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은 약자나 소수가 말할 때에는 용기나 소신이 되지만 강자(권력자)가 그런 말을 하면 원칙의 횡포나 원칙의 군림 또는 원칙의 억압이 되는 경향이 있다.
[김성춘 푸른한국닷컴 칼럼위원]사람에게 원칙은 무엇이고. 어느 때에 원칙을 찾아야 할까? 진정으로「권리를 위한 투쟁」처럼 원칙도 그런 범주의 것일까? 원칙은 그 개념이나 성질이 소극적이고 고립인 것으로서 진취적인 것이나 활달한 것과는 대조가 된다.
원칙이 각광을 받을 때는「나」나 공동체의 가치나 정체성(正體性)이 위협받고 훼손될 때이다. 논리실증주의가 검증 가능한 것만 지식이라 하여 언어의 오용이나 과용을 지적한 것과 같이 정상을 벗어날 때 이를 제어하고 붙드는데 원칙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말을 빌려보더라도「이 세계는 완전한 이데아와 불완전한 복사물로 구성되었는데」불완전한 인간의 인식이나 판단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이 제시하는 원칙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으며 그렇게 때문에 원칙은 최소화해야 해야 한다는 것이 그 근거가 된다. 원칙이 부각되려면 반인류적이나 반인간적인 것들이 전제가 되어야 하고 그것들에 대항하는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게 때문에 정치에 있어서의 원칙이란 그렇게 호의적일 수 없다. 그것이 비록 레토릭(수사修辭)이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스스로 가두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정치란 인과관계(因果關係) 즉「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팥 난다.」를 기대하는 영역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는 영역이다. 원칙은 논리적 완결성을 요구하지만 정치는 비논리적 영역으로서 위대한 모순(예, 사랑하기 때문에 보낸다.)이 감동을 자아내는 영역이다.
재난이나 구호 등의 비상시의 매뉴얼이나 행정 관료들의 자의성을 막기 위한 프로그램에서 원칙은 안존하거나 채택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정치의 영역에서 원칙을 찾는 것은 원칙의 과잉이 되거나 원칙의 탈선이 되며. 자칫 정치의 경직이나 정치의 경색 요소로 작용하기 쉽다. 사람들이 정치를「예술」이라 부르고. 정치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라는 말 속에는 정치는 상상력의 분야라는 뜻과 정치가 감성적이라는 것을 내포하는데, 원칙은 이 기능을 삭감하거나 제거할 수 있다.
원칙은 약자나 소수가 말할 때에는 용기나 소신이 되지만 강자(권력자)가 그런 말을 하면 원칙의 횡포나 원칙의 군림 또는 원칙의 억압이 되는 경향이 있다. 어떠한 원칙도 밤하늘의 헤아릴 수 없는 별 중의 하나이거나 바닷가 수를 셀 수 없는 모래알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원칙은 그래서 개인의 주체성을 확보하고 공동체의 경계를 확정하는 그 이상이나 그 이하의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역사에서 원칙은 그 관철로서 얻는 명예는 미약했지만 그 실패로서 얻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웠다. 역사에서 원칙은 그 꼿꼿함 때문이 아니라 구부려지고 휘어짐으로써 생명력을 얻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고.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중국 춘추시대의 송양공이나 남북조시대 전진의 부견이 적이 강물을 건널 때 공격을 하자는 참모들의 건의를 듣지 않아 나라도 망하고 육신도 망한 것은 원칙은 스스로 비극성을 잉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다.
과연 이 세상에 원칙이란 잣대를 들이대고 볼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생명. 휴머니즘. 민주주의를 빼놓고서는 어느 기업인의 말대로「마누라와 자식을 빼놓고서는 깡그리 바꾸어야 한다.」는 말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모조리 바꿀 수 있고 버릴 수 있고 내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연성이야말로 원칙 아닌 원칙으로서 견지해도 원칙으로서 야기되는 많은 불협화음의 걱정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넓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나 인생의 신산(辛酸)을 맛본 사람은 쉬 원칙을 말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신출귀몰하기가 비할 데가 없는 정치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것은 만물이 덧없고. 이념이 덧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어느 이스라엘의 시인이 말한 것처럼「사람이 70, 80을 산다한들 연수의 자랑은커녕 수고와 슬픔뿐이다.」에서 원칙도 이와 똑같음을 뼛속깊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옛날 미생이라는 사람은 다리 밑에서 만자나자는 약속을 지키려다 홍수를 만나 떠내려갔는데 이것은 문학 속에서는 미학으로서 찬양될 수가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교조주의라고 매도될 수 있다. 원칙이란 양신(良臣)의 개념과 같아 양신은 임금이나 신하가 이름을 드러내지만 충신은 나라도 망하고 임금도 죽고 신하도 죽는 상황인데, 원칙을 자주 들먹이거나 원칙이 현실화가 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푸른한국닷컴, BLUEKOREADOT
김성춘 위원 kimmaeul@hanmail.net
<저작권자 © 푸른한국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