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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세계 해전사를 바꾼 최무선의 화포
이종호 | 승인 2015.04.12 17:53

   
▲ 최무선 화차.사진@최무선과학관

최무선은 걸출한 과학자이자 발명가

[이종호 과학국가박사]고려시대에 왜구(倭寇)는 고종 10년(1223)에 처음으로 침입했으나 충열왕 때 원나라와 함께 일본 정벌에 참가함으로써 한동안 잠잠해진다.

그러나 충정왕 2년(1350)부터는 매년 침범하여 공민왕과 우왕을 거쳐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40여 년간 극성을 벌였다. 고려말의 왜구는 침입횟수가 많은 것은 물론 그 규모가 매우 컸다. 많을 때는 200〜500척까지 떼지어 몰려들어 특정 해안지대는 물론 내륙 깊숙한 곳까지 침입하여 그 피해가 막심했다.

이때 일본은 남북조로 갈려 60여 년간(1322〜1392) 전쟁을 하고 있어 중앙정부의 위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하자 일본 서부의 호족들이 곡식과 기타 필수품을 획득하기 위해 해적떼를 조직하여 마침 국방력이 약화된 고려를 조직적으로 침입했던 것이다. 왜구가 창궐한 원인 중에 하나는 고려 전략에도 기인한다. 고려는 왜구가 침입하면 일단 그들을 육지에 상륙시켜 놓고 요격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육전(陸戰)위주의 전술을 견지했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자 공민왕은 육전에서 수전으로 전략을 바꾼다. 왜구들을 육지에 상륙시키지 않고 바다 위에서 그대로 격퇴하는 해전주의로 전술을 바꾸어 군선을 건조하고 수군을 조직했다.

이때 최무선이라는 걸출한 과학자이자 발명가가 등장한다. 최무선은 고려 말엽인 충숙왕 12년(1325〜1395) 경북 영주(현재의 영천)에서 광흥창사 동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흥창이란 관리의 봉급을 담당하는 관청이었다. 최무선이 무관으로 임관했을 때 고려 조정은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화약무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지만 화약무기를 사용하는데 가장 관건인 화약을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화약 무기 개발 상황을 보자. 학자들은 1232년 금나라에서 원시적인 폭탄인 진천뢰와 로켓의 원리에 의해 분사추진이 되는 불화살 비화창(飛火槍)이 등장하고 14세기 초 원나라가 둥그런 탄환 혹은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유통식(有筒式) 화기인 화포(또는 총통)가 개발되었다고 추정한다. 이같은 화기류는 원나라의 유럽 원정으로 아랍과 유럽 세계에, 그리고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의 일본원정으로 고려에 알려졌다. 그러나 중국은 화약 제조법을 군사기밀인 극비사항으로 엄격히 통제했으므로 좀처럼 다른 나라에서 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공민왕은 1373년 명나라의 주원장에게 ‘왜구의 습격으로 국력이 소모되고 있다. 근래에 왜구의 형세가 더욱 치열하니 바다에서 적을 추격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근절시키기 위해 배를 만들려고 한다. 그 배 위에서 사용할 기계, 화약, 유황, 염초 등의 물건을 조달할 방법이 없으니 명나라에서 분배해 달라’고 화약을 보내달라고 했다.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개국한 명나라는 고려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고 최첨단 무기로 볼 수 있는 화약을 무작정 공급할 수도 없으므로 여러 가지 이유를 대어 고려에서 요청한 량을 모두 주지 않고 초석 50만 근과 유황 10만 근을 원조했다.

명나라로부터 충분한 양의 화약을 공급받지 못하자 고려 조정은 국내에서 화약 만드는 방법이 최상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최무선에게 그 임무를 맡긴다. 최무선은 우선 과거에 화약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조사했다.

그리고 이전부터 염초에 반묘(유황)와 버드나무 숯(분탄)을 섞어 화약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반묘와 분탄은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염초를 만드는 방법은 알 수 없었다. 그는 화약을 만들기 위해 부엌 아궁이의 재나 마루 밑의 흙을 물에 타서 끓이는 등 수 없는 실험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초보적으로 염초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성능을 개량하기 위해서는 염초의 제조법을 정확히 배울 필요가 있었다. 그는 중국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우여곡절 끝에 염초 제조법을 알고 있는 중국인 이원(李元)을 만나 그에게서 염초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그 후 실험을 거듭하여 화약의 기본 성분인 염초(초석, 질산칼륨(KNO3)) 만드는 방법을 숙지하여 반묘와 탄소를 합리적으로 배합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오늘날 흑색 화약(유연화약)과 같은 것으로 질산칼륨 75퍼센트, 유황 10퍼센트, 목탄 15퍼센트를 화합하여 만든 화약을 말한다.

화약을 개발한 최무선은 화약을 이용한 무기, 즉 화전, 화통 등을 만들어 실험해본 후 자신감을 얻자, 화약과 각종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만드는 화통도감(火筒都監)의 설치를 건의했다. 1377년 고려는 드디어 화약무기를 본격적으로 개발하는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판서로 임명했으며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을 조직했다.

화포를 사용한 세계 최초의 해전

화약의 국산화에 성공하고 화통도감의 판서가 되어 화약무기를 만들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는데 그의 진가는 예상보다 빨리 나타난다. 1380년 우왕 6년에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왜구 2만여 명이 500여 척의 배로 진포(현 군산)에 상륙하여 내륙을 휩쓸고 다녔다. 고려 조정은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와 함께 최무선을 부원수로 삼아 전선 80여척을 동원 왜구를 토벌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왜구들은 주력이 이미 상륙하였고 선박들을 모두 연결하여 항구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최무선의 화약무기로 무장한 고려 군함은 왜구의 선박에 포격을 퍼부었다. 이 당시 화포, 화통, 질려포 등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였고 특히 로켓무기인 주화, 유화, 촉천화 등이 전선 깊숙이 날라가 500여 척의 선단을 단 한 척도 남김없이 격멸했다.

최무선의 화약무기 공격으로 배를 모두 잃은 왜구 잔병은 충청도 옥천과 경상도 상주, 김천을 거쳐 남하하다가 전라도 남원에서 후에 조선왕조를 세우는 이성계에 의해 지리산 밑의 운봉(雲峰)에서 완전히 섬멸한다. 이 전투가 유명한 남원의 운봉 황산대첩이다.

우왕9년(1383)에 또 다시 왜구들이 120척의 배로 침입해 왔으나 정지 장군이 군함 47척으로 왜구의 선박120척을 추격하여 남해 관음포에 이르러 화포로 왜구들이 갖고 있던 선박을 모두 격멸한다. 두 전투가 세계 해전사상 매우 중요한 평가를 받는데 진포 앞바다의 해전은 세계 해전사에서 처음으로 선박에 화포를 설치하여 정박 중인 적선을 완파했고 관음포에서는 바다에서 함포로 적선을 격침시키는 해전을 치루었다는 점이다.

승기를 잡은 고려 조정은 왜구를 원천적으로 근절시키기 위해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키로 하고 1389년에 박위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여 전선 100척을 동원하여 대마도 토벌에 나선다. 고려군은 300여 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왜구 소굴을 철저히 파괴하고 인질로 잡혀있던 고려 백성 100여명을 구출해서 귀국한다.

이 모든 전투가 최무선의 화약무기를 전선에 탑재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최무선이 고려 선박에 화포 장착이 용이했던 이유는 고려의 함선들인 과선(戈船), 대선(大船), 그것을 승계한 조선의 판옥선(板屋船)을 포함하여 두 개의 용골을 나란히 깔아 이어서 선체를 만드는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이기 때문이다.

평저선은 포 사격시 발생하는 반동에도 안정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후일 임진왜란이 발발된 후 일본이 화포를 장착한 조선의 함선의 위력에 놀라 조선 수군과 마찬가지로 화포를 설치하지만 용골이 하나뿐인 구조로 인하여 조선 수군에 비해 화포의 명중률이 현저하게 낮았다. 또한 화포를 쏘고 나면 불안정하여 침몰되기 십상이었다.

최무선은 왜구의 침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는 함선에 화약 무기를 장착하여 적함을 바다에서 완전히 격침시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 방법이 문제였다. 당시 고려의 여건으로는 화약을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최무선은 자신이 직접 화약을 제조하기로 결심했다. 지금도 외국이 가진 첨단 기술, 더구나 군사 기술을 알아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고려 시대에 명나라가 그토록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던 화약 제조술을 습득하기가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그런데도 최무선은 포기하지 않고 화약 개발에 몰두하여 결국 국산화에 성공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무기의 제조였다. 일단 화약을 사용한 무기를 제작하여 발사 실험에 성공하자, 최무선은 조정 대신들을 설득하여 화통도감을 설치한 후 과거의 무기들을 개량하고 주화(신기전)와 같은 로켓 무기를 개발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전함에 화약 무기를 싣고 보기 좋게 왜구들을 쳐부수어, 다시는 조선 반도를 침략할 엄두를 못 내게 만들었다. 나아가 이때부터 자리잡은 전술 덕분에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수많은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며 왜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로서 최무선이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위에 나열한 업적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화약을 개발하고자 할 때부터 함선에 화포를 장착하여 왜구를 물리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해 과학적인 연구와 끈질긴 노력을 쏟았다는 데 있다.

유럽에서 화포를 사용하여 해전을 벌인 것은 고려보다 무려 2백 년이나 늦은 1571년 10월 7일 아침, 베네치아, 제노바, 에스파냐의 연합 함대가 투르크 함대를 격파한 레판토 해전이다.

당시에 세계의 주도권은 이슬람 교로 무장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슐레이만 대제로 불리는 슐레이만 1세(재위 1520~1566)는 오스만 제국에 미증유의 번영을 가져왔고 서방 세계의 분쟁에 중재자로 나서는 한편 제국의 통치 기구를 확고하게 다졌다.

그는 베오그라드를 점령하여 난공불락으로 알려진 다뉴브 강을 넘었고 로도스 섬을 점령했다. 슐레이만은 육군 이외의 비장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오스만 함대가 그것이다. 오스만 함대는 합스부르크 함대를 격파하고 모로코를 제외한 북 아프리카 연안을 제압했고 지중해의 제해권을 확보했다.

슐레이만 1세의 아들인 셀림 2세는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키프로스 섬을 점령했다. 이 당시 키프로스는 베네치아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힘에 힘없이 무너지자 오스만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로마 교황 피우스 5세는 유럽을 규합하여 반 오스만 연합을 결성했다.

교황과 에스파니아는 오스트리아와 베네치아를 동맹으로 끌어 드린 후 오스트리아 카알 5세의 서자인 돈 환으로 하여금 연합함대를 이끌게 했다. 마침 오스만 함대는 키프로스 작전 후 군함들의 보수를 위해 지중해 코린트 만 어귀의 레판토 항구에 정박해 있었지만 돈 환이 거느린 신성동맹(神聖同盟)의 그리스도 교도 함대가 다가 왔다고 하자 오스만 함대의 메흐메트 알리는 적들을 요격하기 위해 출항을 명령했다. 양쪽 세력은 비슷했지만 200척을 넘는 갤리선과 약 3만 명의 병력을 거느린 투르크 측이 수적으로 다소 우세했다.

그러나 오스만 함대는 그리스도 교도 함대에 신형 무기 즉 대포가 탑재되어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강력한 대포를 비치한 신형 베네치아 갤리 선에서 예상치 못한 포격을 하자 투르크 함대는 곧바로 혼란에 빠져들었다. 정오경 이미 전세는 그리스도 군에게 넘어갔고 오후 4시에 승리를 거두었다. 투르크 군의 100 척이 넘는 군함들이 나포되었고 거의 1만 명이나 되는 장병들이 생포되었다.

이 전투가 유럽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최초의 승리였다. 레판토 해전 이후 오스칸 제국이 곧바로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오스만 제국은 서서히 쇠퇴의 길로 넘어가고 역사의 주도권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가며 이후 바다를 누비는 국가가 세계를 정복하게 된다.

실제로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비롯하여 영국의 넬슨 제독과 프랑스군의 트라팔가 해전도 최무선이 화약무기를 선박에 장착하기 시작한 아이디어를 답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최무선의 화약무기로 함대를 공격하는 새로운 전술은 세계 전사를 완전히 바꾸어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게 만든 것을 볼 때 그의 중요성은 어느 유럽의 과학자들보다 작지 않다.

최무선이 세계사를 바꾼 아이디어를 만든 장본인 중에 한 명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함선 속에 화약무기를 탑재한 후 전선을 격파할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도출한 사람이 최무선이라는 사실이 유럽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알려졌는지는 확인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겨준다.

그러나 학자들은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해전 전술이 유럽에 전파된 것이 틀림없다고 추정한다. 유럽의 연합함대가 오스만 함대를 격파한 것이 1571년인데 이 당시에는 포르투갈 인들이 일본인들과 활발히 교류했고 조선시대에 아랍인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상인들이 드나들었다는 것을 보면 터무니없는 억측은 아니다. 최무선이 세계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참고문헌 :
『과학교과서 영화에 딴지를 걸다』, 이재진, 푸른숲, 2004
『장난꾸러기 돼지들의 화학피크닉』, 조 슈워츠, 바다출판사, 2002

『잔다르크』, 앙드레 보슈아, 범우사, 1985
『세계의 현대병기』, 박진구, 한국일보사, 1984
「조선이 세계 최고의 전략 미사일을 가졌었다는데」, 이한우, 조선일보, 20080906

■ 이종호 과학국가박사

   
 
1948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 졸업.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 취득. 1982년 과학기술처의 유치 대상 해외 과학자로 선정돼 프랑스에서 귀국해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KIER)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기.

'노벨상이 만든 세상',‘로마제국의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85권의 과학 도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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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 티라노 2016-05-07 22:24:43

    ...기사내용에 심각한 오류. 세계 최초의 화포를 사용한 해전은 레판토 이전에 1338년 백년전쟁때에 이미 있었습니다.
    기사에 있는 진포 해전인 1380년보다 40여년 전의 일입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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