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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언론인 이승만, 건국 대통령 이승만 이야기
남부임 | 승인 2012.03.15 15:18

[남부임, 시민활동가]

언론인 이승만

이승만은 1897년 7월 8일 배재학당을 제 1회로 졸업했다.
졸업식 날의 하이라이트는 이승만의 영어 연설이었다. 제목은 ‘조선의 독립’이었다. 협성회에서도 적극적으로 토론돼 안건을 정한 바와 같이, 러시아, 일본, 청나라의 각축장이 된 조선의 독립을 이승만은 누구보다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서 거행되는 첫 대학 졸업식을 독립신문, 코리안 리포지터리, 죠선크리스도인회보, 등의 언론이 대서특필하여 이승만의 연설과 주제인 ‘조선의 독립’을 크게 칭찬했다.

아관파천

고종이 1896년 2월 아관(러시아공사관)으로 1년간 피신했다. 아관파천이었다. 그리고 덕수궁으로 옮겨온 후 그해 10월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선포했다. 일본인 미우라가 민비를 살해하고 미우라가 시키는 대로 조선의 국모를 평민으로 강등시켰던 민비를 명성황후로 복권시켰다. 비록 시해되고 2년이 지나긴 했지만 국장도 거행했다. 당당하게 일본과 러시아의 간섭을 벗어나 자주권을 확립하고 고종이 직접 국권을 살리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했던 그간의 마음이 다소 누그러지는 듯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을 졸업한 뒤에도 협성회에 정성을 쏟았다. 협성회에서 논의한 일을 많은 사람들이 읽게 하기 위해 순 한글로 ‘협성회 회보’를 발간했다.

이승만은 ‘협성회 회보’ 3월 5일자(제 10호)에 “고목가”라는 시를 발표했는데 시국을 보는 그의 예언적 애국관이 철철 녹아 있다. 제목은 영문으로도 달았다.

"Song of an Old Tree"

일.
슬프다 저 나무 다 늙었네
병들고 썩어서 반만 섰네
삼악한 비바람 이리저리 급히 쳐
몇 백 년 큰 남기 오늘 위태.

이.
원수의 땃작새 밑을 쪼네
미욱한 저 새야 쪼지마라
쪼고 또 조다가 고목이 부러지면
네 처자 네 몸은 어디 의지.

삼.
버티세 버티세 저 고목을
뿌리만 굳박혀 반근(盤根) 되면
새 가지 새 잎이 다시 영화 봄 되면
강근(强根)이 자란 후 풍우불외(風雨不畏)

사.
쏘아라 저 포수 땃작새를
원수의 저 미물 나무를 쪼아
비바람을 도와 위망(危亡)을 재촉하여
넘어지게 하니 어찌할꼬

조선 최초의 현대시였다.
땃작새(딱따구리)는 친러파이고 비바람은 러시아의 위협이며, 개화파 지식인들은 포수이고, 고목은 대한제국이다.

“미욱한 딱따구리야. 고목 쪼지 마라 쪼고 또 쪼다가 고목이 부러지면 너와 너의 가족은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하고 그의 애끓는 심정을 호소한 영혼의 노래였다.

일간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이승만은 매일신문을 발간했다. 매일신문의 주목적은 정부와 사회의 개혁을 위한 국민계몽이었다. 협성회회보가 마뜩치 않았던 정부에 의해 폐간되는 것처럼 비친 협성회회보가 사실상 매일신문으로 바뀐 것이다.

이승만은 곧 뎨국신문을 만들어 주필을 맡았다. 작년에 고종이 조선을 뎨국(제국)이라 승격시킨 것은 종주국의 종속적 지위에서 벗어난 나라의 자유를 기념하기 위한 것처럼 신문이름도 뎨국이라 지었다. 매일신문이 후원자가 없었던 것과 달리 후원자가 생겨났다.

뎨국신문이 발행된지 2주 정도 되던 날 일본정부의 보조를 받아 일본인이 발행하던 한성신보와 이승만간에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한국 병정하나가 군복을 입은 채 일본인 전당포주인에게 손찌검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일본경찰에 고발했는데도 일본경찰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일본인에게 칼에 찔린 한국 사람이 그 사건과 관련하여 한국 사람들이 일본 경찰소에 끌려가서 매를 맞고 갇혔다. 한국 사람이 침을 잘못 뱉어서 일본인 옷에 떨어졌는데 일본인이 배 깎던 칼로 그 사람을 찔러 유혈이 낭자했다. 그 사건에 대하여도 순검은 움직이지 않았다. 경무청에 가서 호소해도 소용이 없었다. 사람들은 울분을 참지 못했다.]

‘대한사람 봉변한 사실’이라는 이 기사에 대해 한성신보는 거짓말로 응수했다.

[쓸 기사가 없어서 거짓말을 만들어 썼다.]

이 일이 있기 이전에 이승만은 러시아와 프랑스의 비밀외교문서를 연일 폭로하다가 신문지조례, 즉 신문법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승만은 이들 외국인들이 우리 땅에서 벌이는 일에 대하여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고발하는데 잠시도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모든 용기와 정력을 기울였다. 예를 들면 러시아의 “땅 사재기” “프랑스의 석탄 채굴권”과 같은 불이익을 고발하는 일이었다. 이승만의 이러한 것들을 막기 위해 외국공사가 동분서주하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급진주의 개혁가 이승만

“신문의 계몽만으로는 부족하오!”

뜻밖에도 이 집회에 사람 들이 1만여 명이 운집하 여 그 즉시 만민공동회로 이름하였다. 대성공이었 다. 여기서도 이승만은 두 각을 나타냈다. 그 이틀 후에는 감동받은 시민들 스스로 만민공동회를 열 어 정부를 규탄하였다.

이 운동은 대성공을 거두 어 소련의 완벽한 양보를 받아냈다.

   
▲ 1890년대 만민공동회 종로집회 모습.1898년 3월 10일 오후 2 시에 좋은 연설이 있다고 독립신문이 실었다.
만민공동회 회원 수는 놀라울 정도로 늘었다. 평양 대구 목포 인천....
이 운동을 처음 고안하여 민권을 높이려던 진보 서재필과 수구 정부와의 갈등의 골이 너무 깊어졌다.
서재필은 매우 진지하고 야망에 찬 이승만에게 당부했다.

“승만군! 만일 한국 민중의 복지를 위해 바치기를 원한다면, 먼저 유럽이나 미국에 가서 교양교육을 받고 지도력을 갖출 준비를 해야 하네.”

정부의 압력에 이기지 못한 서재필은 결국 떠났다. 그러나 수구관료들의 기대와는 달리 독립협회의 자주민권운동의 불길은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고종은 허약함을 감추지 못했다. 개화파의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수구파의 농간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걸핏하면 무당을 불러 굿하고 무당 앞에 엎드렸다. 일본에 의지하는가 싶으면, 러시아공사관에게 국왕 자신을 의탁하고, 아관파천까지 했던 고종을 바라보는 이승만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고종은 궁궐을 지키는 병정들을 외국인으로 구했다. 제나라 백성들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독립협회와 시민들의 개각을 요구하는 강경한 집회는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도저히 막을 도리가 없다싶으면 고종은 이들의 안건을 따르기를 번복하였다. 연좌농성과 시위는 연일 계속되었고 그 앞에는 항상 연설가 이승만이 있었다.

그러나 고종과 수구파는 독립협회의 요구를 받아들이기 싫었다.
결국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구금시켰다.
이승만은 학도 사오십 명을 이끌고 열일곱 명이 구금된 경무청으로 갔다. 본격적으로 강경 농성이 시작됐다.

“17명을 석방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같이 가둬라!”

철야농성으로 이어졌고 농성은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정부가 협박했다.

“해산하라 그러지 않으면 총격을 가할 것이다!”

멀리서 배재학당의 교장 아펜젤러박사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경선이 달려왔다.

“너는 6대독자야!”

이승만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연설을 했다. 가장 힘들 때가 동틀 무렵이었다.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고, 모두들 지치고, 춥고, 배고프고, 졸렸다.

농성 다섯째 되는 이른 아침이었다. 병정 무리가 칼을 빼어들고 왔다. 농성자들이 비실비실 도망치려하는 순간이었다. 이승만이 크게 소리쳤다.

“여러분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흩어지면 지금까지 고생한 우리의 노력은 헛수고가 되고 맙니다! 여러분 뭉칩시다! 여러분!”

드디어 17명이 석방되었다.
그 날 밤 이승만은 득의충천(得意衝天)하였다. 민주주의를 위한 위대한 승리가 달성된 것이다.
그러나 해산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위한 고삐를 바짝 당겨야 했다.

“독립협회를 모함한 조병식 민종묵 유기환 이기동 김정근을 당장 심판하시오!”

“헌의6조를 즉각 실시하시오!”

헌의6조는 상부에 올리는 11개 안 중에 6개 안을 군중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6개조이다.
1, 황제의 권력을 튼튼히 할 것
2, 외국에 대한 이권이나 조약체결 등에 각부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으로 날인할 것
3, 재정 조세 예산 결산을 인민에게 공개할 것
4,모든 중범죄도 피고의 자백이 있어야 형을 집행할 것
5,관리 임명은 정부의 과반수 동의를 얻어 임금이 임명할 것
6,법률이나 규정을 실천할 것.

“독립협회를 부활시키시오!”

“정부대관은 백성들이 원하는 사람만을 쓰시오!”.

사람들은 이런 이승만을 물불 가리지 않는 열혈청년fire-eater이라 불렀다.
11월 21일 철야농성 17일째 되는 날이었다.

홍종우가 지휘한 보부상(봇짐상인)들이 들이닥쳤다. 홍종우는 고종의 명령으로 개화파 김옥균을 살해한 보답으로 관직을 얻은 인물이다.
이승만이 고함질렀다.

“우리가 여기 개처럼 엎드려 풍찬노숙 하는 것이 옷을 탐하는 것이오이까. 밥을 탐하는 것이오이까. 다만 하는 일이 모두 나라를 위하고 동포를 사랑함이외다. 못된 간세배가 우리 만민공동회를 치라고 해서 보부상패들이 목전에 당도하였소이다. 우리가 죽더라도 충애하는 의리는 가지고 죽을 터이니 신민의 직분에 죽어도 또한 천추에 큰 영광이외다!”

큰 몽둥이를 든 보부상패가 공동회장을 둘러쌌다. 순검과 병정들이 보부상패에게 밀렸다.
보부상패의 몽둥이에 맞은 세 사람이 그 자리에 즉사했다. 부상자가 속출했다. 격분한 이승만은 홍종우과 같은 지휘자 길영수를 보자마자 멱살을 붙잡고 미친 듯 달려들었다.

“너도 소위 대한의 백성이거늘 어째 우리 만민을 친단 말이냐!”

이승만은 머리로 길영수의 가슴팍을 들이받으며 소리쳤다.

“나부터 죽여라!”

히죽이 웃는 길영수를 이승만은 정신없이 치고받았다. 이때 누군가 뒤에서 이승만의 두 팔을 껴안으며 말했다.

“이승만씨 진정하고 빨리 달아나시오.”

그 순간,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보부상패들 속에 혼자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이승만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오히려 보부상들이 밀려오는 쪽으로 나아가 그들이 막아놓은 것을 발로 걷어찼다. 그리고 배재학당 쪽으로 걸어가 땅을 치고 통곡했다. 이경선도 나타나 아들을 안고 같이 통곡했다.

누가 울부짖는 父子를 보고 물었다.

“어찌하여 아들을 그런 위험한 데 다니게 하오?”

이경선이 대답했다.

“내 자식이 만일에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한다면 아비로써 마땅히 엄금하겠으나 당당한 충애의 의리로 나라를 위하고 동포를 사랑하여 다니는 것을 어찌 금할 수 있소.”

이 사실이 독립신문에 났다.

[이승만씨는 고사하고 그 부친의 당당한 의리는 세계에 더욱 드문 줄로 공론이 있다더라]

군중들이 돌팔매로 반격을 시작했다. 소문을 듣고 군중들이 모인 것이다.
오랜 기간의 풍찬노숙과 분노와 실망으로 이승만은 배재학당으로 들어가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보부상들에게 쫓기던 사람들이 배재학당으로 몰려왔다. 배재학당 학우 김원근도 울면서 뛰어 들어와 외쳤다.

“이승만이가 길영수에게 맞아 죽었어!”

하고는 통곡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다시 일어나 종로로 갔다.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나무꾼들도 만민공동회와 같이 격분했다. 순검들과 병정들도 만민공동회편이 되었다. 그러나 보부상을 당할 수 없어 또 사상자를 냈다. 이 일로 이승만과 같은 과격파들은 더 흥분했다.

고종과 수구파는 낭패했다.
하는 수 없이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를 한성부 판윤(정2품; 서울시장)에 임명하고 만민공동회의 지지를 받는 인물들로 각료를 개편하고 독립협회의 부활을 허락했다. 중추원(한국 최초의 국회)을 새로 구성하여 전체 50명 중 만민공동회에서 17명을 배정했다. 여기에 이승만도 종9품의 의관(국회의원)으로 선임되었다.

독립협회는 보부상에게 살해당한 김덕구의 장례식을 영의정 장례보다 더 성대하게 거행했다.
시위운동의 희생자를 공식으로 ‘의사’로 호칭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중추원이 개원되자마자 정부 고관에 임용할 인재를 천거하기로 의결했다.
11명 중 박영효가 표결로 포함됐다.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였다. 영국 같았으면 왕실에서 막강한 실세를 누릴 위치였다. 박영효는 서재필 김옥균과 같이 일본의 근대화를 직접 눈으로 보아 혁명을 꿈꾸었다. 비록 3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이었지만 ‘개화의 꿈’은 조금도 양보할 수 없는 갈망이었다.

그들은 나약하기 짝이 없는 고종을 폐위시키고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화군을 옹립할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박영효가 임금이 되려한다’고까지 갔다.
하루도 잠잠할 날 없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와 개화파들이, 고종과 수구파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고종과 수구들에게는 중추원의 박영효 천거가 둘도 없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때맞춰 백성들의 원성도 따랐다.

“반역을 도모하다니!”

하루아침에 반역자들이 되었다.
나약하기만 했던 고종, 수구파와 러시아와 일본과 무당에게 의지하려고만 했던 고종, 그 고종이 단단히 화가 난 것이었다.

민회 금압령(집회 금지령)을 내리고,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해체시켜버렸다. 1899년 1월 2일 이승만은 중추원 의관직을 박탈당하였다.
이승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관리가 된지 한 달 사흘만의 일이었다. 그래도 이승만은 멈추지 않았다. 박영효와 도모하여 상동청년회라는 이름으로 글을 써서 장안에 뿌리는데 가담하였다.

[황제는 춘추가 많으시니 황태자에게 왕위를 양도하셔야 한다]

역모죄였다. 당장 검거령이 떨어졌다. 이승만은 제중원 원장 에비슨의 집에 피신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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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임  namboo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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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 dd 2012-03-18 15:10:16

    제발 찬양일색의 이승만 만세는 좀 자제하는게 어떨지요?
    우익이라고 하는 사람들 보면 이승만의 공만 떠들고 과는 입다무는
    유치한 행태가 여전합니다. 잘한일은 잘했다고 칭송할 순 있지만
    찬양일색의 유치한 궤변은 스스로를 갉아먹는 병패라 생각됩니다.
    혹시 이해관계에서 비롯되어 이승만은 존경하시는지요?
    내 친척 누가 자유당이라서? 내 아버님이 자유당때 무엇을 재니서??
    그리고 김구선생이 테러리스트 입니까?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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