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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17. 제3기(1592. 10. - 1593. 6.) : 진주대첩과 그 후의 조선군 공세 ⑤
박희봉 | 승인 2021.07.02 21:31
해전

[박희봉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조선 수군은 1593년 1월 10일 웅포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과의 정면승부를 철저히 외면했다. 일본 수군은 넓은 바다에서의 조선 수군과의 대치를 피하고, 조선 수군을 해안가에 왜성이 쌓여있는 곳으로 깊숙히 유인하려 하였다. 조선수군은 이러한 일본군의 전략에 유의하면서 화포를 이용한 공격 지점을 찾았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로써 해전은 지루한 대치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남해안 각지에 왜성을 쌓아 방비를 하는 동시에 조선 수군의 해안선 진출을 방해했다. 웅천에서의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는 3월까지 계속되었다. 이순신의 장계에 따르면 이때 전라도 수군은 4만여 명을 웅포해전과 전라도 해안선 방어에 투입했다.

6월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효과적인 경상도 바다 진출을 위해 한산도에 진영을 구축했다. 이후 조선 수군은 거제도, 진해, 가덕도에 있는 일본 수군과 대치하면서 일본군의 해로를 차단했다. 일본군의 철저한 피신으로 특별한 전과는 올리지 못했지만 전라도와 경상도 제해권은 완전히 조선 수군이 장악하였다.
 
임진왜란 개전부터 제2차 진주성전투까지 1년 2개월 간 일본군 사망자수
 
<표 5> 일본군 9개 부대의 사망자수 (1592년 4월 – 1593년 6월 초, 1년 2개월 간).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주: 1) 일본군 병력수 중 ① 정원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서 상의 인원이고, ② 일본군 잔여병력수는 조선내 잔여병력을 모아 1593년 6월 2차 진주성공격을 위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린 작전명령서상의 편제 병력수를 의미한다.
2) 7번대의 파견 병력수는 毛利輝元의 30,000명이다. 잔여 병력 수는 毛利輝元의 3,000명에 毛利秀元의 13,600명의 병력을 더한 것이다.
자료: 參謀本部編, 1924, 󰡔日本戰史 朝鮮役󰡕, 附記, 村田書店.
 
 <표 2>는 일본군 1번대에서 8번대까지 1차로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조선의 각 지역에 파견된 일본군 병력수와 파견된 지 1년 2개월 후 제2차 진주성공격을 위해 점호 시 남은 병력 및 병력손실 현황이다. 임진왜란에 파견된 일본군수와 1년 2개월 후에 남은 일본군수를 비교하면,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 즉 임진왜란 각종 전투에서 일본군이 대부분 승리했다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다. 1592년 4월 1차로 조선에 도착한 15만 8,800명의 일본군은 1년 2개월 후인 1593년 6월 2차 진주성전투를 위해 인원을 점호한 결과 45%에 달하는 7만 1,368명이 사망했거나 큰 부상으로 전투력을 잃고 후송되었다. 이것은 임진왜란 초기 평양성이 함락당한 2개월 동안은 일본군이 각종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그 이후에는 조선 전역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 일본군이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부산성과 동래성전투를 시작으로 충주 탄금대전투, 한양성 함락, 4차에 걸친 평양성전투 등 임진왜란 중 가장 많은 전투기록을 가지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번대 사망률은 60%가 넘는다. 1만 8천여명의 병력 중에서 1만 1천여명이 죽었다. 일본군 1번대의 사망률은 임진왜란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잘 나타낸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 1번대는 제4차 평양성전투 이전에는 일방적으로 조선군을 압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평양성전투에서 명군 장수 이여송이 평양성전투 과정에서 일본군의 후퇴를 용인한 결과 일본군의 사상자는 많지 않다. 제4차 평양성전투에서 참획되거나 불에 타 죽은 일본군 수는 많게 잡아야 2,000명을 넘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군 1번대는 평양성에서 후퇴한 이후 1593년 6월 진주성전투가 있기 전까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군 1번대 9천여명은 1년 2개월 동안 어디에서 어느 전투로 사망한 것일까? 이것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 1번대가 조선군과 각종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그 만큼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조선군이 일본군을 맞아 결사적으로 항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임진왜란 중 전투기록이 별로 없는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 지역에서도 각각 파견병력의 53.8%, 56.35%, 37.47%가 사망했다. 반면 함경도에서 전투를 벌인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 2번대는 정문부가 지휘한 북관대첩을 치르면서 사망률이 36.70%이다. 황해도와 강원도, 충청도에서 역사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치열한 전투가 발생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일본군이 각 도에 파견되어 군대를 모집하고 병량을 약탈하는 과정에서 지역을 방어하던 조선군의 역습을 받았던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서에 전라도를 점령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금산성에 주로 주둔하던 일본군 6번대 15,700명은 1년 2개월 동안 6,956명, 44.3%의 병력이 손실되었다. 일본군 6번대가 치른 웅치전투, 이치전투, 고경명의 금산성전투, 조헌과 영규의 금산성전투 등을 포함한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면서 짧은 기간 동안 엄청난 사망자를 냈다.
 
<표 6> 경상도지역 일본군 부대의 사망자 (1592년 4월 – 1593년 6월 초, 1년 2개월 간)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 주: 일1592년 4월에 기록된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의 참전병력수는 1,000명인 반면, 1593년 6월에 기록된 잔여 병력수가 1,097로 오히려 늘어났다. 따라서 가토 미츠야스 부대의 사망자 수를 고려하여 다른 부대로부터 병력을 보급받은 것으로 추정하여 참전병력수를 1,747명으로 조정하였다. 또한 가메이 코레노리(龜井眞矩), 다니 모리토모(谷衛友), 昌原 11家 등이 지휘하던 부대의 참전병력은 경상도 지역 주둔군인 7번대와 9번대 평균 사망률(45%)을 기초로 조정하였다.
자료: 參謀本部編, 1924, 󰡔日本戰史 朝鮮役󰡕, 村田書店, pp.65~73 및 pp.257~262.
 
또한 경상도는 부산에서 대구를 거쳐 한양으로 병량이 이동하는 축선에 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전투도 많이 발생한 지역이다. <표 6>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임진왜란 초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서에 일본군은 7번대와 9번대 4만 1,500명이 경상도에 출병했고, 이중 1만 8,586명이 사망했다.

이밖에 일본전사에 기록되어 있는 경상도 지역 주둔군과 진주대첩 참전 기록을 더하면 일본군의 사망자는 훨씬 증가한다. <표 6>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상도에서 전투를 벌였거나 주둔한 기록이 명확하게 남아있는 일본군은 총 6만 5,544명이며, 이 중에서 사망자는 총 2만 9,164명으로 44.5%에 이른다. 이것은 경상도에서 크고 작은 수많은 전투가 발생한 결과로 파악할 수 있고, 일본군의 병참보급 과정에서 조선군 및 의병과 수많은 전투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의 육상전투 기록은 임진왜란 중 조선군과 백성들이 전국적으로 침략군인 일본군에게 끊임없이 도전하여 양측 모두 큰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것은 임진왜란에서 초기 2개월 간 일본군이 평양성을 함락할 때까지 일본군이 압도적인 군세로 전투에서 승리하는 과정에서도 조선군과의 치열한 전투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한양성 점령 이후 조선 8도의 완전한 점령을 위해 일본군 부대가 중·소규모 단위로 분리되었을 때 지역에 있는 조선군 및 조선백성의 저항을 받아 전국적으로 일본군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특히 1592년 10월 진주대첩으로 인해 일본군의 경상도 축선 상에 있는 보급로에 차질이 발생한 이후 일본군이 병참보급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은 조선군과 조선백성의 저항에 의해 일본군의 조선 8도 점령이 계획과 같이 원활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표 7> 지휘관별 일본 수군의 사망자수 (1592년 4월 – 1593년 6월 초, 1년 2개월 간).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주: *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서에 수군으로 편제되어 있던 병력.
**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서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나, 일본전사에 임진왜란 1차 출병 당시 수군으로 기록되어 있던 병력.
자료: 參謀本部編, 1924, 󰡔日本戰史 朝鮮役󰡕, 附記, 村田書店, p.95.
 
위에 있는 <표 7>은 일본전사에 기록되어 있는 지휘관별 일본수군의 병력과 사망자이다. 임진왜란 초기 1년 2개월 동안 일본수군 8,480명 중에서 32.3%에 해당하는 3,590명이 사망했다. 일본군은 육군과 해군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다.

일본수군은 바다에서만 전투한 것도 아니고, 조선수군과의 해전을 일본수군뿐만 아니라 육군도 함께 치렀다. 예를 들어, 수군으로 분류되어 있던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6월 5일 용인전투에서 일본군을 지휘하여 조선군에게 패배를 안기기도 했고, 1592년 7월 8일 한산대첩에서 이순신에게 무참하게 패배를 맛보기도 했다.
 
<표 8> 해전에서의 일본 수군 사망자수 (1592년 5월 – 159년 9월, 4개월 간).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 일본군 손실 전함 총수만이 기록됨에 따라 대선과 중선, 소선의 비율이 같은 것으로 산정함.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실제로 해전에서 손실된 일본군의 전함은 대선의 비율이 높음.
 
위의 <표 8>은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조선수군과의 해전에서 사망한 일본수군 병력을 추정한 것이다. 1592년 5월 4일 1차 출동으로부터 같은 해 9월 2일까지 4차례의 출동으로 일본 전함은 260척에 사망자는 3만 1,260명에 달한다. 해전에서는 조선수군에게 일본수군이 도저히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일본수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 하에 철저히 해전을 피했다. 따라서 이순신의 4차례 출동 이후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는 조선수군과 일본수군 간에 해전이 거의 없었다.

<표 9>는 일본 전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1592년 4월 임진왜란 초기부터 1593년 6월 2차 진주성전투가 있기 전까지 1년 2개월 동안 사망하거나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일본으로 후송된 일본군 병력을 추정한 것이다. 일본군 1번대에서 9번대까지의 기록은 일본전사의 기록이다. 7번대와 9번대를 제외한 경상도 주둔 부대는 일본 전사에 명시된 경상도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과 진주대첩에 참여한 부대의 사망자이다.

일본 수군 사망자는 일본전사에 기록되어 있는 일본 수군의 사망자만을 계산한 것이다. 일본군은 육군과 수군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만큼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해전에서 사망한 일본군은 수군만이 아니라 육군까지 포함되었을 수 있기 때문에 중복 계산을 피하기 위해 제외하였다.
 
<표 9> 추정 가능한 전체 일본군 사망자 (1592년 4월 – 1593년 6월, 1년 2개월 간).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 일본군 잔여병력으로 추정한 참전병력
** 일본군 참전병력으로 추정한 잔여병력. 참전병력과 잔여병력은 1번대-9번대 일본군의 평균 사망률 45%를 기준으로 추정하였다.
자료: 參謀本部編, 1924, 󰡔日本戰史 朝鮮役󰡕, 村田書店, pp.65~73 및 pp.257~262.
 
 그리고 일본전사의 기록에 의해 참전이 확실하지만 이상의 계산에서 제외된 일본군 예비대의 지휘관별 사망자를 계산했다. 단, 참전병력보다 잔여병력이 많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아사노 나가요시(淺野長慶), 오오타니 요시츠쿠 (大谷吉繼), 사노 료하쿠 (伊達政宗) , 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 등은 잔여병력을 기준으로 참전병력과 사망자를 추정하였다.

여기에서 참전병력과 사망자는 일본군 1번대에서 9번대의 평균사망률 45%를 적용하여 추정하였다. 그리고 오오다 카즈노리(太田一吉), 미즈노 다다시게(水野忠重), 다테 마사무네(佐竹義宜) 등은 참전병력만 기록되어 있는 까닭에 잔여병력과 사망자를 평균사망률 45%를 적용하여 추정하였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서에는 있으나 임진왜란에 참전이 확인되지 않은 장수에 대해서 일본 구글로 참전여부를 확인한 결과 5명의 장수의 참전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병력을 참전한 것으로 추가하였다. 그리고 이들 병력 역시 일본군 평균사망률 45%를 적용하여 추정하였다.

이상과 같이 일본전사에 참전이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는 일본군 사망자를 위와 같이 계산했을 때 일본군은 22만 4,774명이 참전하였고, 임진왜란 초기 1년 2개월만에 10만 586명이 사망 또는 후송되었다. 임진왜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일본으로 후송된 병력은 실제 많지 않을 것이므로 사망 또는 후송자는 대부분 사망한 것으로 판단해도 무방할 것이다.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주요이력: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중앙대 행정대학원장.[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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