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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 보게 되는 신라의 對日 외교전략 - 석우로와 김춘추
고성혁 | 승인 2016.01.22 16:50
태종무열왕 김춘추.사진@자유경제원
1. 삼국사기에 가장 많은 침략기록을 남긴 왜인(倭人)
 
[고성혁 역사안보포럼 대표]'삼국사기'엔 신라 건국 초기 박혁거세때부터 일본[倭(왜)]와의 관계가 나온다. 이 책엔 박혁거세 8년(서기전 50) 倭人(왜인)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가 거룩한 덕을 지니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되돌아 갔다’라고 적혀있다. 그로부터 지속적으로 倭人(왜인)은 신라변경을 침략했다. 유례이사금(신라 14대 왕)때는 상황이 심각했다. 유례이사금 4년(287) 여름에 왜인이 一禮部(일례부)를 습격, 불질러 태우고는 백성 1000명을 붙잡아 갔고, 2년 후인 유례이사금 6년(289) 여름에는 倭의 군사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배와 노를 수리하고 갑옷과 무기를 손질했다고 되어 있다.
 
기록에 보면 왜인이 쳐들어 온다는 소문에 백성들이 산으로 도망갔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게 倭人에 시달리자 倭에 대한 정벌계획 기록도 나온다. 유례이사금 12년(295) 봄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왜인이 자주 우리의 성읍(城邑)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가 없다. 나는 백제와 꾀하여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에 들어가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이에 홍권(弘權)이 대답했다. “우리나라 사람은 물에서의 싸움은 익숙하지 않은데,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까지 가서 정벌한다면 뜻하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또한 함께 도모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자 왕이 ‘옳다’고 했다. 결국 倭人 정벌계획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그때부터 倭人의 군사력은 만만한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2. 任那日本部(임나일본부)의 모티브가 된 昔于老(석우로) 이야기

신라 王은 朴-昔-金씨로 이어졌다. 그 중에서 석탈해(昔脫解) 계열의 昔씨는 참 특이하다. 그 출신지가 용성국(龍成國)으로 되어 있는데 위치가 일본쪽이다. 그만큼 고대엔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관계가 밀접했다는 반증(反證)이기도 하다. 특히 석탈해의 후손인 ‘석우로(昔于老) 이야기’는 매우 극적이다. 韓-日간 갈등의 원형질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또한 석우로 이야기는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의 신공왕후이야기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석우로는 내해 이사금의 아들이다. 사촌인 조분왕(230∼247) 때 왜인, 백제, 고구려와 싸워 큰 공을 세운 뛰어난 장군이었다. 《삼국사기》 열전 편에서 그와 그의 아내 이야기가 나온다.
 
245년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입해와 나가 쳤으나 이기지 못해 물러나 마두책을 지켰는데 밤이 되자 士卒들이 추위에 괴로워했다. 우로는 몸소 돌아다니면서 위로하고 손수 땔감을 태워 덥혀주니 무리가 마음으로 감격해 솜옷을 입은 듯이 따뜻해했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비극적이다.
 
친동생 첨해왕이 왕으로 있던 253년 왜국 사신(使臣)이 객관(客官)에 있을 때 우로가 접대하면서 그와 농담하기를 “조만간 당신네 왕을 소금 굽는 종으로 만들고, 왕비는 밥 짓는 부엌데기로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倭王(왜왕)이 그 말을 듣고 노해 병사를 보내 신라를 치니, 대왕은 궁궐을 나갔다. 우로가 아뢰기를 “오늘 이 환란은 제가 말을 삼가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라고 했다. 마침내 倭의 軍營(군영)에 가서 이르기를 “지난 번의 말은 농담이었을 뿐이니 어찌 군사를 일으켜 이 지경에 이를 것을 생각했겠는가”라고 했다. 왜인들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잡아 섶더미에 올려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가버렸다. 이때 우로의 아들은 어리고 약해 걷지 못했으므로 다른 사람이 안아 말에 태워 돌아왔는데 뒷날 흘해이사금(신라 16대 왕)이 되었다.
 
힘이 약해 신라가 아무 대응도 못하자 우로의 아내가 나선다.
 
미추왕(신라 13대 왕) 때 倭國 대신이 방문했는데 우로의 아내가 국왕에게 부탁해 倭의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하게 되었다. 그가 흠뻑 취하자 장사를 시켜 끌어내 불태워 지난 날의 원수를 갚았다. 倭人들이 분하게 여겨 몰려와 금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일본 《書記(서기)》에는 석우로 아내의 복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나온다. 우로의 아내는 남편이 매장된 곳을 알고 있는 왜인에게 접근해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우로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곳을 말해 준다면 반드시 후하게 사례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대의 아내가 되겠습니다.” 복수의 칼을 갈았던 그녀는 남편의 시신을 찾기 위해 증오를 감추고 왜인에게 몸을 허락했다. 왜인은 속이는 말을 참말로 듣고 시신이 묻힌 곳을 몰래 가르쳐 주고 말았다. 즉석에서 우로의 아내는 신라의 병사와 협의하여 왜인 사절단을 죽이고 왕(注: 석우로)의 시신을 찾아내어 다른 곳에 장사했다고 한다. 倭國 사신이 죽자 신라는 석우로의 아내를 처형하고 그 시신을 왜군에게 넘겼다.
 
이 석우로 이야기는 일본 신공왕후의 신라 정벌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었다. 사실 석씨 세력은 후에 김알지의 金氏세력에 쫓겨나 신라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어찌보면 비운의 세력이라고 볼 수도 있다. 군사외교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외교의 결례가 빚어낸 비극이기도 했다.

3. 신라의 對日외교의 방식
 
그러다가 신라는 진흥왕때부터 신라가 나라를 재편성하면서부터 倭人의 침략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없어지기 시작했다. 신라가 가야를 倂合(병합)하고 이사부 장군의 주도 하에 艦船(함선)을 만드는 부서를 들 만큼 바다에 신경쓰기 시작했다. 이사부 장군 때 울릉도가 신라에 복속되었다. 신라가 본격적으로 바다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외교로 백제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백제의 友邦國이던 일본이 신라ㆍ백제 간의 전쟁에서 실질적으로 中立을 유지토록 한 것은 김춘추 외교의 승리였다. 신라 입장에선 대단한 성공이었다. 신라의 후방이 일본의 공격에 노출되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기조는 羅唐전쟁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문무대왕의 무덤은 감포 앞바다의 수중릉(대왕암)이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죽어서도 동해의 龍이 되겠다는 유언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신라는 일본에 대한 대비를 했던 것이다.
 
신라는 삼국 통일 후 對日관계 개선에 나섰다. 기존의 低(저)자세 외교에서 벗어나 동등한 외교로 전환한 것이다. 그 배경엔 군사ㆍ경제적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는 일본의 외교사절을 추방하는 일도 있었다. 반대로 일본도 신라의 사절단을 거부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통일신라 전성기동안 일본과는 매우 평화로운 시대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 바탕은 통일신라의 군사 외교ㆍ경제적 풍요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그만큼 국익을 위해 때로는 저자세 외교로, 때로는 强硬(강경)외교를 번갈아가며 구사했다.

4. 일본의 군사력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보다 한 수 위였다.

신라 문무왕 때라면 신라의 군사력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무덤을 동해바다에 만들 정도로 일본을 경계했다. 달리 말하면 일본의 군사력이 그만큼 강했다는 반증이다. 광개토대왕 비문(碑文)에도 일본(倭)이 등장한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정벌하려는 이유도 일본 때문이었다. 이 비문엔 與倭和通(여왜화통)이라고 적혀있다. 백제 왕이 고구려와의 약속을 어기고 일본(倭)와 통교했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騎ㆍ步兵(기ㆍ보병) 5만을 급파했던 것도 일본이 신라를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군사적 측면에서 보자면 일본은 한반도에 비해 항상 군사적 優位(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해군력은 실질적으로 세계 2위로 추정하고 있다. 원자력 항모나 원자력추진 잠수함만 없을 뿐이지 재래식 전력으로만 한다면 미국 다음의 해군력을 자랑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해군력은 일본의 1/4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돈이다. 준비가 다 되어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문제는 심각해 진다.
 
5. 동아시아 최대의 평화 번영 시기였던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만큼 동아시아가 평화롭고 번영을 구가했던 시기도 없었다. 같은 시기 일본은 헤이안(平安)시대로서 794년 간무천황[桓武天皇]이 헤이안[平安]으로 천도한 이후부터 가마쿠라 막부(幕府)를 개설되기 전까지의 시기다. 양국은 공동의 번영을 구가했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 경주에는 황금으로 치장한 대저택이 무려 38채나 있었고 집집마다 숯으로 밥을 지어 연기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신라의 국론이 통일되고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은 같은 민주주의 국가로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서방세계의 핵심적 국가다. 중국의 팽창에 맞서려면 한-미-일 삼각동맹이 굳건해야 한다. 한-일간의 공동번영은 지난 40년의 결과였다. 동아시아의 번영은 과거 통일신라와 일본처럼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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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혁  sdkoh40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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