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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민족독립운동역량의 상징은 과대평가
전영준 | 승인 2019.06.06 22:44
김원봉 사진@온라인커뮤니티
문재인 대통령이 제64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약산 김원봉을 언급해 논란이 일고 있다.
 
[전영준 푸른한국닷컴 대표기자] 문 대통령은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애국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다"며 "스스로를 보수라고 생각하든 진보라고 생각하든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상식의 선 안에서 애국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통합된 사회로 발전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문 대통령은 "애국이란 계급이나 직업, 이념을 초월하는 것"이라며 이를 잘 보여주는 대표인물들로 김원봉을 포함해 채명신 장군과 석주 이상룡 선생, 우당 이회영 선생, 백범 김구 선생 등을 거론했다.
 
문 대통령은 특히 김원봉 부분에선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광복군을 앞세워 일제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며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고 설명했다.
 
김원봉(1898~미상 )은 경남 밀양출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었으며, 8·15해방 후 12월에 귀국, 여운형(呂運亨)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공화국'이 결성되면서 중앙인민위원 및 군사부장을 맡았다.
 
김원봉은 중국 황푸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대 후반 조선민족혁명당을 이끌고 중국내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다. 1946년 2월 조선공산당이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했을 때 5명의 의장 가운데 1인이었다.
 
김원봉은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여 의백(단장)에 선임되었다. 1930년대 후반 조선민족혁명당을 지도하면서 우리나라 민족주의운동의 한 축을 이루었고, 또한 '조선의용대'라는 강력한 군사조직을 결성하기도 했다.
 
1941년 6월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은 제6회 전당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참가를 결의했고 '조선의용대'도 광복군 제1지대로 합편되었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에 취임한 김원봉은 1944년 임시정부 제38차 회의에서 국무의원 및 군무부장에 올랐다.
 
김원봉은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에는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1958년 10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된 후 숙청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이 이날 추념식에서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고 밝힌 김원봉의 업적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음백과>에 따르면,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1월 이봉창의거, 4월 윤봉길의거를 계기로 한중연합전선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는 1938년 가을 김원봉의 조선혁명당이 한커우(漢口)에서 중국정부의 후원을 받아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고 항일군사활동을 전개한 것이 큰 자극이 되었다.
 
1940년 충칭에 정착한 임정은 5월부터 광복군 창설을 위해 장제스 주석과 교섭을 추진했다.
 
당시 중국군사위원회에서는 김원봉(金元鳳)의 조선의용대를 후원하고 있었기에 주저하였으나, 결국 1940년 8월 광복군 총사령부의 설치안을 승인했다.
 
이에 임정은 1940년 9월 17일 충칭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典禮)를 개최, 광복군 창설을 공표했다.
 
광복군의 성립 초기에는 항일전을 전개할 실제 전투보다는 전투부대의 편성과 전선홍보전에 주력했다.
 
광복군은 성립 당시 최고통수부에 김구·유동열·조성환·조완구 등이 있었고, 총사령에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석, 부관장에 황학수, 주계장에 조경한, 참모에 이복원·김학규·공진원·이준식 등 불과 12명으로 창설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만주독립군 출신으로 낙양군관학교의 교관·학생으로 연결된 인물들이었다.
 
임정은 1940년 11월은 광복군 총사령부를 시안(西安)으로 옮기고 4개 지대를 설치하기로 했다.

1941년 3월 강남일대 초모공작을 위해 김문호를 단장으로 4명의 특파단을 설치하여 장시성으로 파견했다. 이러한 초모공작의 결과, 총사령부 창설 1년 만에 광복군은 300명의 인원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임정은 광복군에 대한 최고 통수기관으로서 총사령부의 창설을 계획하였으나, 1941년 11월에 중국측이 요구한 행동준승을 수락함으로써 좌절되었다.
 
행동준승에 따라 광복군 요직에는 중국군 장교가 배치되었으며, 총사령부 소속 장교 56명 중 한인장교가 불과 13명인데 중국인 장교는 43명에 달하고 각 지대에도 중국인 장교를 임명·배치했다.
 
광복군이 장개적의 중국군의 지휘를 받는 예하부대로 위상을 갖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총사령부 기구도 종전의 10개 참모부서에서 참모·총무·정훈처 등 3개 부서로 축소, 개편되었다.

그러던 중 1942년 4월 20일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부사령제를 신설하여 부사령에 김원봉을 임명했다.
 
조선의용대가 제1지대로 개편됨으로써 종전의 제1·2·5지대는 통·폐합되어 제2지대로 개편되고, 이범석이 지대장에 임명되었다.
 
제2지대는 시안에 본부를 두고 산시성(陝西省), 허난성 등지에서 활동했다. 이무렵 푸양[阜陽]에 특파된 김학규가 제3지대를 창설, 광복군은 모두 3개 지대로 재편되었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했어도 개편된 광복군은 1942년 10월을 전후해 병력이 제1·2지대 270여 명, 제3지대는 70명 내외였다.
 
광복군은 화북이나 만주의 항일무장세력처럼 독자의 강령, 즉 운동노선을 갖고 있지는 않았으나, 중국관내의 통합된 독립운동세력인 임정의 무장세력이었던만큼 임정의 운동노선이 곧 광복군의 운동노선의 상징성은 있었다.
 
광복군은 처음으로 1943~44년 본격적인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는 한인청년을 받아들였다.
 
이들 한인청년의 대부분은 광복군 제3지대 김학규 지대장의 지휘하에 중국 제10전구 사령부에 부설된 중앙군관학교 제10분교 한광반에 입교하여 광복군의 간부로 양성되었다.
 
한편 제2차대전 말기 광복군이 가장 힘을 기울인 것은 일본 격퇴를 위한 미국과의 합동작전이었다.
 
1945년 3월 15일 제6징모분처 주임 김학규는 쿤밍[昆明]의 미군 제14항공대 사령관이며 미국전략사무국의 최고책임자인 센놀트(Claire L. Chennault)와 협의, 공동작전을 위한 6개항에 합의했다.
 
미국전략사무국에서는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광복군에 편입된 학생들을 중심으로 특수공작교육을 실시, 이들을 국내에 투입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945년 4월부터 이들은 중국의 시안과 푸양에서 훈련에 들어갔으나, 곧이은 일제의 항복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의 해방은 광복군의 역할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제2차세계대전 승리와 이승만 박사의 대미외교력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할 수 있었다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다.
 
조선의용대가 합류했어도 고작 300여명으로 전투부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었으며 그나마 전쟁말 미국의 특수공작의 선봉대 역할을 할뻔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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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준  dugsum@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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