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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봉의 임진왜란 이야기]13. 제3기(1592. 10. - 1593. 6.) 진주대첩과 그 후의 조선군 공세 ①
박희봉 | 승인 2019.11.05 20:32
김시민 목사
 
박희봉 교수
[박희봉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김시민은 1554년 충청도 목천현(현재 천안시)에서 태어나 1578년에 24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3년 여진족 이탕개가 회령(會寧)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토벌하였고, 그 공으로 훈련원 판관이 되었다. 이때 그는 군대 개혁 및 강화에 대한 건의를 병조에 제출하였으나 평화로운 시기에 군기를 강화할 필요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질타하자 이에 젊은 혈기에 분개하여 사직한 바 있다.

김시민은 1591년 진주판관이 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목사 이경이 병사함에 따라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진주목사로서 김시민은 성민을 안심시켜 피난하였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으며, 성채를 보수하고, 군사체계를 갖추어 군사를 훈련시키고 각종 무기를 준비하였다.

김시민은 진주에만 머무르지 않고 경상좌도의 전지역을 대상으로 군사를 출동시켜 일본군을 토벌한다. 5월 말 일본군이 사천을 점령하고 진주를 침범하려 하자 곤양군수 이광악, 상주판관 정기룡, 의병장 곽재우와 이달 등과 합세하여 일본군을 도중에서 습격하였고, 패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고성과 창원을 수복하였다.

6월 말에서 7월 초까지 고성에 있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그 결과 사천, 고성, 김해 등 지역을 회복하였다.1) 김시민은 이러한 공으로 1592년 7월 26일 종5품 판관에서 정3품 진주목사로 파격적으로 관직이 승진되었다.2) 9월 8일 김시민은 의병장 김면의 요청을 받아 1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김산 서쪽에 진을 쳤고, 9월 16일 사랑암에서 일본군 수백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로 인해 일본군이 김산과 지례에서 물러났다.

또한 김시민은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낸 공로로 당상관인 통정대부 또는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었다.3) 즉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한 달 후인 5월부터 9월까지 김시민은 진주에만 머물지 않고 고성, 사천, 진해, 거창, 김산, 지례 등 경상우도 전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고, 낙동강 건너 영산전투에 참전한 기록도 있다.4)

이러한 전공으로 판관에서 목사를 거쳐 경상우병사가 됨으로써 실질적인 경상우도 전체의 조선군 작전권을 갖게 된 것이다. 특히 김시민이 진주에서 직선거리 약 150km나 떨어져 있는 김산(金山)까지 출격했다는 것은 잘 훈련된 기마병을 적절히 이용한 것으로 이해된다.5) 김시민은 진주판관으로 임명된 이후부터 전투준비를 철저히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군의 제1차 진주성 공격 이유

일본군이 1592년 10월 진주성을 공격한 이유는 명백하다. 당시 경상도 내 일본군 점령지역은 부산에서 양산, 밀양, 언양, 김해, 문경, 성주, 상주 등 경상좌도이다. 낙동강 서쪽의 경상우도는 일본군이 점령한 적이 없다. 일본군은 부산에서 진해와 창원, 고성 지역으로 점령지를 넓혀가다가 유승민과 김시민을 비롯한 조선관군에 의해 패퇴하여 물러났다.

임진왜란 초 점령하였던 김산, 지례, 거창, 합천, 의령, 현풍 등에서도 조선관군과 의병에 의해 수복되어 경상좌도까지 위협당하고, 낙동강 수로를 통한 보급로는 조선의병에게 점령당함으로써 차단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일본군은 경상우도의 중심부인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관군의 주력을 제거함으로써 경상좌도를 점령함과 동시에 일본군 보급로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이는 1차 진주성전투에 참여한 일본군 주요 지휘관이었던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기무라 시게코레(木村重茲) 등이 작전회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토론 끝에, “경상우도의 병마의 주력이 진주성에 있는 듯하니, 이에 뿌리를 먼저 뽑아버린다면 다른 지방에서 시끄럽게 움직이는 조그마한 군사들은 싸우지 않고서도 스스로 흩어지고 소산될 것이니 먼저 이 성을 대병력으로 일거에 함락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 될 것이다”라고 결론내린 바 있다.6)

또한 1차 진주성전투가 있기 전까지 진주목사 김시민의 활발한 전투 활약을 일본군도 알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시작되었다.

진주대첩 참전 일본군 수
 
1차 진주성전투를 위해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진주성 공격명령을 내린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7) 또한 일본군 1번대에서 9번대(후에 8번대로 개칭)까지의 병력 이외에 나고야에서 주둔 중이라고 알려진 10번대에서 16번대까지의 예비병력 대부분이 경상도 지역에 주둔한 것은 이 지역에서 조선군과 일본군 간에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말해준다.

<표 >는 경상도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던 총 일본군 병력수를 추정한 것이다. 여기에서 문경과 함창에 주둔했던 5번대 초소카베 모토치카 (長宗我部元親)로부터 청도와 동래,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9번대 하시바 히데카츠(羽柴秀勝)까지 7명이 이끌던 일본군 병력은 주둔지와 지휘관 병력수가 일본전사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이 인원의 총수는 41,000여명이라고 일본전사에서는 밝히고 있다. 여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서에는 지휘관 성명이 기록되어 있지 일본전사에는 밀양과 양산, 기장에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3명의 지휘관이 이끌던 1,676명을 포함시켰다 (밀양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수는 기록되어 있지 않음). 또한 1차 진주성 공격을 담당한 것으로 나타나는 10번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11번대 기무라 시게코레(木村重茲), 15번대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 등 3명의 병력수가 추가되어야 한다. 이렇게 기록상 확실히 나타난 경상도지역에 배치된 일본군 지휘관과 소속 부대병력을 합하면 62,326명이다. 그리고 일본군이 전라도 진출의 길목인 진주성 공격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진주성으로 보낸 서울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일부 병력 7,500명(양재숙, 208) 더하면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약 7만 명이다.
 
<표> 경상도 지역 주둔 일본군
주요 도시 부대 지휘관 병력수
문경, 함창 5번대 초소카베 모토치카 (長宗我部元親) 3,000
상주 5번대 도다 카츠타카 (戶田勝隆) 3,900
선산 10번대 미야베 나가히로 (宮部長熙) 2,000
개령 7번대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30,000
인동 10번대 기노시타 시게카타 (木下重賢) 850
대구 14번대 아바나 사다미치 (稻葉貞通) 1,400
청도, 동래, 부산 9번대 하시바 히데카츠(羽柴秀勝) 8,000
밀양 미상 벳쇼 요시하루 (別所吉治) 미상
양산 미상 다니 모리토모 (谷衛友) 340
기장 미상 가메이 코레노리 (龜井眞矩) 1,336
창원 11번대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4,000
미상 10번대 나가오카 다다오키 (長岡忠興) 3,500
미상 11번대 기무라 시게코레(木村重茲) 3,000
미상 15번대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 1,000
합계 *62,326
자료: 參謀本部編, 1924, 󰡔日本戰史 朝鮮役󰡕, 附記, 村田書店의 기록을 재구성 

물론 이 병력 모두가 진주성을 공격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주요 도시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력은 제외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일본군 5번대와 같이 거점지역에서 조선관군 및 의병과 일상적인 전투를 벌인 병력은 진주성 공격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10번대부터 15번대까지의 병력 중에서 선산, 안동, 양산, 대구, 청도 등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 역시 제외시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밀양, 양산, 기장 등 소수병력으로 지역을 지키던 부대도 제외시킬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준으로 1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 가능한 일본군는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의 7번대 3만명, 미야베 나가히로 (宮部長熙)의 10번대 2,000명, 아바나 사다미치 (稻葉貞通)의 14번대 1,400명,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의 11번대 4,000명, 나가오카 다다오키 (長岡忠興)의 10번대 3,500명, 기무라 시게코레(木村重茲)의 11번대 3,000명,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의 15번대 1,000명 등이 동원 가능하다. 이 병력의 총수는 약 4만 5,000명이다.

사료에 따르면, 1차 진주성전투에 참여한 일본군의 수는 적게는 13,000명, 그리고 최대 30,0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관(2003)은 일본측 사료를 바탕으로 13,000명의 일본군이 동원되었다고 주장하였고, 강성문(2010)은 2만 명 정도로 예측하고 있으며,8)김성일은 학봉집9)에서 3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일본군의 전투단위인 1개 번대가 기본적으로 15,000명으로 내외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진주성을 1개 번대가 공격했다면 15,000명 정도이고, 2개 번대가 공격했다면 30,000명, 3개 번대가 공격했다면 45,000명까지로 공성(攻城) 병력규모를 예상할 수 있다. 일본군에게 진주성이 경상우도의 중심부로 인식되고 있고, 진주성을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의 조선군과 의병의 활동이 경상우도에 그치지 않고 점차 경상좌도로 확대되어 부산성과 한양성으로 이어지는 일본군의 보급로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략적으로 공격명령을 내렸고, 나고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예비병력이 대부분 부산과 김해지역에 도착한 점을 감안하여 진주성을 공격한 일본군 수를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진주성을 공격한 일본군은 부산과 동래 등에 주둔해 있다가 김해를 거쳐 3개 제대로 분할하여 진격한 사실과, 일본군 1개번대 편성이 약 15,000명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일본군 공격군의 총수는 45,000명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주요 전투를 치른 일본군 수를 감안하면 김성일의 추정이 타당해 보인다. 또한 일본 사료에 따르면 1차 진주성 공격 일본군 수가 20,000명으로 되어 있으나, 일본군은 패전을 기록하지 않고 전투결과를 확대 및 축소하는 성향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진주성전투에 참여한 일본군 수는 3만 명 정도로 판단된다.

1) 김준형, 1995, 「진주 주변에서의 왜적방어와 의병활동: 제1차 진주성 전투 이전」, 󰡔경남문화연구󰡕, 제17권,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pp.113~114.
2) “김시민을 진주 목사에, 이상신(李尙信)을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狀官)에, 김홍미(金弘微)를 경상좌도 도사(慶尙左道都事)에, 이천(李薦)을 영흥 부사(永興府使)에 제수하였다.”(조선왕조실록, 「김시민·이상신·김홍미·이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선조 28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7월 26일(계미) 9번째기사)
3) 박성식, 1992, 「진주성전투, 󰡔경남문화연구, 제14호, 경상대 경남문화연구소.
4) 김준형, 1995, 「진주 주변에서의 왜적방어와 의병활동: 제1차 진주성 전투 이전」, 󰡔경남문화연구󰡕, 제17권,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p.113.
5) 실제로 김시민은 1차 진주성전투에서 500기의 기마병을 전술에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김시민은 전투에 대한 준비를 충실히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신립이 탄금대 전투에서 배수진을 친 이유도 조선의 주력인 8,000명의 기마병 중심의 군대를 이용하여 일본군을 무찌르려 한 사실로 보아 조선은 일본의 침략에 많은 준비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6) 김준형, 1995, 「진주 주변에서의 왜적방어와 의병활동: 제1차 진주성 전투 이전」, 󰡔경남문화연구󰡕, 제17권,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p.116.
7) 일본은 제1차 진주성전투가 누구의 명에 의해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공식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일본 참모본부가 1924년 발간한 󰡔일본전사 조선역󰡕의 기록에 따르면 長岡忠興, 長谷川秀一, 木村重玆의 3장수가 김해에 머무르면서 “경상도 토적의 주력은 진주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만약 그곳을 토벌하면 기타 지역이 연달아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하여 휘하 13장수의 군사를 합하여 2만여 군사로 하여금 진주성을 점령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參謀本部編, 1924, 󰡔日本戰史 朝鮮役󰡕, 村田書店, p.208). 그런데 사료로서 신뢰성을 인정받는 일본 기록인 󰡔다이코기(太閤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豊臣秀吉이 진주성 진격명령을 내렸음을 시사하고 있다. “모쿠소(もくそ) 혹은 모쿠소 판관(木曾判官)의 나라(김시민 목사의 나라, 즉 경상도를 일컬음)에서 반란이 일어나 부산포와 수도 사이의 통로를 방해했으므로 호소카와 엣추노카미 3,000여 명, 하세가와 도고로 3,000여 명, 기무라 히타치노스케 2,000, 오노키 누오도노스케·마키무라 뵤무노타이·가스야 나이젠노쇼·오타 히다노카미·아오야마 슈리노스케·오카모토 시모즈케노카미 병사 5,000 도합 그 세력 13,000여 명으로 하여 목소판관의 진주성을 평정하라는 뜻을 명령하셨다”(최관, 2003, 「일본에서의 김시민 장군」, 제2회 충무공 김시민장군 선양 국제학술심포지엄 자료집. 무공김시민장군기념사업회, p.108.). 모쿠소란 牧使를 의미하는데, 유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에 전해져 간행된 1693년 이전까지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장수의 명칭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김시민 장군을 모쿠소라고 칭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최관, 2003, 「일본에서의 김시민 장군」, 제2회 충무공 김시민장군 선양 국제학술심포지엄 자료집. 무공김시민장군기념사업회, p.111.).
8) 강성문, 2010, 「진주대첩을 통해서 본 김시민의 전략과 전술」,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p.277.
9) “김해(金海)에 머물러 있던 적 3만여 명이 한꺼번에 진격하였는데, 9월 24일에는 세 부대로 나뉘어 노현(露峴)에 있던 군대를 습격하고, 27일에는 또 창원부(昌原府)를 침범하였습니다.”(김성일, 1649, 「진주성(晉州城)을 지켜 승첩(勝捷)한 것을 치계(馳啓)하는 서장」, 󰡔학봉집󰡕, 제3권 狀)
 
박희봉 교수는 조직론, 리더십, 사회자본 등을 강의하며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자본’이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 박희봉 교수: 한양대 행정학과,한양대 대학원,Temple University 박사,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현 중앙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중앙대 행정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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