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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20. 제4기(1593. 6. - 1596.) : 제2차 진주성전투와 임진왜란의 종료③
박희봉 | 승인 2021.07.11 23:33
9일 간의 전투
 
[박희봉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6월 15일 가토 기요마사를 선봉으로 9만 3천명의 일본군이 경상도 남해안에 있는 주둔지로부터 진주성으로 몰려왔다. 일본군 선봉이 6월 16일 함안에 도착하였다. 함안에 주둔하고 있는 이빈, 권율, 선거이 등의 조선관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물러났다.

6월 18일 일본군이 함안으로부터 바로 정암나루로 건너왔을 때, 곽재우는 형세의 불리함을 인정하고 물러났다. 6월 19일 일본군은 진주를 향해 진출하면서 삼가, 단성, 공양, 사천 등에서 진주로 오는 길을 차단하였다. 조선군이 진주성 후원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따라 선거이와 홍계남이 관군을 이끌고 진주성에 도착하여 “(적은) 많고 (아군은) 적음이 서로 현격한 차가 있으니 물러가 보전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말하였고, 이에 김천일은 이를 꾸짖고 진주성 수성의지를 밝혔다. 따라서 선거이와 홍계남은 군사를 이끌고 진주성에서 함양으로 물러났다.

6월 21일 일본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였다. 이 날 고성 의병장 최강, 이달이 진주로 구원을 갔으나 일본군의 군세에 눌려 다시 고성으로 돌아왔다. 또한 명나라 이여송이 낙상지, 송대빈, 유정, 오유충 등에게 진주성을 구원하게 하였으나 모두 군사의 세력이 대적할만 하지 못하다는 핑계로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 날 일본군은 진주성을 공격하지 않았다.

6월 22일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진주성 북서면의 해자를 터뜨려 물을 남강으로 흘려보냈고, 해자가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흙과 모래로 해자를 메워 큰 길을 만들었다. 조선군 및 의병은 각자 맡은 장소에서 진을 치고 일본군을 기다렸다.

일본군의 첫 공격을 맞아 진주성 수성군은 일본군 30여명을 쏘아 죽였고, 일본군이 물러났다. 초저녁에 일본군이 대규모 병력으로 몰려와 격렬한 전투를 치르다 여의치 못하자 이경(밤 9시-11시)에 물러갔고, 삼경(밤 11시-새벽 1시)에 또 왔다가 오경(새벽 3시-5시)에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갔다.

6월 23일 하루 종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주간에 3회의 전투를 벌였고, 야간에 4회의 교전을 치렀다. 성을 점령하기 위해 성벽을 오르는 일본군의 사상자가 엄청나게 발생했음은 물론이다. 6월 24일 전투는 없었다.

일본군의 사상자가 많이 나자 일본군 지휘부가 성을 점령하기 위한 새로운 방안을 연구한 듯 하다. 또한 더 많은 일본군이 충원되어 마현과 그 동편에 진을 쳤다.

6월 25일 일본군이 동문 밖에 흙을 쌓아 큰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흙집을 짓고서 성안을 내려다보면서 총을 쏘았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황진이 성안에 흙과 돌을 날라와 높은 언덕을 마주 쌓았다. 황진이 초저녁 때부터 옷을 벗고 친히 돌을 져 나르자 남·녀 성민들이 자원하여 밤을 새워 작업을 마쳤다.

그리고 성안에서 현자포를 발사하여 적의 굴을 부셨다. 이에 일본군도 다시 흙 언덕을 다시 쌓기를 반복했다. 이 날 일본군은 주간에 세 번, 야간에 네 번 공격하였고, 조선군은 이를 모두 물리쳤다.

6월 26일 일본군은 성을 허무는 작전을 구사했다. 일본군은 큰 나무궤짝을 짜고, 소의 생가죽을 나무궤짝 겉면에 씌운 기구를 만들었고, 그 안에 군사들이 들어가 조선군의 탄환 및 화살공격을 막으면서 성벽에 접근하여 성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군은 동문 밖에 큰 나무를 세우고 그 위에 망루를 만들어 진주성내에 불을 던지고 총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진주성 내 초기집들이 일시에 연소하였다.

조선군은 성안에서 황진은 큰 돌을 굴려 내리고 화살공격을 함으로써 성을 허무는 작업을 하던 일본군을 공격했다. 또한 일본군의 나무 망루는 대포로 격파했다. 그때 큰 비가 내려서 일순간 전투가 소강상태를 이루자 일본군이 성중에 “대국의 군사도 항복하였는데 너희 나라가 감히 항거하느냐”는 전단을 던져 항복을 권유했다.

성중에 있던 조선군은 “우리나라는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울 뿐이다. 더구나 명나라 군사 30만 명이 지금 곧 추격하여 너희들을 남김없이 무찌를 것이다”라고 하답하였다. 이날 주간에 3회, 야간에 4회의 전투를 치렀고, 조선군이 모든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6월 27일 일본군은 하루 종일 공격하였고, 조선군은 이를 물리쳤으나 그 과정에서 조선군의 피해도 늘어났다. 일본군은 조선군이 성 위에서의 공격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새로운 무기를 고안하여 성벽을 허물려고 하였다. 일본군은 큰 나무궤짝으로 철갑차를 고안하였다.

이 철갑차는 나무궤짝에 바퀴를 달아 그 속에 군사들이 들어가 바퀴를 전방으로 돌려 전진하고, 후진할 때는 차의 뒷부분에 연결된 줄을 후방에 숨어있는 병사가 끌어당기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이 철갑차 안에는 쇠 갑옷으로 무장한 일본군 수십 명이 있었고, 이들은 성벽 밑에 와서 쇠 송곳으로 성을 뚫었다.

조선군은 기름을 부은 풀더미를 만들어 일본군을 태워 죽였다. 다른 한편에서 일본군은 동·서쪽의 두 성문 밖에다 다섯 개의 흙 언덕을 쌓아 올리고 이를 연결하여 방책을 만들어 성중을 굽어보며 끊임없이 총탄을 발사하였다. 이러한 일본군의 전방위 공격으로 조선군도 3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6월 28일 새벽 일본군은 서문을 집중 공격했다. 날이 샐 무렵 이종인이 지키고 있던 성첩으로 돌아오니 일본군이 몰래 성을 뚫어놓아 곧 무너지게 되었다. 일본군이 성 아래로 육박해 왔고, 조선군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의 피해가 엄청나게 발생했다.

전무가 잠시 소강상태를 이루자 황진이 성 밑을 굽어보면서 “오늘 싸움에 죽은 매우 많아서 천여 명은 되겠다”고 하는 도중 일본군이 성 밑에 엎드려 있다가 황진을 향해 총을 쏘았다. 탄환이 나무판자에 빗맞고 튀어서 황진의 왼쪽 이마에 명중했고, 이에 황진이 전사했다.

6월 29일 미시(오후 1시-3시)에 동문에 있는 성이 비로 인하여 무너졌다. 일본군이 무너진 성벽으로 몰려왔다. 이종인이 호위병들과 더불어 활과 화살을 버리고 창과 칼을 들고 일본군과 백병전을 치른 끝에 물리쳤다. 죽은 일본군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일본군들이 다시 무너진 성벽 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공격했고, 창의군(창의사 김천일의 군사)이 지키던 곳이 일본군에 먼저 무너졌다. 결국 일본군이 성에 올라왔고, 일본군은 진주성 내로 사방에서 몰려들어와 조선군과 백병전이 벌어졌다.

순성장 장윤이 탄환에 맞아 전사했고, 이종인도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조선군은 촉석루로 내몰렸고, 김천일은 “나는 마땅히 여기에서 죽어야 한다”하고 남강에 몸을 던졌고 최경회도 전사했다. 이로써 진주성이 함락됐으며, 5,800명의 조선군은 대부분이 전사했다.
 
전투 결과
 
2차 진주성전투는 조선관군과 의병 6,000명의 병력으로 일본군 9만 여명을 상대한 혈전이었다. 전투는 1593년 6월 21일에 시작되어 29일까지 9일간 지속되었다. 21일 첫날은 실질적인 교전이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8일 동안 내내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 9만 여명의 병력이 총 25회 이상 진주성을 공격하였고, 진주성에 있던 조선관군과 의병은 29일 마지막 전투에서 동문이 무너지기까지 대단한 결집력을 보이며,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특히 6월 23일, 25일 26일에는 모두 1일 당 6~7회의 교전을 모두 버텨냈다. 전투 8일째 되는 날, 성벽이 무너진 까닭에 진주성이 함락된 것이다. 만일 비로 인해 성벽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조선군은 진주성을 더 사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진주성 함락 후 일본군은 진주성에 있던 모든 조선인을 참살하고, 진주목사 서예원과 최경회 등의 목을 도요토미 히데요시 앞에 가져다 바치며 진주성전투 승전을 선언했다.1) 그러나 일본군의 손실은 그 보다 더 컸다. < 표 >는 진주대첩과 2차 진주성전투의 전투 참여 병력, 전투기간, 교전 횟수를 비교한 것이다.

진주대첩에 비해 훨씬 많은 적(1차 30,000명 추정, 2차 93,000명)을 상대로, 두 배의 전투 기간 동안(1차 4일, 2차 8일), 두 배가 넘는 교전(1차 10회 교전, 2차 25회 교전)을 치렀다. 2) 이러한 전투상황을 비교하여 일본군의 사망자를 계산해 볼 수 있다. 진주대첩에 비해 조선군이 1.5배 참여하였고, 교전횟수가 2.5배인 것만을 감안하면, 2차 진주성전투에서 일본군은 최소 3만 8,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표 > 진주대첩과 2차 진주성전투의 전투 상황 비교.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2차 진주성전투 역시 일본군의 승리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5,800명이 지키고 있는 성에 9만 3,000명이 공격했을 때 전투가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성이 함락당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2차 진주성전투를 이끈 의병장 김천일과 최경회, 서예원 등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의병 무두는 이 운명적 전투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주성을 사수한 것이다.

함락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참전하였고, 전투결과가 예정대로 나온 패전이라고 기록되어서는 안 된다. 3) 2차 진주성 전투의 25차례 교전에서 조선관군과 의병은 24차례의 승리를 거두었고, 일본군은 마지막 1차례의 승리를 했을 뿐이다.
 
제2차 진주성전투 이후 일본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대로 일본군은 진주성을 점령하여 조선군과 백성 모두를 한명도 빠짐없이 사살하고, 진주성을 허물어 평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전라도로 출진하였다. 일본군은 7월 2일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구례까지 진출을 하여 고부군수 왕경조와 전판관 노종령 등과 작은 전투를 벌인 끝에 구례를 점령했다.

그리고 구례에서 남원으로 물러난 낙상지와 송데빈이 이끄는 명군과 남원성에서 전투를 벌였고, 명군이 퇴각했다. 7월 7일 일본군 수천 병이 성수령을 넘어 이빈과 홍계남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전투를 벌였고, 조선군은 퇴각했다.

송대빈이 이끄는 명군이 두골봉에 매복하였다가 일본군을 물리쳤으며, 낙상지와 사대부 등이 길을 나누어 일본군을 쫓으니 일본군은 순자강을 건너 퇴각했고, 송대빈은 군사를 이끌고 남원을 지켰다.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대로 전라도에 진출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소수의 병력만으로 진격하였고, 조선군과 명군의 대응이 있자 바로 전라도 진격을 포기하고 부산지역으로 퇴각하였다. 4) 그리고 일본군은 더 이상의 전투를 멈추고 임진왜란 종전을 위해 명군과 화의협상을 서둘렀다.

만일 일본군이 2차 진주성전투 이후 전투력이 보전되었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적극적으로 전라도 진출을 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이 소수의 병력만을 구례와 남원에 출진시킨 것은 일본군의 전투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군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3만여명의 사망자를 내는 등 엄청난 손실을 겪음으로써 전라도를 공격할 전투력이 없었던 것이다.5) 한마디로 2차 진주성 전투로 인해 일본군은 실질적인 전투력을 상실했고, 사실상의 임진왜란은 종료된 것이다.
 
제2차 진주성전투 이후 임진왜란 종료와 정유재란
 
1593년 6월 2차 진주성전투 이후 조·명연합군과 일본군 간의 사실상의 전투가 됐다. 8월에 송응창과 이여송은 일본군과 강화를 재차 확인하였다. 이들은 명나라 황제에게 “왜놈들은 이미 모두 바다를 건너가고 다만 한두 진영만이 부산에 머물러 있으면서 명나라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임금으로 봉해주는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란을 겪은 나라에 명나라의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무르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요양에 철환하여서 위급에 대비하게 하옵소서”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따라 명나라 조정은 명군 지휘부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라는 조서가 내렸다.

1593년 9월부터 명군은 소수부대만을 남기고 주력부대는 실질적으로 철수했다. 명군을 이끌던 송응창과 이여송은 명군의 주력을 이끌고 명나라로 귀환하였고, 유정을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유정은 1만여명의 명군을 이끌었다.

1594년 3월 유정은 성주에서 남원으로 둔진을 옮겼고, 이 과정에서 유정은 5천명의 군사를 본국으로 송환하고 5천여 명만 거느렸다. 1594년 8월 유정 또한 명군을 거느리고 한양성을 거쳐 요동으로 돌아갔다. 단 부산에서 북경까지 30리마다 다섯 곳에 파발을 두어 경계하였다.

반면, 조선 조정에서는 조선 8도의 20세 이상, 40세 이하의 건장한 남자를 도별로 만 명씩 모집하여, 유정의 명군에 편입시켜서 훈련받게 하였다. 국왕 선조는 전투에 있어서는 명군에 협조하도록 하였으나, 일본과 화친은 마지막까지 반대하였다. 하지만 명나라가 일본과의 화친을 맺고 조정 신하들도 대부분 화친에 동조하였으므로 선조도 결국 화친을 윤허하였다.

일본군 역시 2차 진주성전투 이후 부산지역으로 후퇴한 후 병력을 일본으로 빠르게 일본으로 송환했다. 1596년 1월 유정이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 그리고 1596년 5월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지역의 방어용 목책을 불태우고 군대를 철수하였고, 나머지 일본군도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임진왜란은 종료됐다. 임진왜란은 공식적으로 1592년 4월에 시작되어 1596년 5월 4년 1개월을 끌었다. 하지만 1593년 6월 2차 진주성전투 이후에는 전투다운 전투가 없었다. 실질적으로 임진왜란은 1592년 9월부터 1593년 6월까지 1년 3개월 동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명나라 황제의 칙서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달되어 서로의 강화교섭 조건이 서로 엄청난 차이가 난 것을 알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7년 1월 조선을 다시 침공했다.

이렇게 시작된 정유재란에서 일본군이 한때는 전라도 남원과 충청도 직산까지 진출하였으나 1597년 12월부터 조·명연합군의 반격으로 경상도 해안 지역으로 후퇴하였고, 일본군은 순천, 사천, 울산 등지에 왜성을 쌓고 버텼다.

당시 조·명연합군은 명나라 장수가 지휘하였고, 일선 전투는 대부분 조선군이 맡는 형식이었다. 결국 1598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자 일본군은 모두 본국으로 철수함으로써 2년간의 정유재란도 종결됐다.

1) 參謀本部編, 1924, 󰡔日本戰史 朝鮮役󰡕, 村田書店, p.269.
2)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실록을 기록하던 사관(史官)이 제2차 진주성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한 대목이 눈에 띤다. “온 성중의 제군(諸軍)이 모두 역전(力戰)하였기 때문에 여러 날 동안 버티고 쉽게 함락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이때를 당하여 약간의 외원(外援)만 있었더라면 왜적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반드시 낭패를 당하고 물러갔을 것이니, 어찌 이처럼 참혹한 데 이르렀겠는가.”(선조 41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8월 7일(무자) 2번째 기사 「비변사가 진주성에서 죽은 이들에게 휼전을 거행하는 일을 아뢰다」 )
3) B.C. 72-73년경 유대지방의 마사다 요새에서 15,000명의 로마군을 상대로 960명의 유대인이 전투를 벌이다 유대인 전원 사망한 것을 마사다 승전 또는 패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역사는 이 사건은 마사다 항전 또는 마사다 옥쇄(玉碎)라고 부른다.
4) “홍계남(洪季男)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嶺)을 내려가다가 적의 선봉(先鋒)을 만나 길에서 적을 공격하여 수십 리를 가며 싸우다가 구례(求禮)·광양(光陽)에 이르러 오랫동안 크게 싸우니 적이 물러갔다. 1기는 사천(泗川)·고성(固城)으로 향해 가서 분탕질을 했고, 1기는 삼가(三嘉)·의령(宜寧)으로 향해 가서 공사(公私)의 가옥(家屋)을 불태우고 돌아와서 함안(咸安)·창원(昌原) 등지에 주둔하였으며, 1기는 포로로 잡은 남녀와 복물(卜物)을 싣고 김해(金海)를 향해 돌아갔다.”( 조선왕조실록, 「6월 29일 함락된 진주성 싸움의 자세한 경과」, 선조 40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7월 16일(무진) 5번째기사)
5) 전라도 보성출신으로 남원에서 임진왜란을 겪었던 안방준의 기록에 따르면, “(1593년) 7월 2일 적이 호남을 향해서 가다가 가토 기요마사가 정예병력 손실이 커서 호남을 점령하기 어렵다고 하고 병사들을 쉬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며 즉시 철군하라”고 명령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안방준, 「진주서사」, 󰡔은봉전서(隱峯全書󰡕 권7, 1864). 진주서사는 안방준 사후 200여년 뒤인 조선 고종때 후손들이 문집으로 엮어 출판하였다.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주요이력: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중앙대 행정대학원장.[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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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  hbpark@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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