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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해방과 건국의 여명(黎明), 건국 대통령 이승만 이야기
남부임 | 승인 2012.04.06 19:01

[남부임, 시민활동가]

해방과 건국의 여명(黎明)

1919년 3.1운동 직전 2월 25일,
이승만은 미국대통령이 된 은사 우드로윌슨에게 청원서를 보냈다.

[한국의 완전독립을 담보로, 당분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게 해 주시오.]

이 청원서는 이승만의 뜻과는 전혀 달리 일부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일본의 식민지에서 미국의 식민지를 원한다는 뜻으로 와전되기도 했다.

이승만의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永世中立論)’이라는 제목의 연구 논문을 프리스턴 대학출판부가 1912년 발간하여 인세를 수년간 지급했다. 공해(公海)상 중립문제가 중대시되던 1차 대전 당시 이승만은 중립문제의 권위자로 부각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과 레닌의 국제공산당창설

그뿐만 아니었다. 1917년, 마르크스 이론의 실천가 레닌의 공산당혁명은 전 유럽을 강타했다. 처음에 러시아의 노동당을 돕다가 서서히 런던의 볼세비키(공산당)회의를 조직한 레닌은 드디어 소비에트(마르크스 사회주의) 정권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국제적 활동을 본능적인 통찰력으로 파악하던 이승만은 1919년, 레닌이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을 창설하자 깊이 우려했던 것을 “공산당의 당 부당”이라는 제목으로 1923년 3월호 태평양잡지에 글을 실었다.

[공산당이 합당한 이유는
인민의 평등주의라? 반상의 구별을 혁파하고 노예의 매매를 법률로 금하였나니 이것이 서양문명의 사상 발전된 결과라 만세인류의 무궁한 행복을 끼치게 하였도다 그러나 부자는 가난한 노동자의 노동으로 호의호식하면서 노동자의 월급과 삯전을 점점 깎아서 뼈가 늙도록 남의 종질로 사역하다가 말 따름이니 이 문제를 균평하게 하자함이니 이는 대저 옳으니 적당한 뜻이라.

공산당이 부당한 이유는

첫째
모든 사람의 재산을 평균이 나누자 함이라? 이것을 가난한 사람은 환영하겠지만, 게으른 사람들이 일을 아니하던지 하야 토지를 다 버리면 어찌하겠느뇨. 부지런한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하야 게으른 가난장이를 먹이어야 될 것이오. 이 가난장이는 차차 그 수효가 늘어서 장차는 저마다 일 아니하고 얻어먹으려는 자가 국 중에 가득할 것이며!

둘째
자본가를 없이하자 함이라? 재정가들이 경쟁이 없어지면 상업과 공업이 발달되기 어려우니 사람의 지혜가 막히고 모든 기기묘묘한 기계와 연장이 다 스스로 폐기되어 지금에 후생하는 모든 물건이 다 진보하지 못하며 물질적 개명이 중지될지라!

셋째
지식계급을 없이하자 함이라? 지식과 학식을 높이는 것은 가하지만 지식계급을 없이하자 함은 불가능하며!

넷째
종교단체를 혁파함이라? 본래 구교역사의 계급과 그에 따른 폐단을 다 아는 지라 그 중 평등과 사상의 자유를 확장시킨 종교의 가치를 무시할 수는 없을지라.

다섯째
공산당을 주장한다는 러시아? 정부와 인도자와 군사가 없이는 부지할 수 없는 사정을 자기들도 다 아는 바라. 설령 세상이 다 공산당이 되며 동서양 각국이 다 국가를 없이 하야 세계적 백성을 이루며, 군사를 없이 하야 총과 창을 녹여 호미와 보습을 만들지라도, 우리 한인은 일심단결로 먼저 자유국가를 만들어놓고 군사를 길러서 우리 적국의 군함이 부산 항구에 그림자도 보이지 못하게 만든 후에야 국가주의를 없이할 문제를 생각하지 그 전에는 우리는 원치 아니할지라.

우리에게 제일 급하고 제일 긴하고 제일 큰 것은 광복사업(독립)이라 공산주의가 이 일을 도울 수 있으면 우리는 다 공산당 되기를 지체치 않으려니와 만일 이 일이 방해 될 것 같으면 우리는 결코 찬성할 수 없노라...]

이승만의 은사인 윌슨대통령은 1차 대전 때 잠수함으로 민간인 선박까지 파괴하는 독일의 비인간적인 행위를 응징하겠다는 선전포고와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발표했다.

“이 전쟁이 끝나면 모든 억압받는 민족은 크든 작든 자유로운 의사결정에 의한 독립을 해야 한다”

이것은 3.1운동의 큰 원동력이 되었다.
대한민국 최초 군중시위꾼 이승만으로서도 독립의지를 보여 줄 군중시위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3.1운동과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국내의 독립운동가들과 비밀리에 이승만과 연락을 한 독립선언 33인 중 17인이 기독교인이었다.
드디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 직후 이승만은 급히 미 국무부에 전보를 쳤다.

[한국의 애국자들이 일본으로부터 탄압받지 않도록, 조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국이 중재해주시기를 간곡히 청원합니다.]
이승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실효적노력이었다.

   
▲ 사진@온라인커뮤니티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모인 한인대표자대회

1919년 4월 14일부터 사흘 동안 한인들과 미국인들까지 필라델피아 중심주의 소극장에 모였다. 이승만, 정한경, 윤병구, ,민찬호, 임병직, 장기영, 유일한, 조병옥, 노디 킴.....서재필이 의장이었다.
이들은 단순한 독립선언을 넘어 ‘건국의 논의’까지 하였으므로 아예 명칭을 바꾸어 제1차 한인회의First Korean Congress라 했다.

노령 만주 한성 등 많은 곳에서 임시정부가 만들어졌다. 수많은 임시정부를 나중에 한성정부 하나로 통합하면서 이승만을 최고지도자 집정관 총재로 추대했다. 이승만은 집정관 총재를 대통령president이라 번역했다. 그리고 한성정부를 Republic of Korea라는 영문표기와 함께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위기에 처한 한인기숙학원의 학부모들은 이런 이승만의 기를 살리기 위해 부당한 세금이나 학력인정불가와 같은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한인기숙학원을 지켜주었다.

상해임시정부와도 통합하여 마침내 9월 6일 이승만은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와 이승만간에 갈등이 생겼다.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자격을 사용하지 말 것과, 상해에 부임하기 전에는 대통령직을 유보할 것과, 이승만의 외교방식을 반대하는 대신 무장투쟁을 주장했다. 이승만의 비폭력외교노선에 제동을 건 것이었다.

이승만은 무장투쟁을 바위에 계란치기로 여겼다. 무장투쟁을 해도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일본의 도움을 필요로 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오히려 테러리스트로 보여 독립에 방해가 될뿐더러 그로인해 무고한 한국인만 피해를 더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도 외교적인 무대로만 활용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승만의 외교노선팀, 신채호 박용만의 무장투쟁팀, 또 그들 둘 다 탐탁하지 않은 안창호팀, 사회주의자 이동휘 팀으로 사분오열된 임정은 전혀 조율되지 못했다.

박용만은 하와이 외딴 숲에 군사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을 모아 목총으로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사사건건 이승만의 비폭력 비무장 외교독립노선을 공격하는 식이었다. 의형제 박용만의 주선으로 하와이에 온 이승만이 박용만과 불화한 이유였다.
이승만은 간곡하게 말했다.

“왜놈 한두 놈 죽이는 일이 우리 백성의 울분을 잠시 달래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분노와 절망을 참지 못해 칼로 제 목을 찌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나라를 되찾는 일에는 도움이 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독립에 방해만 될 뿐입니다.”

민영환대감을 생각하면 할수록 이승만의 신념은 더욱 확고해졌다. 백성 70~80%가 한글도 모른다. 민영환, 그가 얼마나 할 일이 태산 같은가 말이다! 

친일파 스티븐스를 살해한 장인환의 변호를 거절한 것도 이승만을 수세로 몰아갔다. 반대자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신채호를 비롯한 상해임정사람들이나 무장독립노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승만의 이런 태도에 대하여 거의 발작적으로 분노를 일으켰다. 애국열혈투사들은 이런 이승만을 두고 냉정한 이기주의자라고 했다.

   
▲ 사진@온라인커뮤니티
그러나 이승만의 해외에서의 활약은 그들도 부인할 수 없는 크나큰 능력이었다.

3.1운동 직후 일본은 이승만의 목에 현상금 30만 달러를 걸었다.
일본은 나날이 더욱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부임하고 뜻을 뭉치기 위해 밀항하기로 했다.
당시 하와이에서 중국으로 가는 배는 거의 일본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중국으로 직접 가는 배를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했다.

임병직과 이승만은 배표도 없이 몰래 배 위에 올라 시체를 넣은 관들을 쌓은 창고에 숨어들었다. 불안감과 시체냄새가 극심했다. 이들은 중국인 노무자 복장을 하고 통나무를 메고 무사히 상해에 도착했다.

   
▲ 사진@온라인커뮤니티
1920년 12월 28일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 취임식을 가졌다.

중국에 있던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은 무장투쟁을 주장했다. 이승만은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한 폭력투쟁은 일제의 탄압을 강화시키고 한국인의 희생만 늘릴 뿐입니다.”

계속 이렇게 반대하는 이승만을 격렬하게 비난하며 살해위협까지 했다.

그때 마침 워싱턴 군축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상해를 떠났다. 몹시 힘든 6개월이었다.
이승만은 워싱턴으로 달려가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임병직이 맡은 워싱턴의 구미위원부는 한국독립을 위한 선전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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