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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탁통치를 받아들였어야 했나①
양동안 | 승인 2012.03.19 14:22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현대사상연구회 회장]

미국과 소련이 45년 12월 모스크바 협정에서 합의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를 우리 민족이 수용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 민족이 신탁통치를 수용했더라면 남북으로 분단되지 않고 통일된 정부하에서 민주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오스트리아가 2차대전 종전 후 신탁통치를 받아들여서 민족의 분단을 방지하고 민주적 번영을 이룩했다는 점을 지적하여 자신들이 주장을 밑받침한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림들이 우선 범하고 있는 오류는 한반도와 오스트리아의 상황이 판이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상황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큰 상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는 강대국들이 신탁통치를 실시한 바가 없다. 유럽에서 2차대전이 종료된 45년 5월 오스트리아를 분할 점령한 미국·소련·영국·프랑스 군대는 오스트리아를 신탁통치하는 협정을 체결하지 않고 점령 통치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그에 반해 한반도에서는 미곡과 소련이 신탁통치를 실시하려고 했다.

둘째, 외국군대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직후부터 오스트리아의 정치세력들은 통일된 임시정부를 구성했으며, 한 번도 4개 외국군대 점령지역 별로 별개의 독립된 정치·행정기관이 구성된 일이 없었다. 그에 반해 한반도에서는 미·소 양국 군대의 점령지역 진입과 동시에 남북한에 별도의 통치기구가 설립되어 각 지역을 상이한 내용으로 통치했다.

셋째, 오스트리아에서는 각국 군대의 분할·점령지역간에 교통·통신·상거래의 단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각국 군대간에는 군사분계선이 존재했지만 그 분계선은 군사활동에 관한 경계선에 그치고 통치분계선으로 변질되지 않았다.

그에 반해 한반도에서는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자마자 교통·토인을 차단하여 북한지역을 남한으로부터 분리함으로서 미·소 양국 군대간의 군사분계선이 통치분계선으로 변질되었다.

넷째, 오스트리아의 좌익세력이 소련에 대해 자주적 자세를 취하고 좌우연합에 의한 통일정부 유지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당시오스트리아에는 우익진영에 인민당(구 기독교사회당), 좌익진영에 사회당(구 사회민주당) 과 공산당이 존재했으며, 공산당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당세를 유지하고 있어 좌익진영내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온건 좌익노선의 사회당은 사회주의노선을 취하면서도 오스트리아가 소련의 유성국이 되는 것은 절대 피하려는 입장을 취했으며,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미·소·영·불 4개 외국군대에 대응함에 있어 우익정당인 인민당과 확고한 공동보조를 취했다.

그에 반해 한반도에서는 좌익진영의 주도권을 소련에 맹종하는 극좌노선의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공산당은 우익진영과의 협력을 외면하고 소련의 한반도정책 실천에 협력하려고만 했다.

한반도의 상황고 오스트리아의 상황이 이처럼 판이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경우를 제시하면서 우리민족이 신탁통치를 받아들였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

신탁통치 수용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할 때는 우리 민족이 해방 직후 신탁통치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가 하는 점과 우리 민족이 신탁통치를 수용했을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을 것인가를 따져봐야 한다.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의 필요성이 있었을는지는 모르나 한민족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해방 후 신탁통치를 거쳐서 독립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민족에 대해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것이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면 그 민족 구성원들이 민도가 낮아서 자치력량을 갖추지 못하거나 독립을 희망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인은 당장 독립이 되더라도 독립국가를 유지·운영할 수 있는 민도와 자치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한국민족은 일본에게 강제 병합되기 전 장기간 독립적으로 국가를 유지 운영해 왔고,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받던 기간 중에도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왔다.

45년~48년 당시 한국인의 민도와 자치역량은 그 시기에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고 인도네시아 등의 국민의 민도와 비교할 때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미국정의 정치고문으로 일했던 사람도 사설에서는 한국인의 자치능력이 있음을 인정했다.

게다가 한국인은 해방 후 조속한 독립을 열망했었다. 한국인의 독립 열망이 매우 강했다는 것은 45년 10월 미국무성 극동국장 빈센트가 한반도에 대해 신탁통치를 실시하려는 미국의 구상을 밝혔을 때 남북한 전역의 정치세력이 이구동성으로 신탁통치 실시에 대한 격렬한 반대의사를 표명했었던 사실이나, 45년 12월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한 모스크바 협정이 발표되었을 때 민족의 의사가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는 지역인 남한에서 전국적으로 거족적으로 격렬한 반탁의사 표명이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서 충분히 입증된다.

만일 당시 남북한의 공산당이 소련에 대해 어느 정도 독립성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신탁통치를 관철하려는 소련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전역에서 실제 일어난 것보다 더 격렬한 반탁운동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만족 내부의 조건에 비추어 볼 때 실시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신탁통치를 실시했을 경우 우리 민족에게 크게 복된 결과가 초래되었을 것이라면 신탁통치를 수용하는 것이 옳았다는 견해의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 및 그 후에 전개되었던 소련과 국내 공산주의 세력의 동태, 그 무렵의 국제정세에 비추어 보면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는 우리 민족에게 복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극히 희박했다.

당시 한반도의 정치세력들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 소련과 미국의 한반도정책, 중국의 공산화 등을 고려할 때, 5년 동안의 신탁통치를 거쳐 독립이 되었을 경우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지 않았으면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었을 것이다.

당시 한반도의 정치세력들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를 보면,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북한에서는 46년 전반기의 토지개혁 실시 이후 공산당이 압도적 지지를 받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양동안, ‘대한민국 건국사’, 547쪽~551쪽, (서울: 현음사, 2001)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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