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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도청 | ||
[이종호 과학국가박사]정조 8년(1784), 평산에 사는 최아지가 며느리 박소사를 살해했다는 신고가 들어오자 신고를 접수한 평산부사 정경증이 검험관을 이끌고 현장에 출동했다. 최아지의 시가인 조씨 일가는 평산 일대에서 큰 위세를 떨치는 유력한 양반으로 며느리가 죽었는데도 관아에 신고조차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박소사의 시신은 이미 매장한 뒤였다.
평산부사 정경증은 증인들과 인척을 대상으로 신문했으나 각자의 진술이 일치하지 않았다. 박소사가 정말 목을 매고 자살했는지, 흉기에 찔려 살해당한 것인지, 자살을 위장한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단지 최아지가 박소사를 심하게 구박했다는 것과, 최아지가 음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박소사가 포착했다는 정황만은 밝혀냈으나 마을사람들은 모두 양반 가문의 최아지가 누구와 음행을 했는지는 잘 모른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정경증은 유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검험을 강행했다. 매장지인 야산에서 검험이 진행되는 동안 최아지는 양반가의 며느리를 욕보인다고 악을 쓰며 검험을 방해하려고 했다.
의생과 오작사령(시체를 검시하는 하인)이 깨끗하게 닦아낸 박소사의 시체의 후골(喉骨, 목구멍 속에 있는 갑상연골의 돌기) 위쪽에서 칼자국 세 개가 발견되었다. 칼자국의 너비와 깊이가 1~2푼인 상흔 하나와, 3~4푼 되는 것 하나, 깊이를 알 수 없는 상처가 있었던 것이다.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식도와 기도를 관통한 자상(刺傷)이었다. 자살을 하면서 목을 한 번도 아니고 스스로 세 번 씩이나 찌른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정경증은 친지와 증인들의 증언과 『무언록』의 자살 기록과 다소 일치한다는 것을 근거로 자살 사건으로 결론지었다. 정경증의 초검에서 박소사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목을 맨 넓은 베는 부드럽고 느슨하여 새끼줄처럼 단단하지 않아 박소사가 목을 매었으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자 칼로 목을 세 네 번 찔러 자살했다. 오른손이 부드럽고 눈이 감긴 등의 증상은 『무언록』에서 스스로 목을 찌른 조문과 딱 들어맞고 손으로 칼을 맞은 자국이 없다.’
손에 칼자국이 없다는 것은 범인이 칼을 휘두를 때 피해자가 방어를 하기 위해 칼을 잡아 상처가 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런 방어흔이 없었으므로 자살로 단정한 것이다. 시체가 발견되면 반드시 복검을 해야 했으므로 상급관청인 황해도 관찰사 홍병찬은 복검관으로 백천군수 이서회를 파견했다. 이서회는 시체가 이미 부패하기 시작하여 검험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목을 찌른 자국은 있어도 목맨 자취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당시 목맨 흔적을 찾는 방법으로 이서회가 사용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물로 목을 적신 후 파의 밑동을 짓찧어 살짝 데친 후 의심스러운 부위에 바르고 그 위에 초를 적신 종이를 덮은 후 한동안 그대로 두었다가 종이와 파의 밑동을 벗겨낸 후 목을 살핀다. 그러나 목을 맨 흔적이 나타나지 않자 두 번째 실험을 했다. 다시 종이로 시체를 덮고 술지게미를 바른 뒤에 초주를 뿌리고 한참 후에 그것을 걷어내고 목을 조사했으나 역시 목을 맨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서회는 시체를 검험한 후 관련자들을 다시 신문했는데 이 과정에서 박소사의 친정아버지 박장혁이 사위 조광선을 협박해 시어머니인 최아지가 죽였다는 자술서를 받아내려고 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복검에서도 살인에 대한 단서는 나오지 않자 자살로 결론 내린 뒤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박소사는 베로 목을 매었으나 조여지지 않아 죽음에 이르지 못하자 후골을 두 번 찔렀으나 칼이 무디어 들어가지 않았고 이에 그 빈 곳을 찔러서 칼이 깊이 들어가 죽음에 이르렀으니 자살이 명백하다. (중략) 최아지는 행실이 아름답지 않아 며느리를 거느리기에 부족하고 마을에 음란한 소문이 퍼진 것을 구실로 며느리를 가혹하게 구박하여 죽게 만들었으니 협박죄로 논하는 것이 옳다.’
복검에서도 자살로 단정했으므로 사건은 마무리되는 듯 했다. 그러나 황해도 관찰사 홍병찬은 초검과 복검의 발사와 검안 기록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다.
‘네 번 스스로 찌른 칼자국은 초검과 복검의 검안 결과가 같아 죽음의 원인이 자살이라는 사실에는 의혹이 없고 손을 대고 거둔 칼자국이 『무원록』의 스스로 목을 벤 조문과 일치하므로 살인사건이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비록 성품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고는 해도 박소사가 스스로 목을 매고 목을 찔러 죽은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홍병찬은 박소사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하면서도 여자의 몸으로 목을 매고 한 번도 아니고 세 번 네 번까지 찌른다는 것이 석연치 않으므로 증인들을 재조사하라고 판결에 첨부했다. 이 사건은 1년이나 시간을 끌었음에도 명백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박소사의 친정오빠인 박용해가 서울로 올라가 정조가 행차하는 길목에서 징을 쳐서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정조는 관찰사 엄사만으로 하여금 직접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려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엄사만은 정조의 명령에 따라 초검과 복검을 검토한 후 『무원록』에 의할 경우 ‘목구멍 아래 스스로 다친 칼자국은 하나이며 다친 뒤에는 다시 베지 못한다’라는 조항을 근거로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고 보고했다. 즉 그동안의 검안 기록에 목에 칼로 찔린 상처가 서너 군데나 있다는 것은 『무원록』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아 초검과 복검 때 판결을 잘못 내렸다는 것이다.
엄사만은 박소사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고 결론 내리고 범인은 최아지이며 최아지와 간통 의심이 있는 이차망을 종범으로 보고했다. 자살사건이 살인사건으로 바뀌었지만 정조는 여자인 최아지가 단독으로 살인할 수 있느냐며 인명과 관계있으므로 다시 조사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엄사만의 계속된 신문에도 이차망이 끝까지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자 정조는 26세인 암행어사 이곤수를 황해도에 파견하여 박소사 살인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라는 영을 내렸다.
암행어사인 이곤수가 최아지와 이차망을 신문할 때도 이들은 자신의 범행을 부인했는데 최아지의 인척인 시조카 조광진만은 그들을 변호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계속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곤수는 조광진의 진술에 의심을 품고 대질신문을 하여 결국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었다.
최아지와 조광진이 서로 정을 통하여 아이를 낳은 뒤에 사람들 몰래 산에 묻은 것을 박소사가 알게 되자 박소사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당시에 근친상간은 엄격한 유교 논리에 의해 강상죄로 처벌했다. 형조는 최아지가 끝까지 자백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주범으로 참형에 처하게 하고 조광진을 종범으로 교수형에 처하게 했다. 조선시대에 같은 사형이라도 참형과 교수형은 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자살사건이 살인사건으로 바뀌고 범인이 밝혀지자 정조는 초검 재검을 잘못하고 신문을 잘못하여 무고한 사람(이차망)을 구속하는 등 법을 잘못 집행한 전 황해감사 홍병찬(洪秉纘)을 삭직하고 엄사만을 파면했다.
또한 초검관 정경증과 재검관 이서회는 관원(官員) 명부에서 삭제토록 명했고 위증하거나 사리판단을 제대로 못한 관원들을 파면 또는 유배형에 처했다. 이 사건은 여러 차례 조사와 검험을 거친 끝에 자살사건이 타살사건으로 바뀌는 등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진짜 범인을 찾아낸 것으로 조선시대 과학수사가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로 인용된다.
참고문헌
『역주흠흠신서』, 정약용, 현대실학서, 1999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 이수광. 다산초당, 2006
| ■ 이종호 과학국가박사
'노벨상이 만든 세상',‘로마제국의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85권의 과학 도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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