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은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선 김정일은 집무실을 미친 사람처럼 서성댔다. 성질 같아서는 집무실의 집기라도 다 때려 부수고 싶었다. 그러나 있는 인내심을 다 발휘하며 참았다.

그동안 후계자가 되기 위해 참아왔던 고통을 생각하면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2차 음모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참아야 한다.

후계자로 지명 받기 위한 계략이 1차 음모였다면 이번은 명실 공히 권좌를 독차지할 2차 음모다. 책상서랍을 열었다.

특제 권총이 차갑게 놓여 있었다. 집어 들었다. 김정일의 습관이었다.

큰일을 결심할 때나, 하고 나서도 권총을 집어 드는 습관이 있었다. 자신의 최후를 담보해 줄 수 있는 것은 권총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총에는 언제나 총알이 장전돼 있었다.

다시 총알을 확인한 그는 슬로우 비디오를 틀어 놓듯이 천천히 권총을 등 쪽 가까운 허리에 찔러 넣었다.

키도 작은데다가 배도 나와 맨몸에 권총 한 자루 제대로 찔러 넣을 틈이 별로 없어 고민하다가 겨우 등짝 쪽일수록 표시가 안 난다는 것을 안 것이다. 칠흑의 창문으로 날카로운 섬광이 온몸을 자르듯 스쳐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히며 재빨리 권총에 손을 가지고 갔다. 곧이어 희미하게 천둥소리가 들렸다. 유리창으로 비쳐진 자신의 모습을 흔들며 굵은 빗줄이 내리고 있었다. 전화기를 들었다. 수화기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향산 특각입네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듯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야행성 김정일은 시간에 관계치 않았다. 물을 것이 있거나 지시를 내릴 일이 있으면 그 즉시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지금 전화 건 곳은 김일성이 있는 묘향산 별장이었다.

노인은 저녁식사 시간 이후에는 어떤 보고도 받지 않았다. 잠을 설치는 심장병을 앓는 노인에게 민감한 보고로 잠을 못 이룰까 염려가 돼서다.

“누구가?”
“조직비서십네까? 책임부관입네다.”
“주석 동지께서 뭐 하시네? ”서재에 혼자 계십네다“
“바꾸라우”
“예? 예”
김정일은 큰 호흡을 했다. 나이 쉰둘이 되었건만 여든 둘의 아버지 앞에서는 늘 긴장을 했다. 부자지간으로 생각이 들지 않고 최고 권력자와 차기 권력세습자란 특수 관계로만 연관 지어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와 기래?”
굵은 바리톤 목소리가 들렸다. 말 한마디에도 권위가 있었다. 습관적으로 말을 더듬는 그로서는 목소리에서도 눌렸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네다”
벌써 김일성은 알아 차렸다. 김정일이 흥분을 억지로 누르며 말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말해 보라우”
“....가서... 뵙고....말씀 드리갔습네다”
“전화로 하라우”
“...직접 뵙고... 드릴 말씀입네다”
“피양에서 오갔다는 거가?”
“예. 인차 직승기로 가갔습네다”
“직승기 타는 거래 싫어 하잖네. 밖을 보라우. 비 오고 있어”
“주무시기 전에 ....도착하갔습네다”
“뭐이 급하게 할 말이 있다고... 오라우”
“예”

수화기를 내려놓는 김정일의 손이 가늘게 떨고 있었고 수화기에는 땀이 흐르듯 묻어 있었다.
심호흡을 다시 한 번 하고 난 그는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상대편에서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야. 이자 수령님 뵈러 가. 이상 없디?”
“예. 이상 없습네다”

“다시 점검하고 대기하라우”

수화기를 내려놓기 무섭게 금고를 열었다. 담배 갑만 한 상자를 꺼냈다. 안에는 손가락 굵기의 은박지에 싼 것이 들어 있었다. 평양주재 소련 영사에게 미인계를 써 어렵게 획득한 독침이었다. 오른 쪽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직승기를 대기 시키라우!”
 

대형시계는 밤 11시를 향해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다.

김정일의 전화를 받고 난 김일성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남조선 김영상 대통령과 가질 정상회담에 빠져 있었다. 따지고 보면 6·25전쟁의 원흉은 자신이다.

그럼에도 전상회담을 하겠다는 김영삼의 통 큰 정치에 은근히 경의를 표했다. 김영삼이 비록 자기와는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나지만 그도 이순이니 상대가 될 것 같았다.

더구나 이 기회에 국제사회에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게다가 답례로 서울도 방문하게 된다. 불과 몇 달 전 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달력을 봤다. 고위급 회담일자에 뚜렷한 표시가 돼 있었다. 1994년 7월 25일, 26일, 27일. 오늘은 7월 7일이다. 20일도 남지 않았다.

장막을 걷어 치고 신세계로 한걸음 나선다는 게 대견한 생각이 들었다. 다만 김정일이 걸렸다. 1973년 후계자로 지명하고, 1980년 10월에 외교관계 등을 제외한 모든 일을 김정일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근래 김정일이 부쩍 아비 하는 일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역행하고 있었다. 자신은 모든 정책을 인민을 우선하려고 했다.

하지만 김정일은 정 반대였다.

무력통일을 이룩하는 그날까지 인민은 소모품으로 취급했다. 그로 말미암아 인민들의 생활은 날로 어려워갔다.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김일성은 얼마 전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하게 됐다. 노역장의 군인들이 누더기 같은 군복에 굶주림에 벌벌 떨며 작업하고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순간 김일성은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정도가 아니라 쇠뭉치로 뒤통수를 강타 당한 기분이었다. 너무나 처참한 현장을 목격한 순간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허리가 빠져 옴짝 할 수가 없었다.

김정일이 올리는 보고와는 정반대였다. 당장 김정일을 불렀다. 귀띔을 들었을 김정일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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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아  news1@bluekoread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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