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실천 교육 김영삼
민추협과 1985.2.12총선
푸른한국닷컴 | 승인 2009.02.11 20:46

1985.1.18 신한민주당 창당, 1985.2.12 제12대 총선의 신당돌풍

민추협은 1984년12월 11일, 군사독재의 종식을 위해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여 선거투쟁을 전개하기로 선언한데 이어 12일 상임운영위원회를 열고 민추협 측 실무대표로 이민우 김녹영 조연하 최형우 김동영 박종률 등 6명과 비 민추협 연합세력 측에서 신도환 이기택 송원영 김수한 노승환 박용만 등 6명을 신당협상 실무대표로 선정한 뒤 민추협 및 각계의 정통 민주세력을 중심으로 정통 선명 통합신당을 창당하기로 결의했다. 이민우를 소집책으로 한 신당창당 12인준비위원회는 창당원칙으로 ▴민주세력 중심의 정당 ▴선명한 민주정당 ▴민추정신의 계승 및 노동자, 농민 등 각계와의 연대를 지속, 강화하며 대변하는 정당이 된다는 3개항의 창당원칙을 발표했다.

그러나 민추협의 신당참여 문재는 선거참여와도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문제였기에 처음에는 선거거부파와 참여파로 양론이 팽팽하게 나눠졌다. 거부파는 총선참여 자체가 전두환 정권을 인정해 주는 것이며, 당시의 선거제도나 촉박한 일정으로 볼 때 선거에 참여해도 참패가 분명해 결과적으로 전두환정권의 들러리를 서 주는 꼴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참여파에서는 “총선에 불참하더라도 현재의 언론구조 아래에서는 효과적인 거부운동이 불가능하다. 총선거부란 선언적 의미밖에 가지 못하는 것이며 총선을 통한 민주화투쟁이 훨씬 적극적인 대응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민주화의 불씨를 겨우 살려 민추협을 만들었는데 총선참여를 놓고 의견이 갈리면서 갈등양상까지 빚어진 것이다.

12월 7일 서울 종로 한일관에서 민추협 운영위 전체회의가 열렸고 대세는 참여 쪽이었지만 최종 결정은 의장단에 일임하기로 해 다음날인 8일, 김영삼은 비민추협을 대표해서 정치규제에서 해금된 이철승과 상도동에서 만나 국민이 원하는 참신한 신당을 창당한다는데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이로부터 사흘 뒤인 12월 11일 김영삼과 김대중고문, 김상현 공동의장 대행의 이름으로 민추협의 신당 및 총선참여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이다. 당시 미국에 있던 김대중 고문은 애당초 민추협이 신당을 창당하고 총선에 참여하는 것에 소극적이었으나 총선참여는 이미 대세였다.

신당창당에 참여한 세력은 크게 민추협 세력과 비 민추협 세력으로 나누어졌다. 민추협은 김영삼과 김대중계로, 비민추협은 이철승계, 신도환계, 김재광계 등으로 나누어졌다. 이렇게 내부는 복잡한 갈래와 계보관계로 얽혀 있었지만 모두의 마음속에는 “또다시 분파작용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당창당 발기 12인 준비위원회는 발기인 선정기준으로 ▵민주화 투쟁을 하다 구속된 인사 ▵정치피규제 됐던 자 ▵피규제 됐던 전직의원 및 신당참여를 희망하는 현직의원 ▵재야 학계, 언론계, 법조계, 종교계, 문화계, 예비역 장성, 관계, 노동계 민주인사 등 4개항으로 정했다. 전두환 정권은 과거 정당의 이름을 다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민추협은 17일 신당 명칭을 ‘신한민주당’으로 결정했다. 새 야당의 명칭을 ‘신한민주당’으로 정한 것은 유신독재에 맞서 싸워 온 정통야당 ‘신민당’을 계승한다는 뜻이었다. 신한민주당은 약칭으로 신민당이 되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선명야당의 이름으로는 적격이었다.

정치규제자 3차 해금을 계기로 재야 단일신당 창당추진 작업이 궤도에 올랐다. 1984년 12월 20일, 민주화추진협의회(김영삼, 김상현 공도의장)측과 구비주류연합전선(이철승, 신도환, 이충환, 김재광계)측 및 해금인사, 민주인사 등이 주축이 된 신한민주당 창당발기인 대회가 서울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121명의 발기인 중 115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창당준비위원장에 이민우씨, 부위원장에 김녹영, 조연하, 이기택, 김수한, 노승환, 박용만씨를 추대했다.

창당발기인들은 발기취지문에서 “국민여망에 부응하여 재야의 모든 민주인사들이 민주정당을 창당, 이 땅에 참된 문민정치를 확립키 위해 뜻을 모았다”고 창당 취지를 밝혔다. 창당발기인 대회 하루 전인 19일에는 민한당의 김현규 정책심의회 의장을 비롯하여, 허경만, 서석재, 박관용, 김찬우, 최수환, 손정혁, 홍사덕 등 현역의원 9명과 김형래, 김한수, 유제연 등 해금영입 전직의원 3명 등 모두 12명이 민한당을 집단 탈당하고 신당참여를 선언했다.

1985년 1월 7일, 창당발기인 대회를 마친 신한민주당은 외교구락부에서 창당준비위원장단 회의를 소집, 당헌당규 초안 작업을 착수, 당 지도체제를 일당 집단지도체제로 하고 선거를 치룬 뒤 당지도체제 문제를 재론키로 의견을 모았다.

신한민주당은 1985년 1월 18일, 서울 중구 장충동 앰배서더 호텔에서 창당대회를 갖고 이민우 창당준비위원장을 총재로, 김녹영, 이기택, 조연하, 김수한, 노승환씨 등 5인을 부총재로 선출했다.

신한민주당은 창당선언문에서 “민주화의 열망과 민주적 역량을 총집결, 민족의 주체세력으로 모든 반민주적 세력과 요소들을 과감히 제거하는데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대의원 532명이 참석한 가운데 가진 이날 창당대회는 ‘집단’과 ‘단일’이 혼합된 지도체제를 근간으로 하되 당 운영을 총재단 합의제로 하고, 총선 후 6개월 내에 정기전당대회를 열어 당 체제를 개편하기로 한 당헌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정강정책으로는 ▵대통령제와 대통령직선제, 임기4년 1회에 한해 중임을 허용하는 통치기구 ▵어떤 형태의 독재와 독선을 배제하고 주권재민의 원칙수호 ▵지방자치제 조기실시 ▵군의 정치적 엄정중립을 채택했다. 신한민주당은 또 이날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자생 민주정당으로 평화적 정권교체 ▵민주한국의 장애인 어떤 폭력도 배격하고 투쟁한다. ▵12대 총선의 승리 등을 다짐하는 6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신민당은 창당 직후인 85년 1월 23일 김재광을 본부장으로 하고, 박종률 김수한을 차장으로 하는 선거대책본부를 구성한데 이어 28일 전국 91개 지역 선거구에 93명을 공천(2개 지역에는 복수공천)하고 전국구 후보 30명을 공천했다.

신민당은 창당이 늦어 본격적인 선거운동도 시간에 쫓겨 고전했다. 그러나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이 실질적으로 선거를 주도하고 김대중씨가 2월8일 귀국하는 등 상징성 있는 지휘부가 형성된데 이어 선거전이 개막되면서 신민당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서울지역 합동연설회가 2월초부터 개시되면서 선거열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 특히 ‘정치1번지’로 통하는 서울 종로. 중구 연설회장에서는 10만여 청중이 운집, 12대 총선 유세기간 중은 물론 1971년 대통령선거 이후 최대의 유세전이 벌어졌다.

성북구의 경우에도 한때 사형선고를 받은 이철 후보가 “정치 사형수 성북에 돌아오다”라는 케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연설내용에서 발언의 성역이 깨어지는 등 강도 높은 발언이 속출하면서 시종 당시 민정당 정부의 정통성과 비정에 대한 공격이 거세져갔다. 5공화국의 보도지침에 손발이 묶인 언론들이 보도하지 못했던 애기들이 유세장에서 신민당 후보들의 입을 통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연설회장 청중도 날이 갈수록 불어 웬만한 연설회장도 몇 만 명씩 모였다. 신민당 측 후보가 김대중, 김영삼씨 문제, 군의 정치개입불가론 등을 발언할 때면 청중들은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청중들은 5년 동안 굶주렸던 집회의 자유를 만끽하는 통쾌함과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분노를 마음껏 분출한 것이다.

2.12총선결과 신민당은 서울의 전원당선을 비롯하여 전국 대도시에서 압승을 거둠으로써 창당 3주일 만에 제1야당이라는 신당돌풍을 일으키게 되었다. 개표결과 민정당은 지역구에서 87석, 전국구에서 61석을 차지 해 148석을, 신민당은 지역구 50석, 전국구 17석으로 총 67석을 차지해 엄청난 ‘신당바람’을 일으켜 11대의 제1야당 민한당을 꺾고 제1야당으로 부상한 것이다. 신민당은 1월 18일 창당한지 불과 25일 만에 선거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한편 민한당은 지역구 26석, 전국구 9석으로 도합 35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신민당이 신당돌풍을 일으킨 가장 큰 이유는 체제에 안주해 온 제도권 정당에 대한 국민들의 회의와 반발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다시 말해 자생야당의 기치를 높이는 신당에 대한 기대로 나타났으며, 야당다운 야당이 있어야겠다는 국민의식이 집권당의 카운트파트를 국민의 손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당시 미국과 서구의 주요 일간지들은 12대 총선결과에 대해 “한국의 유권자들이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신민당이 압도적인 지지를 얻게 된 또 하나의 주동력은 유세현장의 열기에서 비롯됐다. 타당후보에 비해 현저하게 직공법을 구사하며 당시 민정당 정권을 비판한 신민당 후보들의 연설에서 이미 ‘위험수위론’은 의미를 상실했고, 유세장에 몰려든 도시청중들은 갈채와 함성으로 신민당의 주장에 공감하는 현상을 나타냈다. 특히 당시 장외 정치권으로 분류됐던 재야정치세력과 학생세력이 유세장이라는 매개현장에서 하나의 ‘힘’으로 집결됐고 여기에 야성(野性)유권자까지 가세, 신민당지지 세력의 저류를 이룬 것으로 볼 수 있다.

2월 18일 신민당은 국회의원 당선자대회를 열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다짐했다. 신민당은 또 2월 27일 기자회견을 열고 ▵부정선거 책임과 처벌 ▵양심수 및 구속자, 학생 등의 석방 ▵김대중,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의 사면, 복권 및 가택연금 등 정치탄압 즉각 중지 ▵ 언론자유 회복 ▵대국민 이간 등 공작정치 중지 등 5개항의 정치적 현안의 해결을 촉구했다.

한편 민한당으로 당선된 황낙주씨 등 29명이 4월3일 민한당을 탈당, 신민당에 개별 입당한데 이어 이중재, 이용희, 이태구씨 등이 신민당에 입당함으로서 실질적인 야권의 통합이 이루어 졌다. 이로써 신민당은 헌정 이후 최대의석인 103석을 확보, 거대 야당으로 발돋움하는 한편 제5공화국이 지향하는 다당제를 무너뜨리고 실질적인 민정당, 신민당의 양당제도로 환원시키는 대 역사를 일으키면서 민추협과 신민당은 향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을 위한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여 민주화 투쟁의 대 장정을 시작했다.

신민당은 “창당 6개월 이내에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당의 지도체제를 개편한다.”는 창당대회 결의에 따라 8월 1일과 2일 시민회관 별관에서 임시전당대회를 열었다. 임시전당대회는 이민우씨를 총재로 재선출하고, 부총재에 최형우, 이중재, 양순직, 이기택, 김수한, 노승환 등 6명을 선출했으며, 김대중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을 상임고문에 추대키로 결의했다.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은 86년 2월 6일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입당했다.

기고: 정상대, 87년민추협사무부총장
(http://610.or.kr/museum/bbs/bbs/tb.php/tell6/62)

 


푸른한국닷컴, BLUKOREADOT

푸른한국닷컴  news@bluekroeadot.com

<저작권자 © 푸른한국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푸른한국닷컴의 다른기사 보기
icon최근 이슈기사
서병수發 '탄핵 불복론'에 野 좌불안석… 서병수發 '탄핵 불복론'에 野 좌불안석… "2030 지지 물거품 우려"
수상행군 훈련하는 해군병수상행군 훈련하는 해군병
기성용 사과, 연이은 악재속 “모든 것이 내 불찰이고 내 무지에서 비롯된 명백한 내 잘못”기성용 사과, 연이은 악재속 “모든 것이 내 불찰이고 내 무지에서 비롯된 명백한 내 잘못”
코로나19 발생현황,신규 797명·경기 전날 보다 대폭 증가코로나19 발생현황,신규 797명·경기 전날 보다 대폭 증가
icon가장 많이 본 기사
기사 댓글 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성북구 동소문동 2가 247 3층  |  TEL : 02-734-4530(代)  |  FAX : 02-734-8530  |  긴급연락처: 010-2755-6850
제호 : 푸른한국닷컴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아 01298  |  창간일 : 2010. 07. 20  |  발행·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전영준  |  마케팅이사 : 김혁(010-3928-6913)
Copyright © 2010-2021 푸른한국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ugsum@nate.com.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