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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19. 제4기(1593. 6. - 1596.) : 제2차 진주성전투와 임진왜란의 종료②
박희봉 | 승인 2021.07.09 00:14
일본군의 병력동원
 
[박희봉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2차 진주성전투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전체 일본군 모두를 동원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군이 최초 임진왜란을 위해 준비한 병력은 1번대부터 16번대까지, 번외1번과 번외2번, 수군 등 총 28만 1,840명이고, 이들의 대부분은 조선에 파견되어 싸운 기록이 있다. 1)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같이 조선에 확실히 오지 않은 장수도 있지만 나고야에 파견된 병력은 조선에 모두 건너와 전투를 벌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2차 진주성전투를 벌이기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서에 기록되어 있는 일본군 총병력은 12만 1,578명이다.

이 병력은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한 부대뿐만 아니라 수군과 기타 주요성을 지키기 위한 병력을 포함한 것으로 당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총병력이다. 따라서 1592년 4월 임진왜란 발생 후부터 1593년 6월 2차 진주성전투 이전까지 조선영토에서 전투 중 사망한 일본군은 16만 528명이다.

임진왜란 초기 부대편제를 재편한 이유도 이렇게 부대별로 사망자가 과다하게 나왔기 때문에, 진주성 공격을 위해서는 부대의 공격력을 회복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군은 주요 전투를 치를 때 2만명 정도의 단위로 부대를 편성하는 성향이 있다. 또한 새로 편성된 공격부대 단위가 2만명을 넘는 것은 부대별로 부상자가 많았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일본군은 진주성 공격을 위해 <표 7>과 <표 8>과 같이 부대편제를 재편하였다.

 
<표 7> 제2차 진주성 공략을 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 편성 명령.자료: 參謀本部 編纂, 󰡔日本戰史 朝鮮役󰡕, 1924, 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pp.254~262.
<표 8> 제2차 진주성 공략을 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 편성 명령.자료: 參謀本部 編纂, 󰡔日本戰史 朝鮮役󰡕, 1924, 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pp.254~262.
작전명령서에 명시된 진주성 공략을 위한 일본군 동원병력은 <표 7>과 <표 8>에 나타난 바와 같이 92,972명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불시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수군 병력 5,460명을 부산 가덕도 인근에 집결시키고, 거제도에 예비병력 1만 4,380명을 집결시켰다.

또한 일본군의 주 주둔지인 부산성, 김해성, 기장성 등에 소수의 병력을 대기시켰다. 일본군이 진주성 공략에 사활을 걸고 모든 역량을 집결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대부분의 병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전술적 이유는 첫째, 일본군은 3만 명 정도의 병력으로 진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진주성을 반드시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실패한 공격력 이상, 즉 2배 이상 3배 정도의 충분한 병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둘째, 1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 주변에 배치된 조선 의병의 존재도 의식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1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성 외원군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음에도 실패했는데, 만일 진주성 외원군이 역할을 했다면 일본군의 피해는 더 컸을 것이라는 점을 전투경험이 많은 일본군은 너무도 잘 알았을 것이다. 셋째, 진주성 점령을 빠르게 완수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군 전체 병력을 진주성 이남으로 후진시킨 상태에서 명군과 조선관군이 후방을 공격한다면 일본군은 경상도 남부 해안 지역에 갇히는 꼴이 된다. 따라서 진주성 공격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명군의 진주성전투에 대한 태도
 
1593년 5월 초 경략 송응창은 일본군이 한양성을 버리고 남하하였다는 것을 듣고 알았다. 그는 이여송에게 일본군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송응창이 이여송에게 일본군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실제로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송응창으로서는 일본군이 한양성에서 물러난 지가 수십 일이나 되었는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까봐 명령을 내린 것에 불과했다.

이여송 역시 일본군을 쫓을 의도가 없었다. 벽제관 패전 이후 이여송은 실제로 전의를 상실했다. 이여송은 병력을 천천히 이동시켰으며, 한 곳에서 여러 날씩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이여송이 세재를 넘었을 때 심유경이 왜병의 진영에 있으면서 이여송에게 군사를 돌리어 강화를 완결시키자고 청하니, 이여송은 한양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일본군도 남쪽으로 천천히 물러갔다. 일본군은 울산 서생포로부터 동래, 김해, 웅천, 저제에 이르기까지 남부 해안선을 따라 16개의 진지를 구축하였다. 모든 진지가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 있었으며, 성을 쌓고 참호를 파는 등 오래 머무를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6월에 이르러 일본군이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와 신하들을 돌려보냈다.

명군은 이에 따라 경상도 지역으로 내려와 부대를 주둔시켰다. 이여송은 부대를 4천 또는 5천명 단위로 나누어 유정을 성주의 팔거현에 주둔하게 하고, 오유충은 선산의 봉계현에 주둔하고, 이영과 조승훈, 갈봉하는 거창에 주둔하게 하고, 낙상지와 왕필적은 경주에 주둔하게 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을 공격할 계획은 없었다.

조선관군 역시 일단은 일본군을 추격하여 경상도 지역으로 집결했다. 도원수 김명원, 순변사 이빈, 전라병사 선거이, 충청병사 황진, 전라방어사 이복남, 순찰사 권율 등이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영남으로 모여들었고, 지역 의병들도 합류했다.

이들은 일단 창녕과 의령에 진지를 쳤다. 권율이 거름강을 건너 전진하고자 하자, 곽재우와 고언백이 “적의 기세는 한창 치성한데 우리 군사는 오합지중이 많고, 또 군량도 없으니 가볍게 전진할 수 없다”하며 공격을 미뤘다. 이 시기 진주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은 명나라 장수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일을 하는 임시 파견원으로 상주에 있다가 일본군이 진주로 향하였다는 말을 듣고 급히 진주로 돌아갔다.

일본군이 진주성으로 몰려갈 당시 조선군은 진주성 수성과 공성에 대한 의견이 엇갈렸다. 진주성을 비우자는 공성론을 주장한 주요 인물은 도원수 김명원, 순찰사 권율, 의병장 곽재우 등이다.2)

관군을 담당하고 있던 도원수와 순찰사는 조명연합군의 실질적인 작전권을 행사하였던 명나라 군대의 입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대의명분 상 조선을 돕기 위해 파병된 명군과 군사작전 상의 갈등을 빚는 것은 빠른 전쟁종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진주성에 도착한 전라병사 선거이가 권율의 명에 의해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자신의 병력을 빼서 한양 방향으로 향했던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3) 따라서 조선관군은 2차 진주성전투에 합류하지 않았고, 진주성을 응원하기 위해 진주성으로 향하던 선거이는 관군을 이끌고 함양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반해, 진주성 수성을 주장한 사람은 국왕이었던 선조, 우도절제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등이다.4) 국왕 선조를 제외한 이들은 조선군으로서의 관직은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의병장 출신이다. 이들이 지휘한 병력은 대부분이 의병으로 조직되어 있어 각자 독자적인 부대 지휘권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군의 전략에 따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진주성 주둔관군 및 의병
 
이에 따라, 진주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을 비롯한 진주성 주둔군과 진주성 방어를 위해 자발적으로 진주성에 들어온 조선군과 의병이 일본군 침략에 대비하였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김해 부사 이종인, 사천 현감 장윤, 거제 현령 김준민 등이 진주성에 들어갔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복수 의병장 고종후, 태인의병장 민여운 등이 합세하였고, 충청도 지역에서는 충청병사 황진, 해미현감 김명세, 태안현감 윤구수, 당진현감 송제, 보령현감 이의정 등이 합류했다.

진주성을 방어하기 위한 진주 수성군은 정확한 병력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최소 3,000명5)에서 최대 6,000명6) 정도였다. 진주주둔 관군 3,000명과 의병 3,000명 전체 6,000명으로 추정된다.

일본군 대병력이 진주성을 향해 몰려오고, 관군과 명군의 지원이 없을 것으로 확인된 시점에서도 진주성 주둔 관군과 전라도 및 충청도에서 온 의병은 2차 진주성전투를 준비하였다. 1차 진주성전투와 달리 대규모 일본군이 공격해오는 상황에서도 진주성 주둔군이 진주성에서 철수하지 않고 전투에 임한 이유는 다음과 같을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진주성에는 김시민이 훈련시킨 정예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었고, 이들은 김시민이 훈련시킨 전략을 숙지하고 전투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7)

둘째, 진주성 수성군은 1차 진주성전투에서의 승전한 경험이 있기에 전투에 대한 사기가 높았다. 진주성에 거주하고 있던 일반백성이 동요하지 않고 성 안에 남아 전투에 도움을 주었던 것은 전투에 또다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줬을 것이다.

셋째, 1차 진주성전투에서 일본군에 대해 심한 타격을 가함에 따라 경상우도와 전라도로 일본군이 다시 진출을 시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경상도 지역 대부분은 조선관군과 의병의 지역이 되었고, 이러한 결과에 따라 일본군의 보급로가 차단되어 임진왜란의 종료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들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넷째, 국왕 선조의 뜻이 진주성 수성이었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진주성 방어를 위한 지휘권은 가장 관직이 높은 우도절제사 김천일이 맡았다. 진주성에는 방어에 필요한 무기와 양곡이 충분히 저장되어 있었다. 김천일과 서예원이 곡식을 점검하였을 때, 수십만 석이 비축되어 있었다.

이에 모든 장수들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성은 높고 튼튼하며, 식량은 갖춰 있고 병기도 충분하니, 여기는 바로 오늘날 목숨을 바칠만한 곳이로다”하고 전의를 불태웠다. 그리고 각 장수별로 임무를 나누고, 병력을 분할하여 방어에 들어갔다.
 
제2차 진주성 전투 참여 수성군. 자료: 오종록, 2010, 「진주성 전투의 지휘체계와 전투과정」,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pp.104~105; 지승종, 2010, 「16세기말 진주성 전투의 배경과 전투상황」,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pp.57~58..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1) 이들 일본군 중에서 조선에서 전투를 벌인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부대는 번외1번 15,000명뿐이다.
2) 김강식, 2010, 「충렬록에 나타난 癸巳晋州戰 전사자의 추숭과정과 의미」,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pp.328~329.
3) 선거이는 김천일에게 “적과 우리가 많고 적음이 엄청나게 차이가 있으니 물러나 보존함만 못하다”고 하였다(조선왕조실록, 「6월 29일 함락된 진주성 싸움의 자세한 경과」, 선조 40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7월 16일(무진) 5번째기사)
4) 김강식, 2010, 「충렬록에 나타난 癸巳晋州戰 전사자의 추숭과정과 의미」,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pp.328~329.
5) 창의사 김천일의 장계에는 “15일에 전라병사 선거이, 조방장 이계정, 충청병사 황진, 조방장 정명세, 경기 조방장 홍계남, 경상우병사 최경회, 복수의장 고종후들이 잇달아 달려왔는데, 다음날 전라순찰사 권율이 전라병사와 각항의 전령 등에게 전령하여 모두 나아오게 하므로 제장이 일시에 달려가니 성중이 흉흉하여 이 때문에 일이 누설되었습니다. 신이 최경회, 황진 등과 더불어 겨우 수합하였으나 3,000명에 불과하였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조선왕조실록,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의 방어 준비 상황을 보고하다」, 선조 40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7월 10일(임술) 9번째기사)
6) 김천일이 말한 3,000명의 병력이 외부에서 진주성을 구원하러 들어온 의병일 수 있다.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는 관군이 3,000명 정도로 가정하면 총병력은 6,000명이 된다.
7) 김천일과 최경희이 서예원을 불러 창고의 곡식을 계산하니 거의 수십만 석이 되었다. 모든 장수들이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성은 높고 물은 험하며, 양식은 풍족하고 기계도 넉넉하니, 이야말로 오늘날 힘을 바칠 시기이다.” 하고 말하였다(조경남, 1593, 󰡔난중잡록[亂中雜錄]󰡕, 권2, 1593년(癸巳年) 6월 15일자, 난중잡록은 조선시대 선조 때 남원(南原)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이 1582년(선조 15)에서 1610년(광해군 2)까지 왜병과 싸운 사실 등을 기록한 개인 저작이다.)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주요이력: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중앙대 행정대학원장.[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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