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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21.알려진 역사, 알아야 할 역사 ①
박희봉 | 승인 2021.07.14 21:25
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임진왜란 초기부터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전쟁목표를 이루지 못했던 실패한 전쟁

[박희봉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한국인은 일반적으로 임진왜란 과정에서 조선의 내분과 갈등, 미흡한 전쟁준비, 국왕을 위시한 조정과 관군의 무능 등을 기억하고 있다. 조선군이 일본군과의 각종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이순신의 해전과 명군의 원조가 없었다면 조선은 멸망했을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 책은 임진왜란에 대한 이러한 역사인식이 잘못된 사실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시작하였다. 육지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하였는데 해전에서만의 승리로 국란을 극복할 수는 없다. 해전에서만의 승리로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지켜낸다는 것은 심한 논리적 모순이다. 관군이 괴멸된 채 의병들의 희생만으로는 국가를 보존하기 어렵다. 더욱이 외국의 원조에 의해 한 국가가 보전될 수는 없다. 제4차 평양성전투 단 1회의 전투에서 승리를 한 명군에 의해 조선이 보전되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책은 이러한 임진왜란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이성적으로 바로 잡기 위해 썼다. 이 책은 객관적인 사료를 중심으로 역사를 재조명하였다. 사료의 객관성을 위해 일본군 합동참보본부가 1924년 발간한 󰡔日本戰史 朝鮮役󰡕에 나타난 임진왜란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그리고 일본사에 감춰진 기록은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해석하였다. 물론 임진왜란에 관한 방대한 한국 자료를 인용했다. 하지만 한국 자료를 인용하는 과정에서도 근거 및 수치가 확실한 사료만을 인용하였다.

조선이 위약(危弱)하기만 하였다면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없다. 이순신의 해전은 물론이고, 육지에서 웅치·이치전투, 2차례의 금산성전투, 경주성전투, 영원산성전투, 진주대첩, 4차에 걸친 평양성전투, 북관대첩, 성주성전투, 독성산성전투, 행주대첩, 제2차 진주성전투 등으로 임진왜란을 극복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임진왜란에서 수행된 주요 전투를 시기별로 살펴봄으로써 임진왜란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거시적으로 다루었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은 임진왜란의 진실을 보다 심도 있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 임진왜란 전투를 일본군이 주도하였나?
 
전쟁을 누가 승리했느냐고 했을 때, 일반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가 목적을 달성했는가, 그리고 주요 전투를 누가 주도하였나 등 두 가지로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임진왜란을 누가 승리했는가 하는 것을 전투 상황과 전쟁목적 달성을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표 6-1>는 1592년 4월 13일 부산성전투에서 1593년 6월 14일 1차 평양성전투까지 2개월 동안 일본군이 각종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던 임진왜란 제1기의 전투를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8차례의 대규모 육상 전투에서는 일본군이 승리하였고, 해유령전투, 정암진전투, 무계전투와 같은 소규모 전투에서 조선군 및 의병이 승리했을 뿐이다. 육지전투의 영향으로 이 기간 중 일본군은 부산성에서 한양성, 평양성으로 이어지는 축선상에 있는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고, 한양성에서 함경북도로 이어지는 축선상의 주요 도시도 점령하였다. 해전에서는 조선 수군이 일방적으로 승리했다. 해전이 육상 전투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할 때, 임진왜란 초기 2개월 동안의 제1기는 일본군이 전투를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표 6-1> 임진왜란 제1기(1592. 4. - 1592. 6) 주요전투 내용.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침략의 전제조건으로 조선을 침략하면서 다음의 세 가지 목표를 계획했다.
 
첫째, 일본군 8개 부대가 각각 조선 8도를 점령한다.
둘째, 각 부대는 점령한 지역에서 명나라 침략을 위해 조선백성으로 군사를 모집하고, 병량을 징집한다.
셋째, 나고야에 대기하고 있던 10만여명의 일본군이 남해와 서해를 거쳐 평양으로 이동하고, 조선 8도에서 모집한 군대와 병량을 평양으로 보내 명나라 침략을 준비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첫 번째 전쟁목표는 형식적으로는 달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전혀 양상이 다르다. 일본군은 임진왜란 초기 대규모 육지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거점도시를 점령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군은 임진왜란 초기 부산성에서 한양성을 이어 평양성까지, 그리고 한양성에서 안변, 함흥, 경성으로 이어지는 축선상에 있는 도시는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거점 도시 인근지역까지 진출하지 못했다. 조선백성은 초기부터 일본군을 점령군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군의 진출 후 일본군 점령지역뿐만 아니라 인근지역의 조선백성은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일본군은 낙동강 서부지역인 경상우도와 전라도를 점령하고자 수차례 시도했지만 조선군과 조선백성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따라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두 번째 전쟁목표인 조선 내에서의 군사 및 병량 모집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에 사는 조선백성들조차 일본군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특히 일본군은 주요 도시를 비롯한 거점지역 내에서만 안전이 보장되었을 뿐, 대부분의 조선 땅에서는 일본군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 일본군은 전혀 조선백성을 통치할 수 없었다. 조선백성은 일본군의 군대 모집에 응하지 않았고, 식량을 내놓지도 않았다.

셋째,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의해 일본 수군이 완패를 당함에 따라 조선 남해와 서해 뱃길을 열지 못하여 나고야에 대기하고 있던 12만여명의 예비병력을 평양으로 이동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이 예비병력은 임진왜란 초기부터 조직적으로 항거한 경상도지역에 파견하여 조선군 및 백성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했다. 임진왜란 초기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구상한 명나라 침공을 위한 12만명의 예비병력 운용은 물거품이 된 것이다.

<표 6-2>는 임진왜란 제2기인 1592년 6월부터 10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조선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를 정리한 것이다. 임진왜란 초기 전투에서와 같이 해전에서는 조선군이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다. 육상전투에서는 초기 전투와 양상이 달리 전개됐다. 초기 전투에서는 대부분의 육상전투에서 일본군이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그러나 제2기 총 17회의 주요 육상전투에서는 일본군 공격이 4회인 반면, 조선군 및 의병의 공격이 13회로 공세의 주도권이 바뀌었다. 또한 전투 결과에서도 일본군 승리가 6회인 반면, 무승부 3회, 조선군 및 의병의 승리는 8회였다. 즉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2개월이 지난 후부터는 전투에 있어서 조선군이 주도권을 쥐고 전투를 치렀고, 전투결과도 조선군이 우세했다.
 
<표 6-2> 임진왜란 제2기(1592. 6. - 1592. 10) 주요전투 내용.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또한 앞에서 살펴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 가지 전쟁목표는 현실적으로 달성되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즉 임진왜란 제2기에는 전투가 교착상태 내지는 공수가 바뀜에 따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생각한 명나라 정복을 위한 계획은 확실히 불가능해졌으며, 일본군은 점령하고 있던 지역에서도 조선군 및 의병의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임진왜란 제3기인 1592년 10월 진주대첩이후부터 1593년 6월까지 약 8개월 동안 조선군과 일본군 간의 주요전투 상황은 <표 6-3>에서 보는 바와 같다. 해전에서는 조선 수군이 공격하기 위해 일본 수군을 찾아다녔지만 철저하게 일본 수군이 전투를 피하여 주요 해전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육상전투에서는 진주대첩을 계기로 조선군이 일본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제3기 총 6회의 주요 육상전투에서는 일본군 공격이 3회, 조선군 및 조명연합군의 공격이 3회로 공세의 주도권은 팽팽하였지만, 전투 결과에서는 조선군 및 의병이 5회 승리했고, 일본군의 승리는 명군을 대상으로 한 벽제관전투 1회에 그친다. 특히 이 시기에 치러진 6회의 전투는 모두 대규모 전투로 사상자 규모가 컸고, 그에 따라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의 사상자가 대규모로 발생했다. 따라서 진주대첩 이후 일본군의 보급로가 차단되면서 일본군의 지휘관회의를 한양성에서 개최했고, 여기에서 일본군의 후퇴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표 6-3> 임진왜란 제3기(1592. 10. - 1593. 6.) 주요전투 내용.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그리고 이 시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계획한 전쟁목표는 수정될 수밖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은 경상도 남부 해안지역으로 후퇴하였다. 즉 임진왜란 제3기에는 진주대첩 이후 일본군 보급로의 차단, 주요 전투에서의 일본군 패배, 조선군의 전방위적 공세 등으로 인한 일본군의 사상자 증가와 전투력 상실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초기 전쟁목표를 포기하고 새로운 전쟁목표를 세우게 된 시기였다. 이에 따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과 명군과의 화의를 통해 명군을 한강 이북에 묶어두고, 진주성을 점령한 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조선 남부지역을 지배하겠다는 것으로 전쟁목표를 변경했다.

임진왜란 제4기,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전투 이후 1596년 6월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에서 일본으로 철수할 때까지 약 3년 동안 조선군과 일본군 간에는 제2차 진주성전투 이외 큰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해전도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을 철저히 피해 다녔기 때문에 전투가 없었다.

2차 진주성전투에서 일본군은 진주성을 함락시켰기 때문에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질적인 내용은 다르다. 제2차 진주성전투로 인해 5,800명의 조선군과 의병은 전원 사망했지만, 일본군은 9일 동안 전투를 치러야했기 때문에 3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야했다. 그 결과 일본군은 전투력의 약화로 인해 구례와 남원까지 진출한 일본군이 결국에는 부산 해안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선군과 일본군 간에 전투다운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고, 명군과 일본군은 서로 병력을 본국으로 후송하는 등 실질적으로 전투가 종결됐다.
 
<표 6-4> 임진왜란 제4기(1593. 6. - 1596. 5.) 주요전투 내용.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 전쟁목표였던 조선 8도 점령은 원천적으로 실패했고, 지속적인 전투 패배로 인해 조선 남부만이라도 점령하려는 변경된 전쟁목표도 제2차 진주성전투로 인해 사실상 실패했다. 9만 3,000명의 일본군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점령하였지만 진주성 함락을 위해 일본군도 전투력을 소진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임진왜란을 4기로 구분하면 일본군이 전투에서 우세한 시기는 제1기뿐이고, 제2기는 조선군이 일본군을 공격하고 일본군이 방어했던 시기이며, 제3기와 제4기는 조선군이 전투에서 우세했던 시기이다. 또한 임진왜란 초기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목표는 실현되지 못하였고, 전쟁이 지속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목표 수행의 전투의 한계를 깨닫고 변경한 새로운 전쟁목표 또한 전혀 이룰 수 없었다.

요약하면, 일본군은 임진왜란 초기 2개월간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듯 했지만 조선을 실질적으로 점령한 적은 전혀 없었다. 특히 임진왜란 초기 2개월 이후부터는 전국적으로 조선군과 백성들이 조직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했고,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6개월 이후부터는 일본군은 수세에 몰렸을 뿐만 아니라 보급로의 차단에 의해 전투를 제대로 치를 수 없게 되었다.

이후에 일본군은 철수의 명분을 찾기 위해 명군과 강화를 논의했고, 벽제관전투와 행주대첩, 제2차 진주성전투 등에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명군과 조선군에 대한 공격은 강화협상을 유리하게 주도하기 위한 전술적 행위로 이해된다. 전반적인 전쟁과정에서 현실적 득실을 정확하게 계산하고 진출과 후퇴를 결정하는 일본군의 행태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본군은 4차 평양성전투 한 차례의 패전으로 한양성으로 빠르게 후퇴했고, 이후 대규모 전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지역까지 후퇴했으며,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그들이 승전이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라도로 진출하지 못하고 부산지역으로 후퇴하여 곧바로 강화협상에 응하면서 한편으로는 군대를 철수하였다.

이 이유는 조선군과 백성의 끊임없는 저항으로 일본군의 사망자가 속출하고 보급로가 차단됨에 따라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임진왜란 전 과정을 살펴볼 때 임진왜란은 전투 면에서도 조선군이 일본군에 승리한 전쟁이며, 임진왜란 초기부터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전쟁목표를 이루지 못했던 실패한 전쟁인 것이다.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주요이력: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중앙대 행정대학원장.[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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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  hbpark@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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