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모가 따로 없다. 일주일전 서울시내 모 호텔에서 벌어진 국정원의 ‘실패한 작전’을 둘러싸고 모처럼(?) 보수 진보 이념을 떠나 한목소리로 국정원을 때려대고 있다. 언론들이 앞장 서고 정치권이 이어받아 ‘어설픈‘ ’멍청한‘ 등의 수식어는 기본이고 ’걱정원‘ ’허무개그‘ 등의 조롱이 매일같이 이어지고 있다.

그뿐인가. ‘왜 망을 보게 하지 않았는가’ ‘왜 CCTV에 노출됐는가’ 작전에 대한 훈수까지 곁들어 시시콜콜 복기에 복기를 거듭하고 있다. 계모가 일 시켜놓고 집에 돌아와서는 일을 하다 실수로 화병을 깨뜨린 콩쥐에게 왜 화병을 거기 두었느냐로 시작해서 하루종일 일을 뭐했느냐를 거쳐 지난 수년동안의 실수를 모두 다 열거해서 야단치는 형국이다.

거기에 더해 이번 작전 실패의 원인을 권력의 암투, 국정원장의 무능, 정보기관의 총체적 위기로 진단해 불길에 기름을 끼얹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동안 국정원이 미웠고, 국정원장이 미웠더라도 혹은 현정부의 집권이 2년밖에 남지 않았더라도 사안에 대한 판단은 정확히 하자.

그 호텔에 묵고 있던 사람들이 국내 정치인들이었나. 그렇다면 한국판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현정부는 책임을 면치 못한다. 알려졌듯 그 ‘정체불명’의 남녀가 빼내려한 것은 인도네시아 특사단의 대(對)한국 협상전략과 관련한 파일이었다. 다 아는 사실을 왜 꺼내느냐고?

국가와 국가간의 ‘총성없는 정보전쟁’이 이 사건의 본질이라면 최소한 비판의 수위도 그에 맞게 설정돼야한다는 것이다. 국정원은 과거 중앙정보부나 안전기획부 시절 정치인들을 사찰해서 정권의 유지를 뒷받침했던 이미지에서 벗어나 21세기 정보전쟁에 대처하기 위해 이름도 국가정보원으로 바뀌었다.

각국 정부가 중대한 국가이익이 걸린 국가간 협상에서 숙소·통신기기 도청과 노트북 데이터 복사·해킹 등 상대국의 정보를 빼내는 것은 세계 정보기관의 공통 업무이자 외교가의 불문율이다.

국익과 관련한 국가간 ‘작전’에 대해 상대 당사국의 반응도 안나온 상황에서 ‘외교문제로 비화 조짐’이라고 기사를 써대는 언론들의 행태는 차라리 시작도 안한 외교문제를 비화되도록 부채질하는 모양새였다. 막상 당사국인 인도네시아의 언론이 국정원 개입 의혹을 보도하지 않고 특사단장으로 방한했던 하따 라자사 경제조정장관이 21일 이번 사건을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밝히자 이번에는 ‘왜 인도네시아가 가만 있는가’를 놓고 분분한 해석을 하고 있다.

자국의 정보기관의 ‘실수’를 경쟁적으로 보도해 외신들의 인용보도로 이어지게 만든 언론들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언론들인가.

실패로 드러난 작전에 대해 비난하긴 쉽다. 그리고 실패를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실패한 작전 없이는 성공한 작전도 없다. 이번 작전이 실패해서 이렇게 만천하에 드러났다면 지금까지 안 드러난 작전은 성공했다는 의미도 된다. 궤변이라고?

프랑스 국방부에 소속된 비밀정보국 데제에스에(DGSE)는 지난 91년 2월 미국 현금등록기 회사 NCR 중역들이 프랑스를 방문하자 NCR의 영업비밀을 입수하기 위해 중역들이 숙박중인 호텔 프론트 데스크 직원과 청소원들을 포섭해 객실에 진입, 노트북 2개를 절취했다. NCR 중역들은 비밀정보국 소행임을 감지하고 일단 경찰에 신고했으나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사건은 종결 처리됐다.

미국 CIA는 97년 EU 전산망에 침입한 다음, 집행위원들과 유럽의회 의원들의 통신내용을 도청하고 유럽연합의 통상정보와 정책방향 등을 탈취한 사실이 발각됐다. 이로 인해 쿠바와 이란 리비아에 대한 제재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던 미국과 유럽간 외교분쟁이 야기됐지만 이일로 CIA 국장이나 미국 대통령이 사퇴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 1996년 프랑스 리옹에서 개최된 G7 정상회의 때 데제에스에가 각국의 대표단을 상대로 불법적인 첩보활동을 벌일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미 대표단은 식사 때도 중요서류를 직접 소지하고 호텔에서도 도청 등 프랑스 정보기관의 첩보활동을 의식해 보안대책을 강화했었다.

각국 정부가 다른 나라의 스파이를 발각했을 때에도 사안 공개없이 추방하는 관례를 지키는 것은 자국도 예외일수 없는 정보전쟁의 현실을 인정, 상대국의 외교적 위신과 정보요원의 신변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다.

만일 정보기관이 실패와 그에 따른 언론의 비난을 두려워하게 만들어 100% 성공이 보장된 작전에만 나서기로 한다면 실상 어떤 작전도 시도할 수 없는 무용지물의 식물기관으로 전락할 것이다.

실패에 따른 책임은 물어야한다. 누가 뭐래도 실패했으니까. 조직원 노출 이후의 리스크 관리도 미흡했다. 하지만 실패에 대한 비판과 비난은 구분돼야한다.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할 실패지만 혹여 발생하더라도 다시는 이번처럼 광기어린 비난은 되풀이하지 말아야한다. 지금 이 순간도 국익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남의 나라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있을 조직원들의 사기도 생각해야하지 않겠는가. <데일리안>

*글:이종근 데일리안 편집국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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