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통일 전략 People
[신간] ‘경세가 위공 박세일 - 富民德國을 위한 꿈과 삶’
이상천 | 승인 2019.01.28 23:35
△‘경세가 위공 박세일 - 富民德國을 위한 꿈과 삶’ 책 표지
‘건국둥이’ 爲公 박세일의 일대기가 발간됐다.

[이상천 기자=푸른한국닷컴] 『경세가 위공 박세일 - 富民德國을 위한 꿈과 삶』은 위공(爲公) 박세일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해 ‘건국둥이’로 태어나 2017년 불의의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한 평생 대한민국을 뜨겁게 사랑했던 한 인물의 일대기다.

‘보수의 숨은 신(神)’, ‘한국 보수의 지적 상징’으로 불리던 위공(爲公) 박세일(1948~2017)의 삶의 궤적과 의미를 대한민국 현대사 속에서 조망했다.

위공 박세일이 생전 남긴 말과 글, 미 발표 유고(遺稿), 관련 서적, 언론 보도 기사,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통하여 그의 일생을 재구성했다.

2006년 박세일이 설립한 한반도선진화재단 창립 때부터 인연을 맺은 저자 최창근은 저널리즘 전공자의 장점을 살려 단순 명료한 문체로 위공 박세일의 꿈과 삶을 추적했다.

이 책에서 저자 최창근은 관련 자료를 추적·정리하여 밀도 있는 문장으로 위공 박세일의 삶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위공 박세일!
부민덕국(富民德國)을 꿈꾼 이 시대의 경세가(經世家)!

위공 박세일은 우리시대의 경세가였다. 그는 학문의 실천을 통하여 세상의 변혁을 꿈꿨다.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했던 시절, 신생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박세일은 ‘가난했지만 꿈 많은 소년’이었다. 학교에서는 성실하고 모범적인 학생이었으며, 가난한 집안을 돕기 위해 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던 고학생이었다. 형편은 어려웠지만 늘 밝고 긍정적이며, 진취적인 소년이었다.

196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한 박세일은 본격적으로 사회 문제에 눈떴다. ‘개발독재’로 불리던 시기, 그는 경제개발의 그림자였던 노동·인권 문제에 눈떴다. “세상의 부조리함을 바꿔 보고 싶다”는 꿈을 꾸었던 대학생 박세일은 이내 열정적인 학생운동가로 변해갔다.

서울대학교 이념서클 사회법학회에 가입하였고, 고(故) 조영래 변호사, 고(故) 김근태 의원 등 학생운동가들과 교류를 이어갔다. 대학 시절 위공 박세일은 ‘이론가’로서 학생운동의 중심에 섰다. 그의 손을 빌려 헤아릴 수 없는 유인물, 대자보가 탄생하였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의 대학 시절, 박세일이 열정을 쏟았던 것은 불교 활동이었다. 중학교 시절 룸비니불교학생회와 인연이 닿은 것을 시작으로 그는 신실한 불제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청담스님으로부터 ‘영성(領星) 거사’는 법명을 받았고, 대학 시절 수련과 기도에 열과 성을 다하는 그의 모습을 본 성철스님이 출가를 권하기도 했다.

광덕스님, 법정스님 등 당대 명승(名僧)·고승(高僧)들과의 인연도 이어졌다. 이를 통하여 부터님의 말씀과 행적을 몸과 마음에 새기게 된 박세일은 부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부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읽고 부처님의 말씀과 행적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된다.

대학 졸업 후 한국산업은행에 취업한 박세일은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학생운동가로서 ‘이중 생활’을 시작한다. 이로 인하여 ‘남산’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1973년 박세일은 일본 유학을 떠난다. 유신선포를 계기로 학생운동가들의 입지는 좁아졌고, 자의반 타의반 나라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도쿄대학 대학원 경제학부에 적을 둔 박세일은 학업과 아르바이트 그리고 민주화운동을 병행한다.

날품팔이 노동자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고 돈의 일부를 한국에 남은 가족 생활비로 보내기도 했다. 더하여 지명관, 오재식 등 민주화 운동가들과 교류를 이어가며 지명관이 ‘TK생’이라는 필명으로 일본잡지 『세카이(세계)』에 연재하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발간 핵심 조력자로 활동한다.

3년간 일본 유학생활을 마친 박세일은 1975년 미국 코넬대학교로 떠난다. 그곳에서 그는 노동경제학, 경제발전론, 국가발전전략을 공부한다. 학문의 심화를 통해 시야가 넓어진 박세일은 ‘개발독재’로 불렸던 박정희 체제에 대한 평가도 달리하게 된다.

대학생 시절 박세일은 민주화·자유화가 우선 순위라 판단하여 학생운동·노동운동에 몸을 던졌고, 박정희 체제와 불화했다. 다만 국가발전, ‘절대 빈곤 탈출’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경제성장을 우선시 한 박정희의 전략이 옳았다 판단했다. 시각이 바뀌니 평가도 자연 바뀌었다.

1980년 코넬대학교에서 노동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박세일은 한국개발연구원(KDI) 수석연구원이 된다. 서울 홍릉 숲의 한국개발연구원에서 그는 실증적 연구방법을 바탕으로 학제적 연구 방법을 개척하였다. 1982년 강사로서 모교 서울대학 법과대학 강단에 섰으며, 1985년 교수로 자리를 옮겨 후학 양성에 매진한다.

‘대학교수’ 박세일은 학문에 있어서도 선공후사(先公後私)를 강조했다. 법과대학 출신, 법과대학 교수로서 그는 “판사·검사·변호사가 되어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것 보다는 국가 공무원이 되어 헌신하는 것이 보람있다”고 강조하였다.

박세일의 가르침을 좇아 수많은 제자들이 행정고등고시에 합격, 공무원으로서 국가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배움의 실천’을 강조하던 박세일은 사회운동에도 앞장섰다.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창립 산파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교육개혁포럼, 한국법경제학회, 한국제도경제학회, 안민정책포럼, 한반도선진화재단 등 학회·단체·연구기관 창립을 통하여 학문을 통하여 세상에 기여를 실천했다.

1994년 박세일은 김영삼 정부 대통령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이 되었다. 정부의 ‘정책 사령탑’으로서 그는 ‘세계화’ 개혁에 앞장섰다. 이듬해 대통령 사회복지수석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교육 개혁, 노동개혁, 사법개혁, 재벌개혁에 앞장섰다.

그중 ‘시험을 통한 선발에서 교육을 통한 양성’이라는 법조인 선발·교육제도의 혁명적 변화를 가져 온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제도 시행은 박세일의 소신에서 비롯되었다.

1998년 박세일은 미국 브루킹스연구소로 떠난다. 워싱턴 D.C.에서 그는 거시적인 안목에서 세계의 변화와 한국이 나아갈 길을 조망하였다. 귀국 후 한국개발연구원 초빙석좌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 속에서 박세일은 풍전등화 처지의 한나라당에 전격 입당하였다. ‘개혁적·진보적’이라 평가 받던 그가 한나라당에 입당한 것에는 한국 민주주의의에 대한 우려가 자리했다. 위기에 처한 제1야당에 몸 담아 정부·여당을 견제하고, 정당 개혁을 통하여 부패의 늪에 빠진 제1야당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 생각했다.

제17대 국회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된 그는 한나라당 부설 여의도연구소장을 맡아 여의도연구소를 명실상부한 최고의 정당연구소로 자리잡게 하였다. 이듬해 한나라당 정책위원회 의장으로 자리를 옮겨 ‘선진화’라는 전략과 ‘공동체자유주의’라는 이념으로 한나라당 개혁에 앞장섰다. 이는 2007년 한나라당 재집권의 발판이 되었다.

2005년 3월 박세일은 한나라당을 탈당함과 동시에 비례대표 국회의원 직을 스스로 버렸다. 당시 논란이 되고 있던 ‘수도 분할’에 의한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하는 정치적 소신의 발로였다. “국가의 미래에 먹구름을 드리울 것이 분명한 행정수도 분할 이전은 안된다”던 박세일은 자신의 소신을 관철하기 위해 몸을 던졌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을 함으로써 국회의원직을 스스로 버리는 헌정 사상 유일무이한 사례를 남겼다.

건국-산업화-민주화에 이은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을 ‘선진화’로 정의한 박세일은 2006년 이를 집대성한 『대한민국 선진화전략』을 출간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2006년 9월 한반도선진화재단을 설립, ‘선진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하였다. 이후 한반도선진화재단은 비정파적 민간 싱크탱크의 모범 사례로 자리매김하였다.

“역사는 이상주의자들의 실패에서 발전한다”

한반도선진화재단을 중심으로한 연구·교육 활동에 한계를 느낀 박세일은 대한민국과 한반도 전체의 선진화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불가급한 전제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 몸을 던졌다. 선진통일연합(현 선진통일건국연합)을 창립, 통일 운동의 지평을 대중 속으로 넓혔다. 박세일 자신도 통일운동가, 통일운동 강사로서 최일선에서 한민족의 지상명령인 통일을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는 ‘선진통일’을 새로운 시대의 과제로 제시했다.

2012년 박세일은 또 하나의 중대 결심을 했다. 정파적·소모적 논쟁에 함몰된 기성 정치권에 더 이상 대한민국과 한반도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박세일은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힘을 합친 ‘대(大)중도 정당’을 꿈꾸며 정당 ‘국민생각’을 창당했다.

박세일 자신도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사상 첫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이상은 높았으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박세일 본인을 비롯, 국민생각 지역구 출마자 전원이 낙선의 고배를 마셨고, 국민생각도 해산되었다. 처절한 실패 속에서도 박세일은 “역사는 현실주의자들의 승리가 아니라 이상주의자들의 패배에서 발전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국민생각 해산 후 박세일은 선진통일을 위한 국민운동에 앞장섰다. 유물론·계급주의사관·수정주의사관에 기반하여 대한민국 탄생과 발전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반(反) 대한민국 사관(史觀)’과 투쟁에도 앞장섰다.

삶의 후반부를 선진통일을 위해 바치던 박세일을 병마가 덮쳤다. 고통스러운 암 투병 속에서도 박세일의 머릿 속에는 오로지 대한민국 걱정 뿐이었고, 제자에게 남긴 마지막 한 마디는 “대한민국 잘해라!”였다.

위공(爲公) 박세일(朴世逸 )<1948년 ~2017년>

1948년 서울 중구 만리동에서 태어났다.
서울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한국산업은행 법제조사과 근무 후, 일본 도쿄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미국 코넬대학교에서 경제발전론・법경제학・노동경제학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80년~1985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수석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1985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모교 강단에 섰다.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창립을 주도했고 2002년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94년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 1995년 사회복지수석비서관으로서 세계화 개혁・교육개혁・사법개혁・노동개혁・복지개혁을 주도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으로서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 당 정책위원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2006년 비非정파적 민간 싱크탱크 한반도선진화재단한선재단을 창립, 이사장에 취임하여 선진화・통일 비전과 정책 연구・개발에 앞장섰다.
2011년 선진통일연합현 선진통일건국연합을 창립, 상임의장으로서 선진화 통일을 위한 국민운동을 전개하였다.
2012년 국민생각을 창당, 당 대표에 취임하였다.
이후 2017년 영면에 들 때까지 한반도 선진화 통일에 앞장섰다.
1987년 한국경제학회 청람상, 1997년 국민훈장 모란장, 황조근정훈장, 2011년 도산교육상을 수상했고 2017년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으로 선정되었다.
한국노동경제학회・한국법경제학회 학회장, 교육개혁포럼 회장, 안민정책포럼 이사장을 역임했다.

* * * * *

글 최창근(崔彰根)

한국외국어대학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타이완 국립정치대학(國立政治大學)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 일반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국회, 한반도선진화재단, 중앙일보시사미디어 등에서 일했고 대만 유학 시절 『월간중앙』 타이베이 통신원으로 활동했다.
『신동아』 『시사IN』 등에 쓴 책으로는 『대만: 우리가 잠시 잊은 가까운 이웃』(2012), 『대만: 거대한 역사를 품은 작은 행복의 나라』(2013), 『타이베이: 소박하고 느긋한 행복의 도시』(2015), 가희 덩리쥔 : 아시아의 밤을 노래하다』(2017)이 있다.
2006년 위공 박세일이 설립한 한반도선진화재단에 몸 담은 것을 인연으로 위공 박세일과 인연을 이어왔으며, 그의 일대기를 다룬 책을 썼다.


푸른한국닷컴, BLUKOREADOT

이상천  house@paran.com

<저작권자 © 푸른한국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상천의 다른기사 보기
icon최근 이슈기사
블룸버그 대선출마 선언, 공화당으로 뉴욕시장에 당선 대통령은 민주당 당적으로블룸버그 대선출마 선언, 공화당으로 뉴욕시장에 당선 대통령은 민주당 당적으로
인생의 마지막 경지,우주적 자아인생의 마지막 경지,우주적 자아
김호영 동성 성추행 혐의 피소,고소인김호영 동성 성추행 혐의 피소,고소인"자신의 성 정체성 떳떳하게 털어놓고 사과하라“
지리산 첫 눈, 천왕봉에서는 상고대 연출지리산 첫 눈, 천왕봉에서는 상고대 연출
icon가장 많이 본 기사
기사 댓글 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성북구 동소문동 2가 247 3층  |  TEL : 02-734-4530(代)  |  FAX : 02-734-8530  |  긴급연락처: 010-2755-6850
제호 : 푸른한국닷컴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아 01298  |  창간일 : 2010. 07. 20  |  발행·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전영준  |  마케팅이사 : 김혁(010-3928-6913)
Copyright © 2010-2019 푸른한국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ugsum@nate.com.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