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를 같이 하고 벼슬을 해야만 친밀해 진다는 것은 모두 천박한 의론일 뿐

[김성춘 푸른한국닷컴 칼럼위원]사람들은 내가 옛 여인을 사랑한다고 하니까,「사랑을 하려면 오늘날 살아있는 여자 중에서 사랑해야지 하필이면 이미 먼지가 됐을 옛 여인을 사랑할 것이 무어냐?」고 말한다. 이에「나는 오늘날의 여성에게는 마음이 안 가고. 자꾸만 옛 여인에게만 마음이 쏠리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하고 되물었다.

사람들은 또 말한다.「당신의 취향은 괴팍한데, 그렇다면 당신이 사랑하거나 사랑하고픈 그 옛날 여인은 어떠한 사람인가?」라고. 이에「나는 옛날 여인의 다소곳한 자태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여인의 정신세계와 내면세계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누구는「하늘의 절반을 떠받치는 것은 여성.」이라고 말하였다. 음양(陰陽)하는 것이 도(道)이거나 음양하게 하는 것이 도인데, 남녀관계야말로 음양의 최고 형태인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여인을 그것도 동서고금의 여인을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개혁군주 정조로부터「소설」과「소품」을 쓴다고 관직 진출이 봉쇄당한 이옥은 「천지만물을 관찰하려면 사람을 관찰해야 하고. 사람을 관찰하려면 정(情)을 살펴보아야 하고. 정에 대한 관찰은 남녀간의 정보다 더 진실한 것이 없다.」라고 하여 남녀간의 정이 세상의 축(軸)임을 말하고 있다.

동양의 세익스피어라고 불리는 중국 명나라 사람 탕현조는 그의 대표 희곡「모란정」서문에서「정(情)은 생기는 줄 모르지만 한 번 주면 깊어지니. 정이 있으면 산 자도 죽을 수 있고, 죽은 자도 살아날 수 있다. 살아서 죽어보지 못하고 죽어서 살아나지 못한다면 지극한 정이라 말할 수 없다.

꿈속의 정이라 해서 어찌 진정이 아니겠는가? 세상에 꿈속의 사람이 어찌 없으리. 꼭 잠자리를 같이 하고 벼슬을 해야만 친밀해 진다는 것은 모두 천박한 의론일 뿐이다.」라고 하여 사람과 사람사이, 남녀사이에서 정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말해주고 있다.

이옥이나 탕현조의 표현을 빌린다면, 세상을 여는 키도 남녀간의 정이고. 세상을 들여다 불 수 있는 것도 남녀간의 정인데, 그 정의 대상자가 꼭 지금 사람이어야 하고. 옛날 사람은 안 된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연면히 내려온 정이 더 사람의 마음을 끌고 흔들 수 있는 것이다.

또 사람들이 묻는다.「그렇다면 그 여인은 도대체 누구요?」.나는 서슴없이「우리나라에서는 황진이이고. 이웃나라에서는 희곡「모란정」의 여주인공 두여낭과「도화선」의 여주인공 이향군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여인들은 내가 진정으로 말을 걸고 싶고. 말을 섞고 싶은 사람들이다. 내가 이 여인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들이 단아하고 고혹적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뚜렷한 가치의식과 탕현조가 말한 깊은 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황진이는 너무나 유명하다. 시문에 능할 뿐 아니라 마음씀씀이도 넉넉하고. 기품도 있을 뿐 아니라 안목도 높았다. 자기를 연모하다 죽은 총각의 관에 자기의 속속곳을 얹어줄 줄 알았고. 천 명의 사내가 그녀를 흠모했으나 그녀는 오직 한 사람 서경덕만을 사모하였다. 죽어서는 그녀의 주검을 벌판에 버려 짐승에게 보시하라고 하였다.

두여낭은 탕현조의 희곡「모란정」의 여주인공으로 꿈속에서 만난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그 사람 때문에 상사병에 걸려 죽고. 그 사람 때문에 다시 살아난다. 매화꽃 만발한 모란정 옆에서. 이향군은 공상임의 희곡「도화선」의 여주인공으로, 그녀는 온갖 고초를 겪으며 정인(情人) 후방역을 위해 정조를 지키지만 마지막에 정조를 지키려다 머리를 다쳐 정인이 준 부채에 붉은 피가 마치 복숭아꽃처럼 피어난다. 바로 도화선(桃花扇)이다.

이 여인들은 부박한 세상. 개념 없는 사람들 속에서 가치를 위해 온몸을 내던진 것인데, 지금 여성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순정과 정조가 마구 땅에 뒹구는 세상에서 이 여인들은 무엇이 진정한 사랑인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 여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과연 어떤 여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여인들은 사람의 정만큼 소중한 것이 없고, 사람은 정을 떠나서 살 수 없고 정 없이 살아서도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강제와 자율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정절과 여성스러움이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아니고 성적 자기결정권이자 여권으로 전환될 때 그것은 우리가 지향할 하나의 가치가 되는 것이다.

-옛 여인들은 가치관 쪽에서도 오늘날의 여성보다 더 치열했고, 정 쪽에서도 오늘날의 여성보다 더 깊었다. 이런 여인들을 사랑하지 않고 또 어떤 여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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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춘  kimmaeu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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