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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대한민국은 「따뜻한 나라」가 아니었다.
어렸을 적부터 냉기(冷氣) 가득한 나라였고. 한기(寒氣)가 넘치는 나라였다.
씨앗은 박토(薄土0에 떨어질 수 있고, 옥토(沃土)에도 떨어질 수 있지만 바람과 비, 햇볕은 골고루 내려야 한다는 것은 어린 마음에도 있었다.
그래도 「국가란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제도」라는 말에는 어른이 되어서도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나와 대한민국간의 관계는 한 소년이 한 소녀에게 호감을 갖고 말 좀 붙여보려고 하지만 소녀는 아는지 모르는지 애서 쌀쌀히 대하는 그것이었다.
나도 강감찬장군의 병사 되어 요나라 군사와 싸우고. 나도 이순신장군의 부장되어 왜적을 무찔러 공을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춘향전에서 거지 이몽룡을 주모 월매가 박대하듯 그런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대한민국은 다른 사람에게는 잘 웃어도 주고 말도 건네고 안아주기도 하는 등 다정다감한 나라이다. 박정(薄情)한 대한민국이 나에게 웃어준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내가 소년이었을 때「옛날 종군이란 사람은 출세하기 위해 성문에 들어설 때 수비병이 통행의 표시로 천 조각을 잘라주자 내가 이다음에 이 문을 나설 적에는 높은 사람이 되어있을 터니 이런 천 조각은 필요 없다며 버린 것과 사마상여가 장안으로 떠나면서 성도의 승선교(升仙橋)를 건너며 다리 기둥에다 네 마리 붉은 말이 모는 수레를 타지 않으면 이 다리를 건너지 않겠다고 썼다라고 말을 할 때였다.
소년은 그 때 눈빛은 빛났고 몸은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그 다음부터 소년은 소금장사하면 비가 오고 밀가루 장사하면 바람 부는 날이 많았다. 오랜 후에 소년으로부터는 산천을 자주 찾는다는 애기가 들렸고 언제인가는 중늙은이가 됐다는 얘기도 돌았다.
19세기 러시아 작곡가 글랜카는 바다와 강과 운하가 많아 「아름다운 북쪽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도시 뻬쩨르부르끄를 떠나면서 마차에서 내려 「뻬쩨르부르끄여, 너는 나에게 한 번이라도 정당한 대우를 해 준적이 있느냐?」며 땅에다 침을 뱉었다는데, 그의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저 박태보가 인현왕후의 폐비를 반대하다가 장형을 당하고 그 독으로 노량진 객사에서 죽은 것과 저 권필이 광해군의 외척을 시로 조롱하다가 역시 장독으로 동대문 밖 주막집에서 막걸리 한 잔 먹고 죽은 것에 비하면 내 팔자는 핀 것이다.
또 어느 추운 겨울 동대문 쪽 성 밖에서 얼어 죽은 최북이나 삼청동 허름한 집에서 아내와 어린 딸을 뒤로 한 채 27살에 병들어 죽은 이언진에 비하면 나의 팔자는 늘어졌다 할 것이다.
돌아보면 나는 고향사랑이 나라사랑과 같다는 말을 믿어 소년으로 서울에 올라올 때 쇼팽을 본받아 고향 흙을 한 상자 담아와 부모님과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고향흙냄새를 맡으며 고생을 이겨내곤 했었다.
그래도 나는 대한민국이 열 손가락을 깨물어 어디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는 어머니의 마음을 지녔다고 보고, 미운 자식에게는 떡 하나 더 주고 사랑하는 자식에게는 한 대의 매를 더 때리는 교육법을 알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대한 나의 사랑은 「플라토닉 러브」임도 잘 안다.
푸른한국닷컴, BLUEKOREADOT
김성춘 kimmaeu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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