 물리침으로써 조선 전역을 분할 점령하려던 일본군의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산에서 대구와 한양을 거쳐 조선의 중부와 북부를 잇는 일본군의 보급로가 명맥만을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조선군이 일방적인 패퇴를 거듭하던 국면이 반전되어, 조선군 및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본군과 대항하여 일본군 점령지를 활발하게 수복한 것이다.

1) 비변사가 아뢰기를, “신들이 듣건대 전일 금산(錦山)에 들어왔던 왜적의 수가 거의 만여 명에 이르는데 사납고 용감함이 비길 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라도의 병력(兵力)은 다른 도와는 달라 웅치(熊峙)의 싸움과 이치(梨峙)의 공수(攻守)에서 맹장(猛將)과 경졸(勁卒)이 많이 전사하였는데도, 퇴각(退却)하지 않고 끝내 조헌(趙憲)·고경명(高敬命) 등의 의병과 연합하여 왜적을 무찔러 일시에 섬멸하였으니, 그 충성과 용맹이 가상합니다.(조선왕조실록, 「호남으로 진격하려는 왜적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다」, 󰡔선조 40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7월 5일(정사) 2번째 기사)

2) “재우(再祐)는 4월 24일에 의병을 일으켜 왜적들을 토벌하였다. 김천일(金千鎰) 등이 뒤에 비록 창의사(倡義使)로 이름하였지만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실제로는 재우이며 왜적들이 감히 정암진(鼎巖津)을 건너 호남(湖南)으로 가지 못하게 한 것도 바로 재우의 공이다.”(조선왕조실록,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선조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8일(병진) 4번째기사)

3) “김면은 무장 김세문의 아들이다. 적을 거창 우척현에서 막아 여러번 패퇴시켰다(유성룡(이연도 역), 2010, 󰡔징비록󰡕, 두산동아, p.90.)“. “왜병이 지례(知禮)에서 거창(居昌)에 침범하자, 의병장 김면(金沔)이 격퇴시켰다.”(조선왕조실록, 「왜병이 거창을 침범하자 의병장 김면이 격퇴시키다」, 선조수정실록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7월 1일(무오) 6번째기사

4) “진주판관 김시민 등은 관군과 전군수 김대명 등이 모집한 병사들을 거느리고 고성, 진해의 적을 방어하고 있고, 함안군수 유숭인과 칠원현감 이방좌, 사천현감 정득렬, 곤양군수 이광악 등은 각기 함락된 성에 돌아가서 싸워 지킨 공이 많습니다. 그리하여 함창, 상주, 개령, 기만, 지례, 선산, 김해, 창원, 진해, 고성 바깥의 적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김성일이 8월 9일에 올린 장계의 내용이다. 본 장계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고,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부하였던 이로(李魯)의 용사일기[龍蛇日記]에 수록되어 있다(김준형, 1995, 「진주 주변에서의 왜적방어와 의병활동: 제1차 진주성 전투 이전」, 󰡔경남문화연구󰡕, 제17권,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p.113. 참조).
 
본 매체는 박희봉 교수의 저서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를 발췌 1주일에 두 번 연재하고 있습니다.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는 국가통합을 위한 사회자본의 역사적 상징 모델을 진주성전투에서 찾던 중 발견한 임진왜란 전사의 왜곡과 역사의 진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 박희봉 교수: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중앙대 행정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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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  hbpark@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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