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춘 푸른한국닷컴 칼럼니스트]

「실재하는 것은 합리적이다.」라는 말은 헤겔의 명제로 잘못된 사회적 약속이 형성되고 통용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중세유럽의 천동설이 그러하고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러하고 좌익〓종북세력이라는 등식이 그러하다. 이면을 보지 못하고. 배경을 알지 못하면서 속단하거나 지레 짐작하는 것으로 A를 전혀 성질이 다른 B로 간주하는 범주오류가 대표적이다.

역사에는 아이러니가 많다. 나는 이것을「역사의 모순」이나 「세계의 대치」로 이해하지만, 이 모순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거나 올바르게 성격파악을 하지 못하면 갈등의 해소는커녕 오히려 대립만 더욱 부추긴다.

「실재하는 것이 합리적이다.」라는 궤변은 그동안 숱하게 우리의 사고구조를 왜곡시키고 행동에 제약을 가했다. 이에 아래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 악명(惡名)을 밝히고 우리나라 현존의 가치체계를 비판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 세조를 중국 초나라 회왕을 죽인 항우에 비유한 조의제문을 지어 무오사화의 단초를 제공한 김종직은 조선 10대 임금 성종에게 경연에서「성삼문이나 박팽년은 충신입니다. 불행히도 그런 경우가 다시 생긴다면 신 또한 전하를 위해 성삼문이나 박팽년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성종은 세조의 큰 아들인 의경세자의 의 둘째 아를로 세조는 할아버지이다. 이 말을 들은 성종의 심사는 어떠했을까? 김종직의 말대로라면 할아버지 세조는 찬탈자이고 자신은 충신을 얻게 된다. 정체성 상실과 정통성 학립을 동시에 겪게 되고, 충과 효가 충돌한다.

두 번째는 오늘날 문명충돌론의 단서라 할 수 있는 중세유럽의 십자군 원정이다. 그때 벌써 십자군에 지원하면 죄가 사해진다는 교황의 강론이 있었다.

십자군은 신과 그리스도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므로 죽어도 영광이고 순교자가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십자군 측에서야 순교자가 넘쳐났다고 기록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에 맞서 싸우는 이슬람군편의 기록에도 순교자가 넘쳐났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는 이것을 거룩한 전쟁으로 보지 않는다. 「가상의 악」을 악으로 제압하려 했었고, 그들은 무고한 전사자일 뿐이고 희생자라는 것이다.

세 번째로 현재 중국 당국의 공식입장으로 농민의 계급투쟁이었으며, 홍수전은 위대한 혁명가라는 것. 대륙에서나 대만에서 국부라 추앙받는 혁명가 손문이 홍수전의 대동사상을 높이 평가하고 스스로를 제2의 홍수전이라 부를 정도의 태평천국의 난에서, 태평천국군은 남경에 입성하기 전 무창 점령 후 거리거리 곳곳에 포고문을 붙였는데「20세 이하의 여자는 모두 천왕의 미녀선발에 나와라. 나오지 않으면 죽인다.」는 내용이다.

타도하려는 청나라 황제의 비빈선발보다도 오싹한 내용이다. 어떻게 천조(天朝)의 왕이 미녀를 탐하는가? 권력은 가재와 게란 말인가?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인간이 직립보행을 한 이래 많은 신념이나 가치체계가 있었지만 대부분 무너지고 흩어졌다. 금인 줄 알았으나 대개는 반짝이는 모래였으니 무너지고 흩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정통왕조냐 참칭이냐의 차이가 인의(仁義)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힘과 연수(年數)가 기준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지고라 알고 있고 불변이라 알고 있는 신념이나 가치관도 한 때의 득세(得勢)에 좌우되며 이해의 산물에 지나지 않고 어떤 것은 필요에 따라 첨가되거나 배제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도덕적으로나 규범적으로 인정되고 수용되는 것들이 보편적인 것들이 아니라 지배계급(기득권자. 주류)이 그들의 지배를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한 결과물임도 분명해 졌고 금과옥조(金科玉條)가 아니라는 결론도 얻을 수 있다.

또한 모든 가치기준은 시대정신에 눈을 감거나 보편성을 외면할수록 생명이 짧고, 절대적이고 완강한 것일수록 도태되기 쉽다는 것도 수긍하게 된다.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은 본래로 수렴되고 복귀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말에서는 당장의 불만족에 대한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타고난 교조주의가 있는 것이 아니니 자신을 절대화하면 교조주의자이고, 타고난 보편주의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상대화하면 보편주의자인 것이다. 애초부터 통약불가능성 (원천적 소통불능)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역사는 교조주의자들의 생명은 짧고 보편주의자들의 생명은 길었다고 말한다. 만물은 이(理)의 전개양상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그렇게 선하지도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다. 헤겔은 명제를 던졌지만 그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고. 고뇌하는 빛은 더욱 역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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