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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15. 제3기(1592. 10. - 1593. 6.) 진주대첩과 그 후의 조선군 공세 ③
박희봉 | 승인 2020.01.27 21:01
진주대첩 결과
 
박희봉 교수
[박희봉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진주대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점령 전략을 무력화시킨 분수령이 된 역사적 사건이다. 진주대첩은 목사인 김시민의 완벽한 전투준비와 리더십, 민관군의 합심, 전라도 및 경상도 의병의 긴밀한 협력체계에 의한 협력, 그리고 효율적인 무기 사용의 조화로 전투경험과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긴 전투이다.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전한 병력수만 놓고 보면 조선군 3,800명으로 30,000명이 넘는 일본군을 물리친 전투이다. 무엇보다도 전투준비를 완전히 갖춘 일본군의 대규모 주력부대가 육상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일본군의 병력 손실.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진주성전투에서 일본군의 사망자가 얼마인지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 일본은 1차 진주성전투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2차 진주성전투의 승전을 다루면서 김시민 목사의 존재와 1차 진주성전투의 패전을 암시하고 있다. 일부 사료에는 일본군의 말을 언급하면서 1차 진주성전투에서의 일본군 피해를 지휘관급이 3백 명, 병사가 3만여 명에 달한다고 하였다.1)하지만 일본군 사료를 통해 1차 진주성전투에서 발생한 일본군 사망자를 추정해 볼 수 있다.

1차 진주성전투에 참전이 확실한 일본지휘관별 참전 병력수와 사망자수의 근거는 위표 에서 보는 바와 같다. 위 표에 있는 일본군 지휘관 이외에도 일본군 15번대 소속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의 참전이 확실하지만 1592년 4월에 기록된 참전 병력수는 1,000명인 반면, 1593년 6월에 기록된 잔여 병력수가 1,097로 오히려 늘어났다. 이 때문에 계산에서 제외했다.2) 1차 진주성전투에 참여가 확실한 지휘관의 소속 병력의 참전 병력수는 총 10,500명이고, 이중에서 사망자는 3,911명으로 사망률이 37.20%이다.

1차 진주성전투에 참여한 일본군 소속이 임진왜란 초기에는 나고야에 주둔하고 있던 예비병력인 10번대에서 15번대 병력이고, 이들이 부산과 김해로부터 진주성으로 공격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은 1차 진주성전투 이전에는 중요한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1차 진주성전투 참여 이후에는 전투에서 입은 피해로 인해 부산지역으로 물러나 대규모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즉 1차 진주성전투에 참여한 일본군의 전체 인원 중에서 약 37%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을 근거로 하고, 1차 진주성전투에 일본군 참여병력이 30,000명이라고 가정하면,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약 11,1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사료의 추정치와 일치한다.
 
1차 진주성전투 참전이 확인된 일본군 주요 지휘관별 소속부대의 사망자.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출판사 논형)'
1차 진주성전투는 3,800명의 조선관군이 30,000명 이상의 일본군을 맞아 5일 동안의 주야에 걸친 전투로 1/3 이상의 일본군 병력을 사망시킨 김시민과 진주성 수성군의 확실한 승리였다. 이 승리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정복을 위한 전략에 깊은 차질을 빚게 한다.

즉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정복 1차 목표인 조선 8도 경영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인의 국가통합에 의한 지속적인 항전으로 분쇄되었고, 나고야에 주둔하고 있던 약 12만 명의 예비병력이 수로를 통해 평양성 이북에 상륙하여 조선을 완전히 점령하려는 계획은 이순신의 수군에 의해 좌절되었다.

나고야에 있던 예비병력은 끝내 부산지역 해안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지만 경상우도 조선관군과 의병의 활약과 진주대첩으로 인해 전라도 진출도 막히고, 북상하지 못했다. 진주대첩으로 인해 12만 명의 일본군 예비 병력은 경상도 지역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또한 부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일본군 보급로도 실질적으로 막히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군 보급로의 차단은 결국 한양 이북에서의 일본군 전투력에 차질을 빚게 하였다. 일본군이 1593년 1월 4차 평양성전투 이후 평양에 있던 군대뿐만 아니라 함경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등에서 활약하고 있던 전체 일본군을 후퇴시킬 수밖에 없게 되었다.

따라서 진주대첩은 일본군의 전라도 도발을 막은 전술적 의미의 전투일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전체의 전투상황의 틀을 바꾼 전략적 의미를 갖는 전투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1차 전투성전투의 승리는 8개월 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2차 진주성전투가 발생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진주대첩 이후의 일본군 상황
 
진주대첩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군의 경상도 점령에 대해 항쟁하고 있는 가장 큰 세력인 진주성을 일본군이 공격한 것이다. 만일 일본군이 진주성을 점령하였다면 경상우도의 조선군 세력이 무력화되었을 것이고, 경상우도의 의병세력도 약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진주성에서 패주하였다.

이 결과 경상도 내 조선군은 수세에서 공세로 바뀌고, 일본군은 공세에서 수세로 바뀌었다. 진주성전투의 승리는 조선 전역에서 조선군이 전투에서 일본군을 이길 수 있다는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경상도 내 일본군의 보급로가 차단됨으로써 조선전역의 일본군은 무기와 식량의 보급 없이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경상도 보급로의 차단은 조선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반적인 전투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다.

임진왜란 초반 각종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며 한양성과 평양성을 점령할 때가지만 해도 일본군이 조선 8도를 점령하고, 전쟁참여자들에게 영지를 나누어주겠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언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일본군은 낯선 땅에 들어와 언제 공격받을지 모르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전쟁이 시작된 지 6개월이 지나면서 식량부족과 추위로 많은 병사가 죽어갔다. 부산에서 한양성, 그리고 각 지역으로 이어지는 보급로가 끊어져 일본에서 오는 병량의 전달이 원활하지 못했고, 조선군의 지속적인 일본군 성채에 대한 공격으로 현지에서의 식량 확보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특히 따뜻한 남쪽에 살고 있던 일본군이 전쟁의 조기종결을 예상하고 전혀 추위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던 것은 당시 일본군이 참혹상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연구하고 있는 일본인 기타지마 만지(北島萬次)는 1593년 1월 당시의 일본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줄어드는 것은 쌀과 소금과 술과 생선, 겨우 있는 것은 좁쌀과 수수, 이제 말까지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吉野日記) (기타지마 127)
 
또한 임진왜란을 참관한 포르투갈인 루이스 프로이스도 1593년 1월 평양성 내부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병사들은 이미 지쳐 있으며, 사상자 수가 많고, 군수품은 모두 떨어졌다. 더욱이 무기들은 파손됐으며 보루 밖에 있던 일부 식량 창고들은 불에 탔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군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고 내일이라도 재공격을 감행한다면 우리는 전멸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더욱 걱정스러운 점은 평양과 서울 사이에 있는 일본군 성채들이 조선군의 계속 퍼부어대는 공격과 습격에 대비해 방어할 병사들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므로 원조를 바로 받을 수 있다는 희망도 없다는 사실이다. (118-9)
 
이상의 기록으로 1592년 10월 진주대첩 이후 1593년 6월까지 일본군이 처하게 된 상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조선군이 조선 전지역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점령지를 수복하였다. 둘째, 조선군에 의해 일본군의 보급로가 끊겼다. 셋째, 일본군의 무기와 식량, 의복이 바닥났다. 넷째, 한양성 이북의 일본군은 한양성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로써 일본군은 평양성이 함락된 직후 한양성 이북에 있는 전병력이 한양성으로 후퇴했고, 이어 한양성에서 부산지역으로까지 퇴각해야 했다. 다섯째, 일본군의 조선 전지역에 대한 점령을 실패했고, 남부지역만이라도 점령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진주대첩에서 제4차 평양성전투 이전까지의 전투 상황

 
1592년 6월 평양성이 함락되던 시기에 조선 전역에서 일본군의 진출을 막으려는 조선군의 반격이 시작되어 일본군과의 전투가 격렬해졌다. 진주대첩으로 인한 일본군 보급로의 완전한 차단은 일본군의 전투력을 상실하게 했고, 각 지역의 조선군은 보다 적극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여 일본군이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명나라 군대가 파견되어 평양성전투가 있기 전에도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겠지만 기록이 남아있는 대표적인 전투는 북관대첩, 제3차 성주성전투, 그리고 독성산성전투이다.

북관대첩은 1592년 9월 함경도에서 의병이 조직되어 정문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자 지역의 관군이 합세하여 경성과 길주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일본군의 함경도 점령을 도운 국경인, 국세필, 정말수 등을 처단하고,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 2번대를 함경도에서 몰아낸 전투를 말한다. 북관대첩에서 정문부군에는 경성부사 정견룡, 경원부사 오응태, 경흥부사 나정언, 고령첨사 유경천, 군관 오대남 등이 합류하여 3,000명의 조직화된 군대가 결성됐다. 정문부군은 일본군에 가담한 국경인, 국세필, 정말수 등이 장악하고 있던 길주성 이북의 명천, 경성, 회령, 경원 등을 우선 수복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1592년 10월 25일 정문부는 본격적으로 길주성을 포위함으로써 일본군과 대치했다. 이 과정에서 10월 30일 명천 인근에서 민가를 약탈한 후 석성령을 넘던 일본군 1,000명을 정문부 휘하의 원충서, 한인제 등의 조선군이 추격과 퇴각, 매복 등의 작전으로 괴멸시키는 등의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1월 1일 정문부는 길주성을 공격했다. 초기 직접적인 공성전에서 피해를 본 조선군은 길주성 주변에 군대를 매복시키고 길주성 인근에 있는 영동에서 민가를 약탈하는 일본군을 우선 공격하여 괴멸시켰다. 또한 길주성에서 빠져나와 조선군을 공격하려던 일본군을 강문우, 유경천 등의 조선장수가 물리치는 등 일본군을 압박했다. 결국 가토 기요마사는 11월 23일 길주성을 지키던 일본군에게 단천으로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길주성이 포위되어 일본군의 퇴각이 어렵게 되자 1593년 1월초 가토 기요마사는 정예병을 길주에 보내 길주성 철수를 감행했고, 이에 따라 조선군과의 격전 끝에 일본군은 큰 피해를 보면서 후퇴했다. 2월 4일 일본군은 함흥으로까지 병력을 철수시켰고, 이후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하고 있던 함경도 안변으로 집결하여 2월 말 한양성으로 후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 2번대는 전체병력 22,800명 중에서 39%인 8,864명이 사망했다.

3차 성주성전투는 1592년 12월 7일 시작됐다. 성주성전투는 경상도 의병도대장 김면과 의병대장 정인홍이 지휘하였다. 또한 전라도 우의병장 최경회와 전라도 좌의병장 임계영이 전투에 참여하였다. 경상·전라 연합 의병군은 7일 동안 주야로 성주성을 공격했다. 일본군도 성문을 열고 나와 야전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전라도 의병부장 장윤은 개령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성주성 일본군을 돕기 위해 출동하는 것을 개령과 성주 사이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함으로써 성주성을 고립시켰다. 12월 14일 조선 연합 의병군이 최후 공격을 가했지만 결국 성주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성주성 일본군은 성 안에만 주둔하고 있다가 1593년 1월 15일 개령으로 철수했고, 김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함께 선산 방면으로 철수했다.

독성산성전투 1592년 12월 11일 전라감사 권율이 경기도 오산의 독성산성에서 경기도 지역의 일본군을 물리친 전투이다. 웅치와 이치전투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방어해 낸 권율은 휘하 장수 선거이, 소모사 변이중, 조방장 조경, 의병장 임희진과 변사정, 승병장 처영 등을 비롯한 1만 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다 수원 인근의 독성산성에 주둔했다.

일본군은 한양성의 후방 연락방과 보급로 문제를 인식하고 2만 명의 군사를 뽑아 오산, 관천, 용인 등지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권율은 소수 병력을 타격조로 편성해 수시로 일본군의 측면을 교란시켰고, 일본군은 직접적인 공격 대신에 성 안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막아 조선군을 압박했다.

조선군은 야간에 제방을 막고 있던 일본군을 기습하여 급수원을 확보하였고, 전리도 도사 최철견이 의병을 모집해 독성산성에 있는 조선군을 응원하였다. 일본군은 지속적인 조선군의 습격과 장기전의 부담감으로 산성에서 철수하였다. 이로써 조선군은 경기도 일부를 수복하였고, 한양성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후방에서 압박하였다.

제4차 평양성전투
 
1592년 1월 6일부터 9일까지 조·명연합군과 일본군 간에 평양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 참여한 조선군은 도원수 김명원, 우방어사 김응서, 좌방어사 정희현,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 황주 판관 정화 등이 이끄는 조선관군 8,000명과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군 2,200명으로 총 1만 200명이다. 명군은 총사령관인 경략 송응창, 제독 이여송, 중협대장 이여백, 좌협대장 양원, 우협대장 장세작, 선봉장 사대수 등이 이끄는 4만 3,000명이 참여했다.

반면,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번대 1만 8,000명이다. 당시 일본군은 병량의 보급에 문제가 있었고, 오랜 전투로 인해 피로와 추위에 지쳐있었다. 더욱이 조·명연합군의 위세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황해도 봉산에 주둔하고 있던 오오토모 요시무네(大友吉統)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여 일본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1월 6일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일본군은 성에 올라가 방어하였고, 모란봉 주변에 1천명의 조총수를 배치하여 사격을 가하였다. 명나라 부총병 오유충과 조선 승병 부대가 처음으로 공격을 시작해 못 이겨 퇴각하는 척 하자, 일본군이 성을 넘어 쫓아오는 것을 다시 반격하여 승리했다.

1월 7일 오전에 명군이 3개 진영으로 나뉘어 보통문을 총공격했다. 일본군이 성문을 열고 나와 명군을 기습하고 백병전을 치렀으나, 패하여 성안으로 돌아갔다. 조·명 연합군은 본진을 보통문 앞에 전진 배치하고, 정희현과 김응서의 기병대가 일본군을 유인하였으나 일본군이 응하지 않았다.

1월 8일 조선군은 이여백과 함께 남쪽 성을, 명군은 서쪽 성을 공격하기로 하고 총공격을 하였다. 명군은 대장군포, 위원포, 자모포, 연주포, 불량기포 등 수많은 대포들을 평양성에 집중 사격하고 평양성 서남쪽 함구문은 명군의 조승훈과 조선의 이일, 김응서의 8,000명의 군사가, 칠성문은 장세작이, 보통문은 양호가, 모란봉은 오유충과 사명대사의 승병 2,200명이 공격했다. 이여송이 먼저 서에 오르는 자에게 은 50냥을 주겠다고 하자, 남방장수 낙상지가 먼저 성벽을 오르고 그의 군사가 뒤따라 올랐다. 이에 일본군은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내성으로 물러났다.

조·명연합군이 외성과 읍성을 함락시키고 중성으로 돌입해 일본군을 만수대와 을밀대로 압박했고, 일본군은 풍월정 아래에 굴을 파 격렬히 저항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연광정 토굴에 있었다. 양측에서 사상자가 많아지자 이여송은 군사를 물리고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협상을 제의했다.

이여송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우리 병력으로 너희들을 모조리 없애버릴 수 있으나 사람의 목숨이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너희들의 살 길을 열어주려 하니 물러나라”는 뜻의 편지를 전달했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꼭 물러갈 터이니 뒷길을 차단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여송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여송은 조선 측에도 일본군의 퇴로를 끊지 말라는 명을 전달했다. 이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는 1월 9일 새벽에 퇴각했다. 이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일본군 1,285명을 참획하고, 포로 2명, 불타 죽은 자 수백명, 조선인 포로 1,285명 구출, 말 2,85필, 군량미 3천석을 노획했다. 조·명연합군 측도 1천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또한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공격하여 60여명을 참살했고, 황주판관 장엽은 90여명의 수급을 베었다.

평양성전투 이후 평안도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 1번대와 황해도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 3번대, 그리고 개성과 고양 등 경기도 북부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 6번대는 모두 빠르게 한양성으로 철수했다. 한양성으로 퇴거할 당시까지 일본군 1번대는 전체병력 18,700명 중에서 65%인 12,074명이 사망했고, 황해도를 점령하고 있던 구로다 나가마사의 일본군 3번대는 전체병력 11,000명 중에서 54%인 5,918명이 사망했다.

*

1)“갑오년 강화 때 왜적이 말하기를 ‘진주의 싸움에서 그들의 將官 죽은 자가 3백 명, 군사 죽은 자가 3만 명이므로 반드시 그 보복을 한 뒤에야 강화를 논의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金時讓이 1612년(광해군 4년)에 쓴 涪溪記聞에서 인용된 글이다(박용국, 2011: 344).

2)加藤光泰의 소속 부대원의 수가 증가한 것은 다른 부대인원을 편입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요시가 발령한 작전명령서 상의 진주성 공격인원(2)으로 (1)과 (2)의 차이를 사망자수로 추정함
자료: 參謀本部編, 1924, 󰡔日本戰史 朝鮮役󰡕, 村田書店, pp.65~73 및 pp.257~262.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 박희봉 교수: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중앙대 행정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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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  hbpark@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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