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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이승만 외교,건국 대통령 이승만 이야기
남부임 | 승인 2012.03.22 16:09

[남부임,시민활동가]

러일전쟁

1904년 2월 9일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팔미도에 정박해있던 일본군함과 러시아군함이 서로 대포를 쏘아 두 시간 동안 천지를 진동하여 마른하늘에 벼락 치는 소리가 콩 볶듯 했다. 내나라 땅에서 또 남의 나라끼리 전쟁을 벌인 것이다. 선비들은 땅을 치고 통곡하였고 옥중에 갇힌 자들도 서로 붙들고 울었다.

이승만은 분노가 치밀고 눈물이 쏟아졌다. 그동안 해오던 한영사전 작업을 F까지 쓰다가 중단하고 급히 독립정신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관된 내용으로 한 권의 책을 쓰려했으나 감옥에서 참고자료도 구하기 어려워 그동안 써왔던 논설 등을 참고로 주요한 주제들을 중심으로 쓰기 시작했다.

마음이 몹시 다급했다. 이런 와중에도 계속 사형은 집행되었다. 그들에게 미안해서 때로는 숨어 쓰기도 하였다.

우선 대한제국은 태풍을 만난 배와 같다고 썼다. 지구가 둥근 이치를 증명하고, 우주법칙, 6대주와 5대양, 각 나라, 이슬람 등 각종 종교, 인종, 자연과학, 각국의 정치제도, 전기, 전화, 전지, 석유, 철로, 무선전선과 같은 첨단과학 뿐만 아니라 자유와 평등, 인권, 민주주의를 이해시켰다. 단군 이래 대한제국의 자긍심을 인식시키고 대한제국에서 벌어지는 후안무치한 강대국들의 각축전을 소상하게 밝혔다.

이승만은 40여 년 전에 영국, 프랑스, 미국, 등 각국 사람들이 통상을 요구했을 때 우리는 고루한 생각을 버리고 외국인들과 직접 만나서 그들에 대해 알아볼 생각을 했다면 우리는 이 나라들이 어디에 있으며, 얼마나 부강한지, 통상을 요구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았을 것이라고 써나갔다.

그래서 우리 주도하에 통상조약을 맺고 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가임을 선언하였더라면 청나라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이 두려워 아무 말도 못했을 것이라 썼다. 그랬다면 청일전쟁은 한청전쟁이 되었을 것이며 러일전쟁은 한러전쟁이 되었을 것이라 썼다. 인재를 양성하고 국력배양에 힘썼더라면 지금의 영국보다 일본보다 더 잘 살고 있을 것이라 썼다.

그리고 일본의 땅이 비좁아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어 식민지를 획득하려는 일본의 저의를 소상하게 파헤쳤다.

책 말미에는 우리 2천만 동포 중 1천9백9십9만9천9백9십9명이 무두 머리 숙이거나 모두 살해된 후에라도 나 한 사람이라도 태극기를 받들어 머리를 높이 들고 앞으로 전진하며 한 걸음 이라도 뒤로 물러나지 않을 것을 각자 마음속에 맹세하고 천만번 맹세합시다. 라고 썼다.

올리버박사는 이 책을 근대화의 성서라고 격찬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도 이 책을 굉장히 높이 평가하였다. 심지어 사대부 정적(政敵)들조차 칭찬할 정도였다.

1899년 1월 9일에 감옥 간 이승만은 1904년 8월 9일에야 감옥을 나왔다. 이승만 나이 스물아홉 살이었다.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기세등등했다. 청나라처럼 러시아의 영향력도 완전히 사라졌다.
감옥에서 나온 이승만을 본 윤치호는 말했다.

“영어실력이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깜짝 놀랐네!”

   
▲ @온라인검색
이승만의 외교[4]

이승만을 미국 유럽에 특사로 보내기로 하였지만 일본은 그런 일에도 미리 대비하여 모든 노선을 차단해 놓은 뒤였다. 황제는 이미 아무런 힘도 없었다.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황제께오서 단독으로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궁에서 나온 시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승만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증오가 폭발했다.

“못 가오! 아니, 안 간다고 전하시오!”

시녀가 떠나고 난 뒤에도 한동안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무능하고 허약하고 둘도 없는 겁쟁이 임금...’

위기감이 이승만의 등짝을 내리 훑었다.

미국

1904년 11월 4일 이승만은 미국을 향해 떠났다. 밀사였다. 특사의 길은 일본에 의해 애시당초 막혀있었다.
민영환과 한규설이 써 준 편지를 딘스모어에게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미국유학길이기도 했다. 선교사들이 써준 소개장 19통과 외교문서를 가방 깊숙이 숨겼다. 

아버지 이경선과 아들 태산이 제물포까지 따라왔다.
긴 감옥생활에 이어 또 가족과 이별하는 이승만의 마음은 안타까웠다. 그러나 불같은 이승만을 미국에 보내는 것이 더 안심되는 이경선이 말했다.

“이곳 걱정하지 말고 부디 몸조심해라.”

“네, 아버님 잘 다녀오겠습니다.”

이승만은 계속된 불효로 차마 아버지를 대할 면목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버님 아무쪼록 만수무강하십시오.”

이경선과 이승만과 태산이. 3代의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제물포에서 출발한 배는 목포 부산 시모노세키 고베 요코하마 하와이 그리고 센프란시스코로 갔다. 배 하등 칸에 탄 사람들은 주로 하와이 이주노동자들이었다. 상등 칸과는 뱃삯이 무려 6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하등 칸은 악취가 심했다. 열흘 동안 아무 것도 못 먹고 뱃멀미를 심하게 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내려 한국으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상투머리를 타고 시커먼 이가 기어 다녔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는 굵어졌다. 목 때가 옷깃을 타고 먹물처럼 번져 내려오고 이가 때 낀 목과 옷깃을 넘나들었다. 상투 튼 사람들은 지친 손가락으로 이가 지나간 머리와 목을 북북 긁어댔다.
지루하고 고단한 배안에서도 이승만의 웅변실력은 빛을 발했다.

“여러분 상투를 잘라버리십시오! 뭐 하러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짐덩어리를 머리에 이고 다니십니까... 우리나라가 일찌감치 개화를 했다면 오늘 날 여러분들이 이국만리 타국 땅에까지 이렇게 힘들게 가서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11월 29일 아침, 마침내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했다.
이승만도 하와이에 잠시 내렸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이민노동자들 앞에서도 장장 네 시간 동안 연설했다.

이주노동자들은 이승만의 연설을 들으면서 때로는 흥분하였고 분노하였으며 때로는 울었다. 한인 이주는 1890년대부터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선비 정부관리 군인 경찰 목사 통역 교사 승려 광부 머슴 등 다양한 직업인들이 진출해 갔다. 이미 훨씬 더 많은 일본인 노동자들이 먼저 와 있었다.

4천명 쯤 되는 한국인들은 사탕수수밭에서 힘든 노동을 했다. 떠나온 조국이 항상 그립고 염려스러웠다. 그들은 뙤약볕에서 힘들게 번 돈을 모아 이승만에게 여비 30달러를 건넸다.

사실 한국에서 출발할 때 일본까지 갈 배표밖에 없던 이승만에게 일본에 있던 미국인 선교사 로건이 그가 운영하는 교회의 특별헌금으로 여비를 보태 하와이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하와이 노동자들이 모아 준 돈 30달러는 워싱턴까지 여비가 될 것이다. 다음 날 그들은 모두 부두에 나와 떠나는 이승만을 향해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었다.

센프란시스코를 거쳐 로스엔젤레스로 갔다. 의대에 다니고 있던 배재학당 동료 신흥우와 크리스마스를 보낸 뒤 12월 31일 오후 7시 대망의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그날 워싱턴에는 큰 눈이 내렸다. 곧바로 햄린 목사에게 달려가 우선 약식으로 세례부터 받았다.

1905년 1월 1일 아침 이승만은 워싱턴의 호텔방에서 눈을 떴다. 서둘러 한국공사관을 찾아갔다. 몇 명 되지도 않는 공사관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이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을 예상하고 혼자 과감하게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이승만은 생각했다.

‘우리에게는 1882년 체결한 조미상호조약이 있어!’

[조미상호조약 제1항; 만일 다른 나라가 두 나라 어떤 정부에 대해서 부당하고 강제적인 태도로 나올 때에는 한쪽 정부는 그 사건의 통지를 받는 대로 원만한 타결을 가져 오도록 주선을 다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하여야 한다.]

우선 다칸소 주 출신 휴 딘스모어를 찾아가서 민영환과 한규설의 밀서를 전달했다. 딘스모어는 서울 주재 미국 공사를 지냈다가 상원의원이 돼 있었다. 그가 말했다.

“국무장관 존 헤이를 만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워싱턴포스트를 방문하여 기자들과 회견했다.

“일본은 한국을 점령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워싱턴포스트지 15일자에는 이승만이 강력하게 일본을 규탄한 기사가 실렸다. 아울러 유학준비도 서둘렀다. 

이승만은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가 신앙 간증과 대한제국의 일을 이야기 했다. 그 강연으로 교회에서 얼마간의 용돈을 만들었고 햄린목사도 도움을 주었다.

20일 헤이 국무장관과 면담을 했다. 이승만이 말했다.

“개항이후 한국에서 화를 입은 선교사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각하께서 중국의 문호개방정책으로 중국분할을 막아 낸 것처럼 우리 한국을 위해서도 힘 써 주시기 바랍니다.”

칭찬하는 말에 기분이 무척 좋아진 헤이 국무장관이 말했다.

“조미상호조약상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겠습니다.”

이승만은 뛸 듯이 기뻤다.
1905년 2월 이승만은 배재대학의 학력을 인정받아 조지워싱턴 대에 편입학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이승만은 미국에서의 공부는 오로지 대한제국과 국민을 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서양의 책들을 번역하여 서양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성공했고, 어떤 생활을 하는지, 한국백성들에게 시급히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교회의 강연료로 겨우 연명해나가야 하는 생계에 대한 불안과 굶주림으로 쇠약해져 공부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무엇 하나 쉬운 과목이 없었다.
수학, 논리학, 영어, 미국사, 프랑스어, 철학, 천문학, 경제학, 사회학, 서양사, 고대어학...

6월에는 아들 태산이도 미국에 왔다.
대한독립의 오직 하나뿐인 방편, 한미수호조약 이행촉구!를 위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야 했다. 하와이 교민 4천명이 작성한 청원서를 테프트 미 국방장관한테 전달하고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소개장을 받아냈다.

윤병구 목사와 이승만은 그 길로 필라델피아에 있는 서재필에게 달려가 청원서를 다듬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롱아일랜드 별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숨 쉴 겨를도 없이 그 곳으로 달려갔다.

대통령 비서에게 청원서와 소개장을 전달했다.
비서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답신은 오래 걸리지도 모릅니다.”

“네에?”

절망감으로 기운이 쑥 빠졌다. 나라의 운명은 초를 다투는 백척간두이건만 언제가 될지도 모르게 기다리라니!
두 사람은 휘적휘적 호텔로 돌아왔다.
그런데 너무도 뜻밖에 연락이 왔다. 다음 날 아침 9시까지 오라는 것이다.
두 사람이 접견실로 안내되었을 때 마차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포츠머스 회담에 참석할 일행들이었다.
대통령은 조금 후 윤병구목사와 이승만이 기다리는 방으로 들어왔다.

“어서오시오 젠틀먼 반갑습니다. 두 분과 두 분 나라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루즈벨트 대통령이 반갑게 인사했다.
이승만이 말했다.

“저희는 각하의 스퀘어 딜(Square Deal)을 구하러 왔습니다”

젊은 이승만!

그가 헤이 국무장관을 만났을 때 중국의 문호개방정책으로 능력을 발휘한 것처럼 대한제국도 부탁한다고 했던 것과 같은 탁월한 외교적 발언이었다. 스퀘어 딜(Square Deal)은 이 무렵 루즈벨트가 '대기업과 노동조합의 조정'을 표방한 상징어였다.
대통령은 바삐 청원서를 훑어본 후 매우 친절하게 설명했다.

“이 서류들을 워싱턴의 대한제국공사관을 통해 정식으로 국무부에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완곡한 거절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 리 없는 두 사람은,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하여 숙박료로 20달러의 큰돈을 내고도 거스름 돈 받는 일도 잊어버려서 호텔 직원이 거스름돈을 가지고 기차역까지 달려왔다.

그 다음 날 워싱턴포스트지는 두 사람을 기사화 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아들 태산이까지 돌봐주던 대한공사 김윤정이 갑자기 돌변했다.

“서울의 지시 없이 청원서를 국무부에 보낼 수 없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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