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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 7. 제1기(1592. 4 - 1592. 6) 초기 일본군의 공세②
박희봉 | 승인 2019.09.01 17:11
상주전투
 
[박희봉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1단계 제승방략 방어 전략을 가동하여 경상순찰사 김수는 각 고을에 전달하여 전체 병력을 이끌고 대구로 모이라고 명령하였고, 각 고을의 수령들은 각자의 병력을 이끌고 대구로 집결하였다. 그러나 한양에 있던 이일이 한양에서 300명의 군관을 모아 내려가고자 했으나 군사를 모으는데 차질이 생겨 바로 대구로 내려가지 못했다.

이일은 3, 4일을 병력을 모으기 위해 지체하다가 마침내 60명의 군관을 모집하였고, 추가로 4,000여 명의 군사를 모아 대구로 내려갔다. 이렇게 군사를 모아 대구로 내려가는 시일을 지체하는 동안 대구에 모여 있던 경상도 병력들이 날이 지남에 따라 흩어지기 시작했다. 제승방략에 따라 병력을 한 번도 모으는 훈련을 하지 않은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일이 문경을 거쳐 상주에 도착했을 때는 대구에 모여 있던 거의 모든 병력이 흩어진 상태였다. 따라서 이일은 상주에서 병력을 모아 전투를 준비했다.
 
상주전투.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상주에서 이일이 새로 모은 병력은 800명으로, 그 나마 대부분이 군사훈련을 받아보지도 못한 농민들이었다. 이일은 군사훈련부터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군 1번대 고시니 유키나가는 몇 차례나 척후병을 보내 조선군의 상황을 일거수일투족까지도 정찰하면서 전투준비를 하였다. 4월 25일, 완전한 전투준비를 하고 있던 일본군은 우세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조선군을 포위, 압박하였고 대부분의 조선군은 전사하였다. 다만 이일과 2명의 군관만이 조령에 대기하고 있던 신립 진영으로 후퇴하였다.

4월 25일 일본군은 상주를 함락한 후, 바로 다음 날인 26일 문경에 들어왔다. 일본군의 한 패는 군위와 비안을 함락시키고, 한 패는 장기를 비롯해 영일, 안동, 풍기를 함락시켰다. 이 때 영남 60여 고을이 모두 무너졌고, 경상우도는 겨우 6, 7 고을만이 전화를 면했으나 군졸은 모두 흩어졌다. 28일에 일본군은 충주에 들이 닥쳤다.
 
충주 탄금대전투
 
충주탄금대전투.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충주 탄금대전투는 조선 조정에서 제승방략에 의거하여 준비한 신립장군과 일본군 1번대 고니시 유키나가 간에 4월 28일 벌어졌다. 신립장군은 여진족과의 수많은 전투에서 항상 승리한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인정받던 장수였다. 조선 조정도 신립장군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신립장군이 충주로 내려갈 때 각도의 상번군, 무관, 종실, 내시위 군졸 등 대부분의 조선 중앙군이 동행했다. 선조는 호위에 필요한 최소한의 군대도 남기지 않고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신립에게 맡겼다. 신립의 승패는 조선의 운명이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신립이 이끈 조선군의 병력 구성이 어떻게 되어있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탄금대전투에 참여한 조선 중앙군은 기마병 8,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또한 충청도에서 1만 2,000명 정도의 병력이 지원되었다. 하지만 신립은 충청도에 모집한 보병의 전력을 믿을 수 없었다. 따라서 신립은 8,000명의 기마병을 위주로 한 전략을 택했다. 신립은 금강 탄금대의 넓은 평원에 배수진을 치고, 그가 평소에 즐겨 사용하던 기병 위주의 전술을 준비했다. 당시 조선에서 모을 수 있는 최정예 병력인 8,000기의 기마병으로 적의 예봉을 꺽으려 한 것이다.

탄금대전투 이전에 조선군 지휘부는 일본군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을 숙의하였다. 조방장 김여물은 세재에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방어하자고 건의했고, 이일은 세재를 수비하기에는 늦었으니 한강으로 물러나 방어선을 구축하자고 주장하였다. 신립은 자신이 기병의 전문가로서 기병에 관한 전략전술을 잘 알고 있기에 기병의 강점을 이용해야 하며, 대부분의 조선군이 전투경험이 없기에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지면 겁을 먹고 도망을 쳐서 전술을 운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배수진이 유리하다는 점을 주장했다. 즉 신립장군은 조선의 최고 무장으로 구성된 기병의 장점을 살리고 싶고, 세재에 진을 칠 경우 장기전에 대비해야 하는데 조선군이 일본군보다 장기전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점도 고려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군은 지휘관인 신립장군의 의지대로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조선군의 상대방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군 1번대 1만 8,700명이다. 상주전투를 치른 후 3일 만에 일본군이 문경세제를 넘어 탄금대에 진을 치고 전투를 벌였으니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 기병을 물리칠 대안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군이 기병 위주의 전술을 구사할 것임을 미리 알고 기병의 기동성을 제한하기 위해 목책까지 준비하였다.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일본군 조총부대는 기병을 효과적으로 물리치는 방안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경험은 조총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전투기법을 완성한 오다 노무나가(織田信長)가 일본 최대의 영주인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賴)의 기마부대를 나가시노(長篠) 전투에서 물리친 이후 습득한 것이다.

탄금대전투 결과 역시 명확하게 결정되었다. 승리는 자신의 강점과 상대방의 약점을 잘 알고 전투준비를 철저히 한 일본군의 것이었다. 조선군은 2-3회 기병 돌격을 시도했으나 적진을 돌파하지 못했다. 조선 기병의 공격이 실패한 이후에는 포위망을 좁혀드는 일본군에게 전멸 당했다. 포르투갈인 프로이스(2008)에 따르면 조선군은 대부분 매우 용감했다고 하였고, 포로가 된 한 조선 기병은 일본군에게 자신의 목을 쳐달라고 주문하고 전사할 정도로 조국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탄금대전투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제기하는 것과 같이 만일 신립장군이 세재에 진을 쳤다고 해도 임진왜란 초기의 전투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만일 조선군이 세재에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면 고시니 유키나가는 세재 방어선의 약점을 발견하여 공격하든지, 세재 방어선에 약점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다른 방안을 강구했을 것이다. 또한 이미 구로다 나가마사가 지휘한 일본군 3번대는 4월 28일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로 진입하였고, 이 부대가 청주에서 충주로 조선군의 배후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크다. 신립장군이 지휘한 조선군이 어떤 전략으로 나오든지 일본군은 조선군의 전략을 역이용하는 전략을 구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즉 임진왜란 초기 월등한 전투력을 보유한 일본군은 전면전에서 조선군을 압도할 수밖에 없었다.

탄금대전투 이후 일본군은 1번대에서 3번대까지 3개 부대 5만 2,500명의 병력이 3개의 길로 나뉘어 한양성으로 북상했다. 모든 병력을 신립과 함께 보내 탄금대에서 패퇴한 뒤 조선을 이를 막을 병력이 없었다. 따라서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군은 예정대로 북상했다.
 
일본군 침략 경로
· 1군 (고니시) : 동래 → 양산 → 밀양 → 청도 → 대구 → 인동 → 선산 → 상주 → 조령 → 충주 → 여주 → 양근 → 용진나루 → 경성동로 → 한양성 → 개성 → 평양성
· 2군 (가토) : 동래 → 언양 → 경주 → 영천 → 신녕 → 의홍 → 군위 → 비안 → 용궁 → 조령 → 충주 → 죽산 → 용인 → 한강 → 한양성 → 개성 → 함경도
· 3군 (구로다) : 김해 → 성주 → 무계 → 지례 → 등산 →추풍령 → 영동 → 청주 → 경기도 → 한양성 → 평양성 → 황주
 
 탄금대전투 이후 조선 조정
 
탄금대전투 이후 조선군은 경상도 및 충청도에 주둔하고 있던 지방군뿐만 아니라 중앙군의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국왕인 선조의 피난 행차에 호위군사도 없었다. 조선은 일본군을 맞아 싸울 군대가 없었다. 신립장군의 패배로 조선 조정은 일단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다. 도성인 한양성을 지킬 최소한의 군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국왕이 일본군에 포로가 되기라도 한다면 조선은 나라 자체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조선 조정은 특별한 대책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적군이 수가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적군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아군을 어디서 어떻게 징발하여 적군에 대항할 것인지에 대한 대안도 없었다. 다만, 도원수 김명원에게 북상하는 일본군을 막으라는 전권을 부여하고 국왕은 북쪽으로 몽진 할 수밖에 없었다. 임금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는 교서를 8도에 보내고 초유사를 각 도에 보내어 의병을 소집케 하는 것뿐이었다.
 
일본군의 한양성 함락과 점령계획의 차질
 
일본군은 한양성 공격을 위해 일본군 주력인 1번대(부대장: 고니시 유키나가), 2번대(부대장: 가토 기요마사), 3번대(부대장: 구로다 나카마사)까지 약 53,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일본군으로서는 한양성을 함락하면 조선의 국왕을 사살 또는 자살, 생포함으로써 조선과의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조선군의 최후 저항이 거셀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한양성에는 방어할 조선군이 거의 없었다. 일본군은 1592년 5월 3일 한양성을 손쉽게 함락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예상과 달리 도성인 한양성을 함락하였지만 조선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전쟁도 끝나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주요성이 함락되면 성주는 할복하고 성에 사는 주민은 승리한 군대에 항복하여 해당 지역이 평정되는 것이 전쟁에서 기본 방식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국왕이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면서도 전체 조선백성을 지휘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모든 백성이 일본군에 저항했다. 고구려로부터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외침을 받았을 때 전체 백성이 병사가 되어 항전한 조선백성은 임진왜란 때도 그 전통을 발휘한 것이다. 일본군은 이런 조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 백성이란 단순히 거주를 이전하는 자유도 없는 영지에 부속된 농노나 전리품으로서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백성은 점령군이 일본군에 전혀 호응하지 않았다. 조선백성들은 전쟁 초기 난을 피했지만, 전쟁이 장기화 하자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한양성이 함락된 이후 바로 조선백성들이 일본군에 대항한 것은 아니다. 전국적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백성들은 각 고을을 중심으로 삼삼오오 조직화되어, 한양성이 점령된 지 1개월 후 평양성까지 점령된 시점에는 전국적으로 저항이 시작됐다.

일본군은 한양성 점령 이후 전국에서 조선백성과의 새로운 싸움이 시작될 것을 모른 채 평양성 함락까지 각종 전투에서 완벽한 승리를 하였다. 또한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계획에 따라 한양성 점령 이후 조선 8도를 분할 점령하기 위해 각 부대에 담당된 지역으로 나뉘어 전투를 벌였다.
 
해유령전투
 
한양성이 점령된 이후에도 조선군은 적에 대한 무지와 리더십의 부재가 계속된다. 한양성 함락 이후 1차 평양성전투에 이르기까지 조선관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주요 전투에서 조선관군은 전투경험의 부재를 여실히 증명했다.

양주전투로도 불리는 해유령전투는 1592년 5월 16일 조선의 부원수 신각이 가토 기요마사의 선발대 70명을 모두 전멸시킨 인진왜란 최초로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그러나 해유령전투 역시 조선군 통수권자의 무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 국왕은 도원수 김명원에게 방어를 맡겼다. 그러나 김명원은 5월 2일 한강 방어를 포기하고 후퇴하였다. 부원수 신각은 자신의 군사만 이끌고 도성 안으로 들어가 유도대장 이양원, 함경남도 병사 이흔 등과 함께 양주의 해유령에 진을 쳤다. 이때 한양성을 점령한 일본군 가토 기요마사는 개성으로 피난 가던 선조의 어가를 쫓기 위해 선발대 70명을 보냈다. 신각이 이끄는 조선군은 이들 일본군 선발대를 공격하여 전멸시키고, 70명의 수급을 선조에게 보냈다.

한편, 선조의 어가를 보호한다는 핑계로 개성까지 후퇴한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 방어 실패에 대한 문책을 걱정하여 신각을 모함했다. 김명원은 신각이 명령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패배하였다는 거짓 보고를 올렸다. 이 말을 들은 선조는 선전관을 보내 신각의 목을 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신각으로부터 가토 기요마사의 선발대와 싸워 이겼다는 장계와 그 증거물인 70명의 일본군 수급을 받은 선조는 급히 다른 선전관을 보내 신각의 목을 베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미 신각은 5월 18일 먼저 도착한 선전관에게 목이 베여 처형당했다.
 
임진강전투

 
임진강전투.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임진강전투는 1592년 5월 18일 도원수 김명원, 도순찰사 한응인, 남도병마절도사 신할, 경기감사 권징, 조방장 유극량, 유도대장 이양원, 순변사 이일 등이 이끄는 조선군 13,000명과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제2번대 22,000명의 전투이다. 조선군은 임진강에 있는 배를 모두 북쪽에 숨겨 놓고 임진강 북쪽에 진을 쳤다. 일본군은 임진강 북쪽의 조선군 병력이 많음을 알고, 섣불리 도하하지 못하였다. 양쪽 군대는 9일 간 대치하다가 일본군이 파주 방면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한응인과 신할은 철수하는 일본군을 공격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도원수 김명원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군과 군관들은 적의 계략을 의심하여 공격에 반대하였지만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도원수 김명원이 한강 방어 실패와 신각 사건에 대한 부담으로 반대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지 못했다.

5월 12일 김명원의 장계에 따르면, “신은 이빈, 유극량 이하 여러 장수 20여 명과 군사 7천 명으로 임진에 주둔하고 벽제역 등지에 복병을 두어 적을 많이 잡아 죽였고 이양원도 역시 이일, 신각 이하 여러 장수 10여 명과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대탄에 주둔하여 바야흐로 전진하여 서울을 취할 것을 꾀하고 있습니다.”라고 적혀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조선군은 또 다시 전투경험의 무지에 의해 패배를 자초한다.

신할과 유극량은 병사 1만명을 이끌고 임진강을 건너, 철수하는 일본군을 추격했다. 그러나 철수하던 일본군은 매복하고 기다리다가 조선군과 정면 승부를 벌였다. 대규모 전투에 능한 일본군이 조선군을 임진강변에 몰아놓았고, 결국 1만명의 조선군은 전멸했다. 임진강 북쪽의 조선군은 강 건너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 우왕좌왕 하다가 뿔뿔이 흩어져 임진강 방어선은 자동적으로 무너졌다.

이후 5월 29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이 모두 임진강을 넘어 특별한 저항 없이 개성을 함락하였다. 6월 7일 황해도 안성역에서 일본군 제1군과 제3군은 평양으로 향하고, 제2군은 함경도로 향하였다.
 
용인전투
 
용인전투.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한편, 국왕이 평양으로 피난가고 있는 상태에서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에 있는 조선군지휘부를 중심으로 각 고을 수령들이 군대를 모았다. 일본군에게 빼앗긴 한양성을 되찾기 위해 전라도관찰사 이광, 전라도방어사 곽영, 경상도관찰사 김수, 충청도관찰사 윤선각 등이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8만여 명의 군대를 모아 한양성으로 북상하였다. 조선군은 이광을 주장으로 삼고, 나주 목사 이경복을 중위장으로 삼고, 조방장 이지시를 선봉으로 하여 4만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용안에서 강을 건너 임천 길을 거쳐 전진하였다. 방어사 곽영은 2만 명을 거느리고 광주목사 권율을 중위장으로 삼고, 좌장 백광언을 선봉으로 하여 여산 길을 거쳐 금강을 건넜다. 경상우감사 김수는 수하 군사 수백(또는 군관 30여 명)을 거느리고 충청감사 윤국형은 수만 명을 징발하고 충청방어사 이옥과 병사 신익도 수만 병사를 거느리고 남도근왕군이라고 칭하였다. 8만 명의 군세에 사기도 높았다.

그러나 원정에 이르니 순창, 옥과의 군사들이 멀리 가기가 싫어서 행대원, 조인을 맹주로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켜 본군으로 군사를 돌려 향사단을 불태웠다. 이광이 병사 최원을 시켜 진군하여 토벌해서 베어 죽였다. 담양, 남원, 구례, 순천 군사들은 도중에서 모두 흩어지고, 광주, 나주 군사는 용안까지 와서 역시 흩어졌다. 수령들이 길에서 군사를 소집해도 일제히 모이지 않고 이광 역시 중도에서 망설이고 전진하기를 머뭇거렸다.

이 과정에서 조선군은 수원에서 처음으로 일본군과 만났다. 수원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은 조선관군이 갑자기 밀어닥치는 것을 보고 도망쳐 용인에 주둔한 일본군과 합쳤다. 당시 용인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은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지휘하던 수군 1,600명이다. 용인·수원 등지에는 해전과 병력수송 임무의 중요성이 떨어져 육지로 올라와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수군이다. 6월 5일과 6일 용인전투가 벌어졌다.

6월 5일 1,600명의 일본군이 바로 5만여 명의 조선군을 공격하였고, 전투진영도 갖추지 못한 조선군은 기습을 당해 백광언과 이시지 등의 장수가 전사하는 등 선두가 무너졌다. 6월 6일 아침 조선군은 아침을 먹다가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5만명의 대군이 일시에 무너졌다. 오직 군대를 조직적으로 통솔한 권율과 황진만이 휘하 군을 온전히 이끌고 퇴각하였다.
 
본 매체는 박희봉 교수의 저서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를 발췌 1주일에 두 번 연재하고 있습니다.
 
‘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는 국가통합을 위한 사회자본의 역사적 상징 모델을 진주성전투에서 찾던 중 발견한 임진왜란 전사의 왜곡과 역사의 진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 박희봉 교수: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중앙대 행정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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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  hbpark@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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