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수 푸른한국닷컴 칼럼위원]

주문도 하지 않은 택배 꾸러미가 쉼 없이 집 앞에 쌓인다면 누군들 성질이 안 날까. 신문 사이에 끼어있는 ‘광고 전단지’만 해도 짜증을 넘어 이골이 날정도가 되면 무덤덤 하다가도 없으면 간혹 기다려질 때도 있다.

집에 배달되는 것 말고도 차 문 틈에 끼어 넣어 창문을 고장 내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전봇대, 게시판 등 약간의 공간도 놓치지 않는 치밀함, 꺼내는 수고를 덜도록 가시는 걸음마다 사뿐히 즈려 밟게 길바닥에 보폭만치 붙여놓는 친절함 등 전단지 배포 수법이 악랄하고 교묘하다. 어쨌건 10년 정도는 부대껴야 무디어진다.

그러나 , ‘삐라’라고 한다면 그 이름이야 2차 대전 중에 일본에서 따온 말이라지만 보통의 전단지 느낌과는 천앙지차다. 공산주의 프락치나 빨갱이 연결어가 되어 살벌, 스산하다.

TV에서 ‘삐라’하는 소리에 느닷없이 둔기로 한방 머리를 얻어맞은 멍한 기분이다. 무의식 속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40 년 전의 망각을 헤집다 보면 개구리 소년들 같이 산을 헤매던 ‘ 삐라의 추억’이 스멀스멀 밀려온다.

아침을 지체할 수 없었다. 밥을 굶더라도 당번보다 일찍 길을 나서야지, 북풍이 분 다음날이면 여지없이 운동장이며 뒷산에는 낙엽이 쌓인 자리마다 소복이 삐라가 떨어져 있었다. 남들보다 먼저 이를 낚아채는 손맛이란 두려움 속에 수박 서리할 때의 짜릿함이랄까.

주섬주섬 장수를 셀 겨를도 없이 교실로 뛰어가 선생님께 제출하면 교실 벽에 붙은 그래프에는 빨간 줄로 긴 막대가 자랑스럽게 올라간다. 이건 포인트다. 점수에 따라 공책을 쥐어줬으니.

군에서도 삐라수거는 휴가와 결부되었다. 야산의 가시덤불까지 철저히 뒤지다 보면 비 맞고 찢어진 놈도 있고 반 쯤 잘린 놈도 있다. 정성스럽게 다림질까지 해서 소대장님께 제출하면 월 단위 포상이 나온다. 재주 좋은 이상병은 연타석으로 휴가를 가지만 보통 말년 병장이나 말단 후임병에게 선물로 몰아주게 된다.

어릴 때나 커서나 공통점은 삐라의 내용엔 별 관심이 없었고 공포스러움만 있었다. 북괴가 날조한 문구가 투철한 반공정신을 물들일 것 같아 오래 들여다보면 괜히 찝찝했다. 누가 내 사상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주머니에 머물고 있는 시간이 조마조마 했다.

삐라가 심리전,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라 할 수 있을까? 했는데 북한이 저렇게 길길이 날뛰는 걸 보면 소리 없는 폭탄이 맞나보다. 일본을 손들게 한 원폭이 B-29로 4,000kg 씩 퍼부었듯, 6.25전쟁에서는 ‘삐라에 파묻게 하라’는 지시에 따라 B-29로 종이폭탄을 쏟아 부었다니 삐라의 위력, 심리전에 놀랄 만하다.

이보다 앞서 BC 202년, 초한(楚漢)의 마지막 전투에서 해하(垓河)에 포위된 항우의 군대를 멸망시킨 것은 밤중에 울려 퍼진 초나라 노래 가락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졌기 때문이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한의 장수 한신이 연(鳶)을 이용, 몸이 왜소한 장량(張良)을 태우고 피리를 불게 했다니 삐라의 원조는 연을 이용한 음악소리, 사면초가(四面楚歌)였다. 쉽게 전쟁을 포기하게 만들어 버린 심리전 효과가 예나 지금이나 원폭의 그것과 진배없다.

포위된 성 안에서 고립된 상황을 지원군에게 알리기 위한 통신수단으로 연을 날린 경우도 있다. 적의 배치상황과 함께 지원요청 쪽지에 “3일내 포위를 풀지 못 하면 곧 적의 먹이가 될 것이다(3日不解 臨名士且爲悅食)”라고 쓴 내용을 보고 지원군이 포위망을 풀고 성을 되찾았다는 중국의 고사가 있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도 반란군 '비담'과 '염종'을 제압하려 하였으나 선덕여왕이 승하하고 별똥별이 떨어지자 국운이 다했다는 유언비어 때문에 진압군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이에 김유신이 연에다 뼛가루를 발라 밤에 반짝거리게 하고 불을 붙인 연을 날리자 별똥별이 다시 상승하는 것을 본 진압군이 사기충천하여 반란군을 제압한 역심리전 사례도 있다.

심리전이란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 수단을 이용하여 적군을 상대로 선전활동을 벌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쉽게 말해서, 적의 전의(戰意)를 떨어뜨려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이다. 전의 상실 즉, 겁을 먹으면 싸울 수 없다. 아(我)에게 유리하고 적(敵)에게 불리한 입장에서 전투를 벌임으로써 최소의 피해로 승리하게 한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친다면 모든 분야가 심리전의 한 부분으로 확대된다.

풍선에 실은 삐라에 북한군은 겁을 잔뜩 먹었다. 임진각을 타격하겠다는 강한 어조는 겁에 질린 허풍이다. 연은 ‘풍쟁(風箏)’이라고도 한다. 초창기 중국에서 연에 매단 호루라기에서 나는 바람에 실려 온 아쟁소리, 그것은 항우를 울린 초가(楚歌)였고 귀를 막아도 소용없는 그리스 신화 속의 요정 ‘사이렌’의 노래처럼, 풍선에 날아간 삐라는 김정은을 울리는 연가(戀歌)로, 북한 인민을 일깨우는 진군가(進軍歌)가 되어 그들은 잠을 잘 수가 없다. 귀를 막아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플 것이다.

삐라와 함께 날아간 것은 약간의 양말 , 치약, 칫솔 등의 생활필수품과 중국 돈 1위안, 혹은 1달라다. 1달라면 북한주민 한 달 월급 수준이다. 라디오나 DVD도 보낸다. 정겨운 북한 말투로 북한의 진실, 남한의 실정을 전해준다. 날조된 사회에서 진실의 파급효과는 무섭다. 북한 지도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진실의 폭로다. 북한은 이미 자의적으로 사면초가다.

그 벽이 하나 둘 깨지고 있지만 버틸 만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공중으로 날아가는 삐라를 막을 방법은 없다. 북한사회가 뿌리 째 흔들리고 있다. 둘러 싼 유리벽이 일시에 허물어 질 위기에 처해 있다. 공중을 파고든 삐라의 위력은 숨 쉬는 공기처럼 북한 인민의 폐부 깊숙이 빨려 들어가 자유의 맛을 전신에 전파하고 있다.

2차 대전에는 통틀어 전단 80억 장이 뿌려졌다. “적을 삐라로 묻어라!” 이것은 한국전의 심리전 슬로건이다. 한국전에서는 40억 장을 뿌렸다. 지구 열여섯 번을 덮을 양이다. 효과도 좋았다. 항복한 포로의 33.1%가 삐라의 영향이라고 한다. 삐라는 탈북귀순자의 안전보장 증명서였고 북한의 허구를 폭로하여 사기를 극도로 저하시켰다. 중공군을 상대로 한 삐라 중에는 “중국법이 바뀌어 2년 내에 돌아오지 않으면 아내가 재혼한다.”라고 선전했으니 남의 나라 싸움에 내 마누라 도둑맞는구나 생각하고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대북풍선단의 이민복 단장은 삐라가 “가장 안전하고 평화적 수단”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김정은 군대가 저렇게 돌아버린(?) 걸 보면 평화적 수단이라는 건 우리 생각이다. 우리가 실감하지 못한 사이, 실포탄보다 무서운 종이폭탄이 폐쇄국가를 뒤흔들고 있다. 2001년부터 지난 10년간 민간단체에서 2억장을 날렸으니 대단하다.

그들이 직접 만든 삐라는 탈북자로서 북의 실상을 너무나 잘 알고, 용어선택이나 지역 구석구석 상세히 설명하여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발 없는 말이 천리로 퍼지고 반응이 뜨겁다고 최근 탈북한 사람들이 입을 모은다. 이것이 북한 지도부에게는 눈에 가시다. 임수경이나 이석기 , 최근 뉴페이스 김광진, 니네들 뭐하냐? 변절자들이 저렇게 판을 치고 있는데 가서 뜯어말려야지, 아직 지령을 못 받았나?

무엇보다 북한의 취약점인 세습적인 수령숭배, 혁명주의, 선군주의 3가지를 중점적으로 물고 늘어지니 북으로서도 두 손 든 상황이다. 아니, 고무풍선에 놀라 대포 쏜다면 세계가 놀라지 않겠는가? 지금 이런 미친 상황이 평양에서 일어나고 있다.

북한 주민 몇 사람이 바람에 날아 온 종이쪽지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 하는 정도가 아니라, 북한 지도부의 신경을 마비시키고 북한 독제체제의 중추를 무너뜨리고 있는 중이다. 심기가 불편함을 드러낸 자체는 심리전에 말려든 것이요 심리전에서 패배하였음을 말함이다.

단지, 일방적 수세에 몰린 쥐가 죽기 살기로 덤벼들 수 있다. 이를 경계한다고 수세적 작전으로 가기보다 작전의 전환으로 가야 한다. 북한군도 올 봄까지 삐라를 뿌렸다. 사이버 상에서의 심리전은 극도로 공격적이다. 그들의 엄포에 굴복한다면 우세한 주도권을 포기하는 것, 결국 우리가 심리전에 진 꼴이 된다. 허풍도 심리전이니까. 우리 주민들의 불안감을 덜어주기 위하여 작전을 일부 변경하는 것이다.

“삐라는 차삐라!(빼버려라), 대신 위문품(confort kits)위주로 보내라!”

상표만으로도 그 효과를 볼 것이고 삐라를 없애라는 북한의 주장도 사라질 것이다. 저들이 삐라 때문에 골머리 앓는 것 같지만 실은 집집마다 삐라 잡기에 혈안이 됐다. 판문점 앞에서 조난어부들이 북송되는 순간, 그동안 애지중지하던 선물 받은 방한복을 벗어 던지던 이중적 태도를 보지 않았던가?

심지어 북한 지도층마저 밤이면 주문하지도 않은 택배, ‘로또풍선’을 기다리고 있다. 어렸을 적 삐라를 줍던 마음처럼 밤이면 빈 하늘을 습관적으로 바라본다. 상품만 보내면 너무 얄팍한 방법이라고?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고무풍선보다는 재질이 약간 우수한 풍선으로 날리면 재활용해서 장량(張良)처럼 체구가 작은 북한 주민들이 하나, 둘 풍선을 타고 공중 길로 넘어 오게 하는 것, 북풍을 타고 오다가 적당한 지점에서 매달아 논 호루라기로 신호를 보내면 구출해줄 수도 있고. 웃기지 말라고?

민간단체에서 “싸이 옵(Psyop. =Psychological operation : 심리전)”으로 사면초가인 북한을 강타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국제가수 ‘싸이’는 세계를 주름잡고 있다. 군대 두 번 갔다 오더니 심리전 박사가 되었구나. 구슬픈 곡조도 아닌 우스꽝스런 말 춤으로 세계를 마비시킨 걸 보면, 웃기는 북한 김정은과 멋진 파트너가 될 만한데!

반기문 총장님, 싸이와 계약한 스쿠터 씨! 그룹 <싸이 & 싸이코> 어때요? 세계평화와 돈벌이를 위한 최적의 결합아닌가요?

둘이 갈 데까지 한 번 가보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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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수  harubang3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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