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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한성감옥, 건국 대통령 이승만 이야기
남부임 | 승인 2012.03.19 00:13

[남부임, 시민활동가]

한성감옥

그러던 중 1899년 1월 9일 의료선교사 셔먼의 통역을 부탁받고 겁 없이 따라나섰다가 그만 체포되고 말았다. 놀란 셔먼은 백방으로 이승만 구제에 나섰다.

화이팅도 즉시 알렌 공사와 외부대신에게 공문을 보내 석방을 요구했다. 영국인 경무청 고문관 스트리플링은 이승만이 부당한 고문을 당하지 않는지 자주 옥중을 찾아와 감시했고 외부대신 박제순은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석방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이승만은 스트리플링에게 서상대와 최정식이 함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여 세 사람이 함께 있게 되었다.
최정식은 울적한 밤이면 백구타령을 구성지게 잘 불렀다.

“백구야~ 훨훨 날지를 마라~~”

선교사들과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곧 석방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승만은 꿈에도 몰랐다. 이승만과 서상대와 최정식 셋이 탈옥을 결심했다.

“어찌 죽기를 기다리리까. 깊이 헤아려 살아날 방도를 도모함이 옳을 것이오.”

세 사람은 최정식을 통해 주시경이 몰래 들여 준 권총 두 자루를 들고 1월 30일 탈옥했다. 오후 5시쯤이었다. 맨 나중에 뛰던 이승만이 감옥 문 앞에서 스트리플링과 딱 마주쳤다.
스트리플링이 만류했다.

“안되오! 안 돼 당당하게 출옥하시오! 곧 석방될 텐데 왜 범죄를 자초하시오!”

“그런 말마시오 대중들이 집회를 열고 나를 기다리고 있단 말이오!”

“정신 차리시오!”

“안되오!”

엎칠락 밀칠락 하느라 뒤처진 이승만은 얼마못가 병사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정적(政敵) 박들북이 이승만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기절했던 이승만이 깨어보니 캄캄한 밤 자신의 육신이 만신창이가 된 채 눕혀져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시 통증이 뼈와 살을 헤집었다.

그러나 그 고통보다 더 큰 죽음의 공포가 이승만을 덮쳤다. 다시 끌려 나갔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보다 더 큰 고통은 육신의 고통이었다. 젊은 이승만.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직 죽음만이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들은 성난 짐승들 같았다. 매일 끌려 나가서 고문을 당했다. 고문은 더없이 잔인했다. 무릎과 발목을 묶은 뒤 다리 사이에 주릿대를 끼워 두 사람이 있는 힘껏 틀었다.

통나무로 어깨를 내리쳤다. 세모난 대나무 토막을 손가락 사이사이에 단단히 끼워 살이 떨어져나가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비틀었다. 마루 위에 엎드려 놓고 대나무 몽둥이로 살점이 튀도록 팼다. 그리고는 목에 큰 칼을 채우고 손은 뒤로 묶고 발에 차꼬를 채우고 흙바닥에 팽개쳤다.

이승만은 사형당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것이야말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수도 없이 생각했다. 급히 사형당하는 죄수가 부러웠다.

영혼[3]

이승만이 칼을 쓰고 앉았을 때 십자가의 예수님이 달처럼 떠올랐다. 절대로 부모님의 종교를 버리지 않겠다고 큰소리치던 일이 스쳤다.

배재학당 예배실에서 간절하게 말하던 어느 선교사의 모습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당신이 당신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용서하실 것이오.”

나무칼에 머리를 숙였다.

“오 하나님 우리나라와 저의 영혼을 구해 주시옵소서.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고,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깃들었다. 선교사들과 그들 종교에게 가지고 있던 불신과 증오심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그들이 매우 값지게 여기는 것을 한국인들에게 주려고 왔다는 것을 죽음을 앞두고서야 깨달았다.
이승만은 영문으로 된 신약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몸은 형틀에 갇혀있고 두 손은 수갑으로 채워졌으니 책장을 넘겨줘야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성경을 읽으면서 얻은 그 안위! 그 평안! 그 기쁨! 이루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일곱 달 동안이나 형틀에 몸을 가두고 손과 발을 묶었어도 견딜 수 있었다.
이승만은 고요히 아버지에게 올리는 유서를 써가지고 있었다. 가장 마음에 걸린 것은 의지할 곳 없는 늙은 아버지와 아내와 자식이었다.

그리고 동지들과 헐벗고 몽매한 동포들이었다. 그때 감방문이 열렸다. 사형을 당하게 된 줄 알고 옆에 있는 죄수에게 유서를 맡겼다. 그러나 정작 끌려 나간 사람은 유서를 맡긴 죄수였다.

그는 이승만의 유서를 지닌 채 형장으로 끌려갔다.
사형수들은 같은 사형수인 이승만에게 매달리면서 그들의 심정을 호소했다.

“선생님 나 같은 것은 죽으면 지옥에나 가겠습죠?”

“선생님 이제는 내 차례지요?”

하며 비지땀을 흘렸다.
특히 석양이나 새벽이면 죄수들은 통곡을 하였다.
늙은 죄수 채규상은 심문을 받다가 말했다.

“죄수 이승만은 누구보다도 애국자이니 그를 죽이려거든 나를 대신 죽게 해 주십시오”

이말을 들은 이승만은 감동하여 북받치는 설움에 흐느껴 울었다.
이경선이 감옥으로 달려왔다.

“승만아~ 승만아~”

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여보시오, 내 자식의 시체를 어서 주시오. 어젯밤에 처형됐다는 소식을 듣고 왔으니 어서 내 놓으시오”

아버지의 비통한 목소리를 듣고 이승만은 걷잡을 수 없는 슬픔으로 가슴이 무너지고 숨이 막혔다.

“이 늙은이가 돌았나! 처형은 무슨 처형이오. 당신 아들은 아직 멀쩡히 살아있으니 염려 말고 어서 가시오.

그래도 이경선은 버텼다.

“거짓말 마시오. 어서 내 아들의 시체를 내 놓으시오”

이승만이 겨우 추스르고 크게 외쳤다.

“아버지! 저는 아직 살아있으니 안심하시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래도 담 밖에서 목 메이게 부르는 목소리가 아픈 가슴을 더욱 미어지게 했다.
이승만의 아내 박씨 부인이 구명운동에 나섰다. 그녀는 이틀을 인화문 앞에 엎드려 통곡하였다. 그리고 법부에 재판을 청원하였고, 중추원에 헌의서를 제출했다.

이경선은 아들의 시신이라도 거두어가기 위해 감옥 문 앞에서 밤을 새우기를 거듭했다.
울적한 밤이면 백구타령을 구성지게 부르던 최정식이 사형당한 것은 그가 쏜 총으로 간수 김윤길의 다리에 맞은 때문이었다. 서상대도 일본으로 탈출 직전 여관주인의 밀고로 잡혀 사형당하고 말았다. 다행히 이승만은 사용하지 않은 총을 입증하여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고 관보가 밝혔다.

   
▲ 죄수 이승만
[최정식은 교에 처하고, 이승만은 태 일백, 징역 종신에 처한다.]

사형이 집행되던 날 최정식이 이승만을 보고 말했다.

“이승만씨 잘 있으시오. 당신은 살아서 우리가 같이 시작한 일을 끝맺으시오.”

피골이 상접하고 성한 데라고 하나 없는 이승만이 태 일백 대를 맞으면 살아날 리 만무했다. 이경선은 김윤길에게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무슨 연유인지 입회하기로 한 판사가 시작하라 해놓고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김윤길은 큰 소리로 “하나, 둘, 셋, ...”하고 몽둥이를 들었다 놨다하는 시늉만 했다.
이승만의 몸에는 아무 상처도 나지 않았다

이승만의 구명운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너무 과격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 누누이 말렸던 아펜젤러와 수많은 선교사들이 백방으로 다니면서 노력했다. 이들은 더 이상 생활할 능력이 없는 이승만 가족의 생계까지 보살폈다.

이승만은 자신이 감동한 하나님의 은총을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가 된 것이다. 성경공부와 신학연구를 하였고 감옥 안에서 예배도 드렸다. 이승만은 40여 명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그들은 한성감옥을 복당(福堂)이라 불렀다.

이승만은 뛰어난 한학자였고 수준 높은 영어 문장가였다. 열심히 영어를 완성하려고 노력했다. 입에 달고 달달 외우는 한학처럼 잡지에서 본 좋은 글이나 문장도 통째로 암기하곤 했다. 캄캄한 밤이면 마치 보고 읽는 듯 길고 훌륭한 문장들을 고스란히 암송했다. 성경은 모두 듣도록 큰 소리로 읽었다.

이승만은 감옥 안에서도 너무나 바빴다. 한국어로 된 영어사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일이었다. 자료는 日映사전 뿐이었다. 청일전쟁 자료를 구해 한글로 완전 정리하였다.

시국을 꿰뚫어 신문에 논설도 내보냈다. 외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선교사들이 들여보내주는 잡지나 신문으로 국내 뿐 아니라 국제적인 일까지 꿰찼다. 수많은 내외국인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다.

다급하여 물불가리지 못했던 청년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정신적 성숙은 물론 학문적으로 대단한 성과를 이루었다. 감옥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많은 양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뿐 아니었다. 감옥서장 김영선의 도움을 받아 감옥 내에서 학교를 만들어 소년수들을 가르쳤다. 가갸거겨로 시작하여 산수 일어 등을 가르쳐 글자 한 자도 못 읽던 소년들이 소설책을 읽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1903년, 감옥에 콜레라가 발생했다. 미국의료선교사 에비슨으로부터 의약품을 공급받아 환자들과 한 공간에서 같이 숨 쉬며 감염환자를 치료했다.

죽어가는 환자들을 돌보았고 시신을 수습하는데 앞장섰다. 84명이 시체가 되어나갔다. 이승만은 이들과 섞여 지내면서 이 일들을 일일이 기록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승만은 감염되지 않았음을 하나님께 감사 기도했다.

이승만은 고문으로 망가진 손가락을 들여다보았다.
그 손으로는 도저히 붓글씨를 쓸 수 없었다. 손가락 세 개는 완전히 굳어버렸다. 그는 말 할 수 없이 많은 시간과 정력을 붓글씨 연습에도 쏟아 부었다.

이승만의 어머니는 행여나 아들의 손가락 근육이 상할까 이승만이 돌을 던지거나 무거운 것도 들지 못하게 했던 손이다. 효자는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친구가 가르쳐주겠다는 거문고도 거절했던 바로 그 손이었다.

사형장은 감옥서 내에 있었다. 이승만은 수많은 형장의 죽음을 보았다.
무관 장호익은 세 번째 목에 내리치는 칼 소리가 날 때까지 계속해서 만세를 불렀다. 그는 박영효와 혁명 일심회를 조직하고 의친왕 옹립을 모의하여 체포된 후 2년 정도 복역하다 사형 당하던 순간 목이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어떤 죄수는 이승만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이승만은 그런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이 한마디 말 뿐이었다.

“가서 편안히 돌아가시오.”

감옥의 환경은 너무나 열악했다.
빈대 모기 이가 우글우글 했다. 괴롭히는 모기 빈대 이를 보고도 시를 짓고 죄수들이 먹는 밥을 보고도 시를 지었다.

관식(官食) 감옥 밥
蔬羹淸如霽後潭 물같이 헤멀건 우거지국을
齊分雙送各西南 이방 저방 골고루 나눠주누나.
菲盤猶飽茵常濕 소반 없이 먹자니 방석이 젖고
半椀當飢茶尙甘 반 사발이 밥이라 숭늉도 달군.
啖粗無鹽思煮海 나물은 싱거워 소금 아숩고
採沙如玉億耕藍 깨물리는 모래알 옥같이 희네.
滿顔茱色頭頭語 부황 핀 얼굴에 오가는 말이
不計醜荒願日三 이거나마 하루 세 때 먹어봤으면.

이승만은 감옥에서 2년 3개월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논설을 써서 내보냈다. 대부분 가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1901년은 이승만의 나이 26세였다.

1901년 4월 18일 제국신문 이승만의 논설

[...구라파 풍속은 시간이 돈이라 하얏으니, 우리나라 인구로 말하면 이천만 인구 수효에 놀고먹는 사람이 태반인즉, 날마다 잃어버린 돈을 계산해보면 적지 않다할 터이니, 이렇게 좋고 값진 시간을 가지고 인구 수효대로 부지런히 일들을 하였으면 어찌 나라가 부강치 않으리오. 이 좋은 돈을 다 버리고 앉아서 시골구석에서 몇 만 명 농민이 겨우 밤낮 버는 곡식 섬을 믿고 지내니 어찌 어려움을 면하며, 모두 놀고먹는 양반을 따라 하기 좋아하니 그런 사람을 누가 불쌍타 하리오. 우리나라 인민들은 아무쪼록 제 손으로 벌어 저마다 먹고 입고 쓰는 외에 날마다 몇 푼씩만 만들어 놓을 것 같으면 불과 몇 십 년 안에 자기 집만 부유할 뿐만 아니라 전국이 다 부유할 터이니 이 말을 허수히 듣지 말지어다...]

1901년 4월 19일 제국신문 이승만의 논설

[옛글에는 농사가 천하에 큰 근본이라 하였은즉, 이전세월에는 지극히 이치에 맞다하겠으나 지금으로 말할 지경이면 세계 만국이 서로 통상이 되었은즉 나라의 흥망성쇠가 상업흥왕한데 달렸으니 지금은 천하에 근본이 장사라 할 수밖에 없도다. 대저 농사란 땅에서 나는 것인즉 한정이 있거니와, 장사의 이익이란 사람이 내는 것이라 한량이 없는 고로 지금 영국으로 말할 지경이면 그 나라의 부강함이 천하 각국 중에 제일인데 그 토지인 즉 조그마한 섬이요 기후가 조르지 못하고 땅이 기름지지 못해야 농사보다 상업에 종사하야 기교한 물품을 만들어 남의 나라 금은을 바꾸어 자기나라를 부요케 만들어 놓았으니 자기 나라에 곡식이 많지 아니할지라도 돈만 가지면 세상의 무슨 물건을 못 바꾸리오. 일국의 제물은 그 나라의 혈맥이라. 대저 오늘 날 큰 싸움과 다툼이 모두 이익과 권세 까닭인데 장사보다 더 큰 것이 없은 즉 우리나라에서도 급선무가 장사 길을 널리 열어서 해마다 항구에 들어오는 돈이 나가는 돈보다 몇 천배나 되게 하기를 바라노라...]

1902년 9월 20일 제국신문 이승만의 논설

[상업의 기초가 처음부터 큰 것이 아니라 장구히 유지하는데 있으며 장사의 이익이 돈을 많이 남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팔리기에 있으며 물건이 많이 팔리기에는 믿음이 생겨야 될지라. 이것이 상업의 근본이어늘 외국의 회사가 기초를 잡는 것을 볼진대 시작은 항상 적고 나중에 커진 것이라 미국의 몽고매리 와드(Montgomery Ward & Co.)라는 회사는 의복 음식과 각색 일용집물을 발매하기로 각국에 유명한 회사인데, 그 회사의 광고는 남의 신문에 붙여 내는 것이 아니오 특별히 그 집에서 책을 박여내는데 매권이 일천여장이라 각종물건을 본보기로 재료와 값을 매겨 거주성명을 자세히 적어 보내면 어디든지 그 물건을 보내어 줄 것이니 광고와 같지 아니하거나 혹 마음에 불합하거든 다시 보내고 바꾸어 달라거나 돈을 도로 찾고자 하거나 원대로 하여 줄 것이니 경비는 본 회사가 담당하겠고 물건의 고하를 따라 몇 회씩 보험을 매여 놓았으니 이런 책을 각국각처에 만 질을 전파하되 값을 받지 않고 공으로 주는지라 이 회사가 고용하는 서기가 이천 명이오 금액이 백만 원 되는 물화의 주식표가 항상 통행하는 지라 첫해는 물건 판돈 통합이 이천 여원 작년 일 년 안에 일천만원어치를 팔아넘겼은 즉 이렇듯 성취된 이유는 다만 진실 두 자로 위주하야...]

1901년 6월 7일 제국신문 이승만의 논설

[... 전국에 땅이 72%나 그저 남아있고 산과 들을 쓸 줄 몰라 버려두는 데가 허다하야 그 땅을 가지고 돈을 벌지 못하니, 어찌 나라가 부강하고 자주독립이 되리오. 영국모양으로 제조에 힘쓰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 제조하는 학문이 없고 둘째, 자본이 없고 셋째, 외국과 겨뤄보기가 어려운지라 그런고로 조선서 제일 큰 돈 만들기는 농업에 힘쓰는 것이 마땅한 것은 땅이 기름지고, 땅이 많고 땅값이 싸고, 자본이 많이 들지 않고, 제조하는 학문보다 배우기 쉬운지라. 농사는 곡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 양, 말, 닭, 실과, 기르는 것이 다 농사이라. 나무, 면화, 담배를 하게 되면 외국학문이 없더라도 국(國)중에 이익이 있을 터이오, 외국에 팔 것 같으면 제조물을 넉넉히 사 쓰고라도 구차치 아니할 것이니, 농무를 힘쓰는데 다만 논에 곡식만 생각하지 말고 밀과 면화와 북도에서는 담배와 실과와 재목을 많이 기를 것 같으면 5년 후부터는 큰 이익이 생길 터이오, 나무 중에는 소나무보다 잡목이 낫고 잡목 중에도 호두나무 참나무 밤나무 단풍나무 피나무가 제일 많이 쓰는 나무요 값이 많은지라. 공한지대에 곡식 할 수 없는 데는 이런 나무를 해마다 심으면 논 사두는 이보다 더 이익이 있을지라. 또 공무원이 많으면 그 나라는 오래 지탱치 못할지라...]

1901년 5월 19일 제국신문 이승만의 논설

[총명이 있고 학식이 넉넉한 사람이 말하기를 점잖은 사람이 어찌 재물을 알리오 하며 혹 재정에 유심한 사람이 있으면 꾸짖어 가로되 선비가 재욕에 탐착한다고 꾸짖어 재물을 모르도록 인도하는 그런 잘못된 학문이 어데서 나왔는고. 지금 각국의 학교에서 산술 조목을 특별히 학도들을 가르쳐도 그 나라들이 점점 부강하여 가고 망하였단 말은 없나니 후진에게 산술을 교수하여 재정을 유심하게 하며 장사를 편리케 하거든 우리나라 사람은 돈 셀 줄을 몰라야 점잖고 높은 사람이라 하니 이런 높은 사람이 많아 이렇게 빈한한지. 우리 동포들은 몽사를 깨고 정신을 차려 날마다 생애를 폐치 말고 돈을 벌어 남의 나라와 같이 여러 층 높은 집을 짓고 철갑군함을 바다에 띄워서 세계에서 행사할 생각을 열심히 하였으면 매우 좋을 듯.]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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