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귀한 자는 자연과 친할 수 없고. 자연과 친한 자는 부귀와 친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부귀란 돈과 권력을 말하고.

[김성춘 푸른한국닷컴 칼럼위원]자연은 청산(靑山)과 전원(田園)을 말한다고 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말은 사실인가?
아주 오랜 옛날 허유란 사람은 요임금이 천하를 맡아달라고 말하자 귀가 더럽혀졌다면서 흐르는 물에 귀를 씻었는가 하면, 소부란 사람은 귀를 씻은 물마저 더러워 소에게 마시게 할 수 없다며 소를 상류 쪽으로 끌고 갔다한다. 유교는 오랜 역사동안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었다.
옛날 사람들이라고 부귀에 대한 욕망이 삶의 동력이자 활력임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곧 자본주의가 옳고 유물론이 경청할 만 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현재의 생활이 어떠하든 안회의「안빈낙도(安貧樂道)」에서 보듯 청빈(淸貧)하게 사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하였다.
부귀로 대표되는 속(俗)은 세(勢)를 따르는데, 자연은 세를 거스르는 것이다. 또「한 장군이 공을 세우기 위해서는 만 명이나 되는 군사의 희생이 있다. 一將功成 萬骨枯」란 말에서 알 수 있듯 부귀에는 수많은 원성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또「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 보다도 더 어렵다.」는 성경의 말씀에서 보듯 부귀는 생명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한다.
자연은 사람이 현실에 좌절하고 패배할 때. 사람을 받아준다. 자연의 정기를 받은 사람은 비록 저자거리에 있지만 자연을 그리워하다가 끝내는 자연의 품안으로 돌아온다.
이퇴계가 세 번의 과거낙방과 뒤늦게(34세에 문과급제)벼슬길에 나섰지만 49세 때 벼슬을 버리고 도산에 들어온 것이고. 조선의 문인 조천한이「빈천(貧賤)을 팔려고 권문(權門)에 들어가니〳치름 없는 흥정은 뉘 먼저 하라 하리〳강산(江山)과 풍월(風月)을 달라하니〳나는 그리 못하리.」라는 시로써 자연의 주인으로 살겠다는 정신도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 진나라 도연명은 쌀 다섯 말에 소인배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며 전원으로 돌아오고. 송나라 임포는 눈 속에서 매화와 학을 찾기 위해 항주 서호(西湖)로 나가는 것이다. 영국의 계관시인 윌리엄 워즈워드는 자연 속에서만 충만을 느끼곤 했다.
무릇 부귀는 사람을 억제하지만 자연은 사람을 자유하게 한다. 부귀가 사람을 구차 하게 하고 교만하게 만든다면. 자연은 사람을 떳떳하게 하고 겸손하게 만든다. 부귀는 사람을 어지럽히지만 자연은 사람을 순화시킨다. 부귀는 사람의 몸 세포를 망가뜨리지만 자연은 사람의 몸 세포를 살린다. 부귀는 사람의 눈을 가리지만 자연은 사람의 눈을 뜨게 한다.
결론을 내린다.「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는 버려야 하는 세상의 규칙 」은 부귀와 자연과의 관계에도 예외일 수 없다. 부귀(돈·권력·명성)는 낯짝이 두꺼워야 하고 뻔뻔해야 얻는 것이지만. 자연은 민낯으로 다가가야 하며 마음이 깨끗해야 만날 수 있다.
부귀의 극을 누리면서 착한 척하는 것은 위선이고. 자연과 친해야 할 사람이 설령 부귀를 얻는다고 해도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귀는 허난설헌의 시「빈녀음(貧女吟)」에서 보듯 인간 소외를 가져오는 것이고. 자연은 종병이 늙고 병들자 집안의 모든 병풍에 산천을 그려 놓고「산과 산이 메아리치게 하리라!」처럼 가까이 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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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춘 kimmaeu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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