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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의 격동의 79년, 총재당선부터 10ㆍ26사건까지
전영준 | 승인 2008.10.01 20:43

1977년, 김영삼 의원은 '야당성 회복투쟁위원회'를 결성, 보다 확실한 대여 투쟁을 결의했으나, 선명성을 잃은 야당은 제구실을 하지 못했고, 1978년 박정희는 다시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유신체제가 중대한 위기에 봉착했다는 뚜렷한 징후는 1978년 12월 12일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충격적으로 드러났다.

▣ 1978년 12월12일 총선거

이 선거에서 집권 공화당은 엄청난 규모의 금권과, 관권을 동원하고도 불과 유효표의 31.7%를 득표한 반면에 야당인 신민당은 그보다 1.1%가 많은 32.8%를 획득했으며 통일당이 7.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박정희라는 절대 권력자를 위해 만든 유신헌법과 국민의 기본 생존권을 희생시키던 불합리한 정치체제와 경제정책에 대해 국민은 엄중한 경고를 내린 것이다.

제10대 총선결과는 유신정권의 유화책을 이끌어내어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가 1978년 12월 27일 형집행면제로 석방된다.

▣ 1979년 5월29일 신민당 총재선거

1979년 5월 신민당 당권을 놓고 맞붙은 김영삼과 이철승의 대결에도 중앙정보부가 개입해, 신도환에게 접근해 이철승과의 연대를 주선했다. 그러나 결과는 김대중의 지지를 얻은 김영삼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1979년 5월 29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선명야당을 표방하는 김영삼 - 김대중의 연합세력이 신민당의 지도부로 나섬으로써 국민대중에게 큰 희망을 줌과 동시에 유신정권에게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정국은 여야격돌로 더욱 경색된 분위기를 조성하게 된다.

10ㆍ26사건은 기본적으로 유신체제의 지배집단과 국민사이의 대립관계에 의해 야기된 정치적 돌발사태였다. 유신체제는 안보라는 미명아래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ㆍ사상ㆍ학문ㆍ양심의 자유 등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국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상당부분 억압한 전형적인 군사독재체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 특히 지식인층의 불만이 날로 고조되어온 197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는 변혁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 YH여공 농성사건

한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갸날픈 여성노동자'들의 소위 『YH사건』이 발단이었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서울 마포의 신민당사 4층 강당에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회장 장용호) 여자종업원 200명이 몰려와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회사를 계속 경영하여 작업을 하게 해달라"는 폐업조치 철회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상식을 초월하는 엄청난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는데 이는 사건 자체의 중요성 때문이 아니라 제1야당인 신민당을 탄압ㆍ와해시키는 계기를 만들기 위한 계산된 행위였다.

이날 경찰은 '101호 작전'이라 명명된 진압작전을 위해 정ㆍ사복 경찰 1,000여명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174명의 YH여공들을 순식간에 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YH무역 노동조합 간부인 김경숙씨가 심한 부상을 입어 중태에 빠졌고 결국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등 제1야당에 대한 과잉폭력행위를 저질렀다.

▣ 김총재의 ‘뉴욕타임즈’회견파문

김영삼총재에 대한 법원의 직무정지 가처분 결정으로 정국이 걷잡을 수 없는 국면에 빠져들고 있던 때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파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김총재는 '뉴욕타임즈'지의 '헨리 스코트 스토크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미국관리들에게 미국은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서만이 박(朴)대통령을 제어할 수 있다고 말할 때마다 그들은 한국의 국내정치문제에 관여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면서 "이것은 납득할 수 없는 논리다.

미국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3만명의 지상군을 파견하고 있는데 그것은 국내문제에 대한 관여가 아니란 말인가"고 반문했다.

이같은 김총재의 회견내용이 국내에 알려지자 여당은 즉각 이를 문제 삼고 나섰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10월 3일 합동조정회의를 열어 김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하기로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여당 측이 김총재를 제명하기로 된 것은 '뉴욕타임즈'와의 회견내용이 사대주의적 발상으로서 외국의 내정간섭을 자초한 것이라는 주장에 근거한 것이다.

여당측이 발표한 김총재징계사유서를 보면 ① 그가 반민족 사대망동을 했고 ② 주한미군의 존재를 한국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인 양 주장했고 ③ 남의 나라 선거에 대한 무분별한 언급으로 인해 정치인의 체통을 손상했다는 9개항에 달하는 비난을 담고 있다.

▣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제명

그러나 신민당의원들은 징계안처리를 강력히 저지한다는 방침으로 맞서 소속의원들이 국회본회의장과 단상을 점거했다. 야당의원들의 본회의장 점거로 국회에 삼엄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공화당과 유정회의원들은 10월 4일 오후 4시 7분 경호권 발동으로 수백명의 무술경위를 출동시켜 놓고 본회의장 아닌 다른 국회 별실에서 김총재 제명안을 10여분만에 변칙처리한 것이다.

이날 여당의원들은 평소 여당의 의원총회장으로 사용하던 국회 1층 146호실에 소속의원 1백59명을 비밀리에 출석시킨 가운데 김총재 제명안을 표결통과시켰다. 당시 백두진(白斗鎭)국회의장은 "출석의원 1백59명 중 1백59표로 가결했다"고 김총재 제명안 가결을 선포했다.

이처럼 김총재 제명안이 여당의원들 단독으로 날치기 통과됨에 따라 정국에는 더욱 짙은 먹구름이 덮이기 시작했다. 특히 김총재 제명 후 신민당은 비통한 분위기 속에서 의원총회를 열고 소속의원 66명 전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국회에 내기로 결의했다.

여기에는 통일당(統一黨)소속의원 3명도 동조, 사퇴서를 함께 제출했다. 이에 대해 여당측은 일부 야당의원이 속셈과는 달리 할 수 없이 사퇴서를 냈다는 판단 아래 선별 수리할 것을 검토, 야당을 더욱 자극했다. 결국 국회는 의원직 사퇴서를 처리하지 않고 있다가 10.26사건이 터진 후인 11월 5일에야 이를 일괄 반려한 것이다.

정국은 급속히 냉각되었고 박 정권은 곧바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8월 13일 윤종완 등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고 유신정권은 이 같은 분열공작과 더불어 YH사건과 관련하여 계속적으로 신민당을 비난해댔다.

그리고 9월 8일 오전, 서울민사지법 합의 16부(부장판사 조언)은 앞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집행을 정지시키고 정운갑씨를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는 전무후무한 결정을 내린다.

아울러 유신정권은 김대중씨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범국민적 항쟁을 벌이겠다"는 9월 10일의 기자회견과 미 카터 행정부의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뉴욕타임즈』와의 김영삼 총재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 국회법상 징계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 159명이 여당 의원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결의안을 기습 처리해 버렸다.

▣ 유신체제 붕괴의 전주곡, 부ㆍ마민중항쟁

10월 16일 오전 10시 부산대학교 도서관 앞. "유신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를 외치는 일단의 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순식간에 1,00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시위가 상당한 규모로 확대되자 학생들은 교문앞에 진을 치고 있던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여 오후에는 남포동 등 부산일대를 누볐다.

부산시민들의 열렬한 환호성과 참여속에 부산대생 중심의 '유신반대 시위대열'은 17일 새벽 1시까지 부산시내 11개 파출소를 파괴하는 등 민중봉기를 일으키는 듯 했다.

17일 부산대에 휴교령이 내리자 이번에는 동아대 학생들이 가두로 진출하여 시위에 합류하였고 18일 0시부로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다는 유신정권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남포동 일대의 시민ㆍ학생 시위대는 "유신철폐, 독재타도"와 함께 "계엄철폐"를 외치는 야간시위를 하였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최세창 준장이 이끄는 3공수여단 병력을 투입하여 무차별적인 진압을 자행함으로써 부산시위는 일단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18일 아침, 1960년 4ㆍ19혁명의 도화선이었던 도시 마산에서 경남대생 1,000여명이 휴교령을 무릎쓰고 교내시위를 벌인 뒤 오후 5시경 마산시내로 진출했다.

날이 어두워지며서 수만명으로 불어난 시민ㆍ학생 시위대는 공화당 경남도지부 사무실을 부수고 이어서 북마산파출소, 유신체제의 핵심권력자인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씨의 집과 마산시청, 법원, 마산MBC 등 유신체제를 유지ㆍ옹호해 온 19개소의 각종 공공건물을 공격했다.

유신정권은 39사단 병력 250명과 장갑차를 시위진압에 투입하였지만 시위는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다. 다음날 19일 밤에도 시위가 이어지자 19일 저녁 1,500여명의 무장군인이 마산시내에 투입되고 20일부터는 마산ㆍ창원지역에 '위수령'이 발동됨으로써 4일간의 "부산ㆍ마산민중항쟁"은 막을 내린다.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4일간의 "부산ㆍ마산민중항쟁"으로 체포된 사람은 모두 1,563명이었는데 이중 500여명은 학생이었고 나머지는 노동자, 노점상, 샐러리맨 등 일반시민이었다.

▣ 유신독재의 최후, 1979년 10월 26일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궁정동 안가 만찬회장. 5ㆍ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후 18년 동안이나 장기집권해온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사망했다.

그것은 지배세력내의 권력 갈등 결과로 유신체재의 정치적 폐쇄성의 반영이었고 궁극적으로는 유신체제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7년에 걸친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로 상징되는 '겨울공화국'-시인양성우의 시 제목에서 표현하듯- 이 일거에 무너졌으나 유신체제는 국민의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저항에 의해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다가올 비극은 여기에서 잉태되었고 박정희라는 절대권력자는 사라졌으나 유신체제를 지탱하고 보위하던 유신세력의 힘은 그대로 존속되고 있었다. 특히 지배집단의 한 축에서 기득권을 누려온 정치군인집단, 바로 이들 집단이 유신체제를 탄생시키고 유지해온 정치권력의 핵심이었으며 그들은 당시의 정치체제 속에 엄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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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준  dugsum@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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