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동해의 수평선 같이 가물가물하고 태백산맥의 봉우리 같이 아스라하게 생각되던 나이 50을 훌쩍 넘기고 탄력을 받으니 이내 중반이다. 내 앞으로의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충만한 경건」은 허무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공통된 자세일 것이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하여 생육하고 번성한 이래 하늘의 별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들이 明滅해 갔다. 우리는 단지 그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역사를 쓰고 고치며 바꾼 사람들만 기억할 뿐이다. 누구는 영웅으로 누구는 미인으로 -그 사람들은 크고 작은 역사의 산봉우리였고 크고 작은 역사의 파도였다.

이렇게 출중한 사람이나 출중한 일이나 출중한 작품만이 남기 때문에 사람들은 애써 여기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역량과 실력을 총동원하는 것이다. 나는 인물이 변변치 못해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명예욕의 충족이나 「아름다운 이름을 백세에 전한다.」는 공명심의 발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고 다만 누명이나 안 쓰고 악명만 안 듣기만을 바라면서 살아왔다. 세상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도 어렵거니와 사람 구실을 하며 사람 행세를 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오늘날처럼 기득권이 막강하고 돈으로 모든 것이 재단되고 계량되는 세상에서는-

그러나 아무리 꿈을 꾸지 못하고 돈으로 귀신을 부리는 세상이라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수천 년 동안 고정되고 변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그것은 사람의 평가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우직함인가 지혜로움인가 우리나라 국민들은 거만금의 부자나 권력자에는 인색하고 냉정하다. 그러나 의롭고 올바른 사람을 알아주고 제일로 치는 것은 「文臣은 바른 소리를 하다가 죽고, 武臣은 전쟁터에서 죽는다.」는 유교적 절의가 남아있어서인가 그래도 우리 국민들의 장점이자 우수성인 것이다. 다행히 이 전통이 사람들의 일탈을 막아주고 나라가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근간에 어느 지인과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다.「나는 성격상 기쁨과 즐거움은 같이 못합니다. 그러나 슬픔과 괴로움은 같이 할 수 있습니다.」라고. 물론 이 말을 하기까지에는 많은 전제가 있었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대강의 뜻은 우선권을 상대방에게 주면서 진실과 진정을 같이 하겠다는 의사표시였던 것이다. 아울러 부박한 세상을 비웃고 마땅치 않게 여기면서 「아는 것을 실행할 때 비로소 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 왕수인(王守仁)에게 심정적 동조를 느끼기 때문이다. 김춘수는 그의 시 「꽃」에서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자.」고 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오늘이나 먼훗날이나 모두 괜찮으며 근사하며 그럴듯한 사람으로 기억되며 남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내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박식하다」거나 「용기가 있다」거나 「능력이 있다」는 찬사보다는 언제나 「그리운 사람」으로 남고 싶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버렸다!」며 제자의 요절을 슬퍼한 안회(顔回)를 향한 공자의 그리움이며. 조조가 연나라 공략에 패퇴한 뒤 「순욱(荀彧)이 살았더라면 나로 하여금 이 출병을 말렸을 터인데-」의 순욱을 향한 그리움이며. 당태종이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뒤 「살았을 적 위징(魏徵)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텐데-」의 위징을 향한 그리움도 되는 것이다. 오랑캐 땅에서 일생을 마쳐야 했던 왕소군(왕昭君)을 향한 시인문사들의 그리움은 전체 대륙의 그리움일 것이다. 아! 27살의 꽃다운 나이에 어린 자식 하나를 두고 죽은 왕불(王佛)은 소동파에게는 기어코 꿈 속에서라도 만나고야 마는 그리운 아내였던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구상(具常) 시인이 언급한 것처럼 「한국이 낳은 최고의 시인」 황진이는 두고두고 이 땅의 남정네들의 그리움이고 길재와 원천석, 사육신과 생육신 삼학사(三學士)에 대한 그리움은 義에 대한 영원한 조선의 그리움인 것이다.「녹주, 너를 사랑한다.」는 김유정의 박녹주를 향한 그리움이나 「너와 네가 사람이 되어 나누기보다는 차라리 피울음 우는 두견이 되자.」는 유보화를 향한 이상화의 그리움은 애처롭고 서럽기만 하다. 원효의 그리움은 무애(無碍)였지만 그를 흠모하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의 그리움은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요 땅에서는 연리지(蓮理枝)되는 그리움일 것이다.

이 그리움의 관계는 낯익은 사람은 더 낯익고, 낯선 사람이 낯익은 사람으로 만나며 낯을 아는 사람은 마음을 아는 사이로 발전하는 것으로서 부부간 친구간 부모와 자식간 스승과 제자간에 이루어져야 하고 정치인과 국민간에 이루어진다면 이루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침상을 같이 쓰지는 않았지만. 지향은 똑같다고 볼 수 없지만, 같은 신분은 아니지만 「두견이 우는 봄밤과 모란이 지는 찬란한 봄날」에서 봄의 마감을 느낀다는 일치점만으로도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운 사람으로 남는다.」는 것은 채워지지 않은 충족으로 세상을 살겠다는 것이며 더 이상 보여줄 속내도 없고 감출 치부도 없기 때문에 무방비 무저항으로 인생을 살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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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춘  kimmaeu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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