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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16. 제3기(1592. 10. - 1593. 6.) : 진주대첩과 그 후의 조선군 공세 ④
박희봉 | 승인 2021.07.01 00:54
  일본군의 전면적 후퇴
 
[박희봉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평양성에서 패전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 1번대는 1월 9일 새벽 평양성을 빠져나와 박천까지 후퇴하여 구로다 나가마사의 2번대와 합류하였다. 이때 황해도 봉산에 주둔하고 있던 오오토모 요시무네는 이미 봉산에서 한양성으로 철수하였다.

1월 12일 일본군 1번대와 2번대는 함께 박천에서 후퇴하였고, 1월 14일 개성, 1월 16일 파주를 거쳐, 1월 17일 한양성으로 빠르게 후퇴했다. 강원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가 지휘한 일본군 4번대도 한양성으로 철수한 것도 이 때이다.

함경도를 점령하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 역시 1월 초 정예병을 길주에 보내 포위된 길주성에 있는 일본군의 후퇴를 지원했고, 이 과정에서 조선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큰 피해를 보면서 남쪽으로 후퇴했다. 2월 4일 함흥 북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2번대는 함흥으로까지 병력을 철수시켰고, 이후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하고 있던 함경도 안변으로 집결하여 2월 말 한양성으로 후퇴하였다.

또한 경상도 성주성에서 지속적인 조선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던 일본군도 월 15일 개령으로 철수했고, 이후 김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함께 선산 방면으로 철수했다. 조선 전지역에 분산 배치되어있던 일본군이 한양성과 부산성을 중심으로 모인 것이다. 이것은 일본군 대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던 한양성과 부산성 이외의 지역은 모두 조선군이 활발하게 활동하였기 때문에 일본군에게 위협이 되는 지역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1593년 1-2월 일본군 후퇴로 및 주둔지.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벽제관전투
 
후퇴하던 일본군을 따라 조·명연합군도 빠르게 남하했다. 조·명연합군은 1월 19일 개성에 들어갔다. 조·명연합군은 한양성 탈환을 논의하였고, 속전속결론과 신중론이 엇갈리는 속에 대부분의 명군 장수들은 여세를 몰아 속전속결을 주장했다.

한편 일본군 수뇌부에서도 한양성 조기 포기와 역습 이후 후퇴에 대해 논의하였다. 일본군 사령부는 승리에 도취된 명군이 무리한 진격을 할 것이라는 점을 노리고 역습하기로 결정했다.

1월 27일 새벽 명군 부총병관 사대수와 조선군 경기도 방어사 고언백이 군사 1천명을 이끌고 해음령을 넘어 벽제관 일대를 정찰하였고, 정찰대는 일본군 정찰대와 창릉 일대에서 마주쳤다.

교전을 벌인 끝에 조·명 정찰대가 60여명의 일본군을 사살했고, 이 소식을 이여송에게 보냈다. 이여송은 명군 본진에게 뒤따라 출동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친위대를 포함한 기병 1,000여 기를 이끌고 긴급히 벽제관으로 출동했다.

이여송이 혜음령을 넘어 벽제관을 지나 여석령에 도착하니 일본군 500명이 있었다. 이여송는 여석령을 향해 진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여석령 뒤에는 일본군 병력 2,500명이 기다리고 있었고, 계속하여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일본군 6번대 본진 8,000명, 그리고 또 다른 일본군 병력 4,000명이 속속 도착하여 명군과 일본군 간에 접전이 벌어졌다.

이여송의 기병대는 짧은 칼만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바, 일본군의 조총 집중사격과 더불어 일본도와 창으로 무장된 일본군 보병의 포위공격에 의해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명군 본진이 전투에 참여했고, 일본군 역시 추가로 많은 병력이 전투에 참여하였다. 초반 기선을 제압당한 명군은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후퇴하였고, 일본군도 더 이상 명군을 쫓지 않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여송은 이 패배로 전의를 상실하였고, 1월 29일 개성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명군에게 임진강 이북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평양으로 퇴각했다. 이어 4월 7일 일본군이 한양성에서 확실히 퇴각한 것을 확인하고는 개성으로 이동했다.

벽제관전투 이후 명군과 일본군 간의 강화회담
 
명군은 벽제관전투에서 패배를 맛본 이후 명군은 일본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를 회피하였다. 실제로 명군은 벽제관전투 이후 일본군과 강화협상이 체결될 때까지 전투다운 전투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명군 수뇌부는 일본군을 무력으로 진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였고, 명군의 희생을 줄일 필요가 있었다. 명군은 조선에서 전쟁이 종결되는 것이 필요했지 일본군을 굳이 진압할 필요는 없었다. 따라서 명군은 일본군과의 강화를 모색했다.

일본군 역시 조선을 점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조선 수군에 의해 해로를 통한 보급이 원활하지 못했고, 육로를 통한 보급도 조선군에 의해 차단되었다. 조선 내에서 식량을 얻기는 더욱 어려웠다.

또한 조선군의 지속적인 공격에 의해 일본군은 전의를 상실해갔다. 따라서 일본군으로서도 명군의 강화제의는 선뜻 응하여 지긋지긋한 전쟁을 종결짓는 최상의 대책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조선 땅에서 일본군이 겪고 있는 고초를 모르는 그들의 지도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설득시킬 명분이 필요했다. 이 강화 명분을 찾기 위해 명군과 일본군 양측은 대치한 채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반면, 조선 조정은 강화에 분명히 반대했다. 조선 조정은 명군에 일본군과 끝까지 항쟁하겠다는 의향을 전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3월 계미). 조선은 일본을 불구대천의 적으로 생각하여 그들을 추격하여 섬멸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행주대첩
 
독성산성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한양성으로 모여드는 일본군을 압박하기 위해 독성산성에서 나와 한양성 서쪽 20리 밖에 있는 행주산성으로 부대를 이동시켰다. 조·명연합군의 한양성 탈환 작전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 승장 처영 등 2,3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행주산성에 주둔하였고, 병사 선거이에게 4,000명을 이끌고 수원 북방 광교산을 지키도록 하였으며, 소모사 변이중에게는 3,000명을 이끌고 양천에 대기하게 하였다. 변이중은 만석꾼이었던 자신의 재력을 투입해 화차 300량을 제작하여 권율에게 납품했다. 이 무렵 한양성 인근에는 전라도 절도사 최원 병력 4,000명, 경기도 순찰사 권징 병력 400명, 창의사 김천일 병력 3,000명, 의병장 우성전 병력 2,000명, 경기도 방어사 고언백 병력 2,000명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권율은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해 행주산성 주변을 이중 목책으로 둘러치고 포진지를 구축하였다. 요소요소에 흙담을 높이 쌓았고, 참호도 깊이 팠다. 총통기와 화차를 비롯한 각종 화포를 준비하였고, 화약도 충분히 비축하였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한양성에 있던 일본군이 한양성 방어에 앞서 배후에 있는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3만명을 동원하였다. 일본군은 5개 진영으로 나뉘어 공격을 거듭하였으나 조선군의 방어가 거세 목책을 넘지 못하였다. 목책을 넘은 일본군도 또 다른 흙담 앞에 가로막혔고 조선군의 공격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 중에 조선군의 화살이 거의 소모될 위기가 있었으나 충청 수사 정걸이 두 척의 배로 화살을 싣고 와서 강 쪽에서 들여보내 위기를 넘기었다. 일본군의 공격은 새벽 5시부터 오후 6시까지 세 번에 걸쳐 있었고, 세 번 모두 퇴각하였다.

조선군은 재차 일본군이 공격할 경우 방어에 실패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이날 밤 행주산성을 비우고 퇴각했다. 일본군도 2월 12일 행주산성 공격이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다음 날 재차 공격했고, 빈 행주산성을 함락했다. 이것으로 일본군은 결국 자신들이 행주산성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적고 있다.
 
한양성 탈환
 
명나라 경략 송응창은 심유경을 일본군 진영에 보내 강화협상을 시도하였다. 이때 충청도 수군절도사 정걸은 강화도에서 수군 50척을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용산 일대의 일본군 선박을 공격하고, 일본군의 군량을 보관하고 있던 용산창을 화공으로 불태웠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조선 수군은 지속적으로 일본군을 압박했다.

4월 8일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 간에 강화회담이 타결됐다. 일본군은 출수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명나라 강화사 파견을 요구했고, 송응창은 일본 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서일관 등 강화사 2명을 일본군 측에 보냈다. 4월 18일 한양성의 일본군이 전원 명나라 유격장 심유경과 강화사 2명, 포로로 잡힌 순화군과 임해군, 조선 대신 일행을 인질로 하여 철군을 시작했다. 조선군 공격에 대한 방패용으로 조선백성 1,000여 명을 인질로 잡아 앞세우고 한양성을 나와 한강 부교를 건너 남하했다.

4월 19일 유성룡이 이여송에게 퇴각하는 일본군 추격을 주장했으나 거절당하자, 전라도 순찰사 권율, 순변사 이빈, 경기도 방어사 고언백, 이시언, 정희현 등에게 비밀리에 일본군을 추격하라고 명했다. 20일 권율이 한양성에 입성했으나 일본군은 하루 전 모두 퇴각한 이후였다. 이로써 한양성은 11개월 15일만에 조선군이 탈환했다.

권율은 곧바로 일본군을 추격하려 했으나 명군 유격장 척금이 권율 부대를 가로막았다. 이여송의 명령 없이는 추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4월 20일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도 한양성에 입성했다. 유성룡이 이여송에게 추격전을 재차 주장했으나 이여송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추격하지 않았다. 더욱이 명군은 조선군이 일본군 추격을 위해 한강을 건너려는 것도 가로막았다.

일본군은 5월 10일 상주, 12일 선산과 인동, 13일 대구와 청도를 거쳐 밀양에 도착했다. 철수한 일본군은 부산진성, 서생포성, 임랑포성, 기장성, 동래성, 김해성, 안골포성, 가덕도성, 웅천성, 거제도성 등 남해안 포구의 성에 분산 배치됐다.

1) 명나라 군사는 조선군과의 연합작전 8회에 그쳤다. 참전 초기 평양성 탈환작전 및 정유재란시 울산성 전투 등 최후 공격전 외에는 대부분 전투에 소극적이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서는 명나라 군대가 일본과의 싸움을 꺼렸고, 고의로 일본군의 퇴로를 열어주었다는 기록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2) 벽제관전투 이후 1596년 명군과 일본군 사이에 강화가 체결되어 일본군이 물러날 때까지 명군은 일본군과 남원에서 단 한 차례의 소규모 전투가 있었을 뿐이다.\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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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  hbpark@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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